무력함(helplessness)
누군가의 입에서 불안, 무기력, 그리고 우울을 듣는 것이 익숙해졌다. 신자유주의의 과도한 경쟁, 부채 사회가 야기한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현재’,
이에 따르는 실존의 위기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영화 〈화차〉(변영주, 2012), 〈똥파리〉(양익준, 2009) 그리고
소설 『엄마들』(김이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문학과지성사, 2010), 〈환영〉(김이설, 『환영』, 자음과 모음, 2011), 〈서른〉(김애란, 『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 〈달콤한 게 좋아〉(정미경, 『창작과
비평』, 2012년 봄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실존의 위기를 느끼며 방황한다.
이들은 무력하다. 스스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움을 바랄 수도 없다. 그저 ‘현재’에 적응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 이야기에서 ‘나’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도처에서 여러 포장의 단계를 거쳐 ‘희망’을 말한다. 희망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의
세계’에서 발버둥친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
무기력 그리고 우울이다. 그렇다면 벗어날 수 있다는 거짓된 ‘희망’에 함몰하기보다는, 현재를 극단으로 끌고 가 그 처절한 지점을 직면해야 하지
않을까?
(밤)
고립
2014년 《살아있는 밤의 산책자01》(공간 지금여기, 기획 별.별.밤)을 준비하면서 김태동의 '데이 브레이크(Day Break)' 시리즈를 살폈다. 그의 사진은 자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설파하던
기호들이 최소화되어 있었고,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 자연스럽지만 매우 어색한 포즈로, 그것도 무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왜 왔는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은 밤의
도시 공간을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작가가 생각하는 ‘밤’이 궁금했다. 《살아있는 밤의 산책자01》의
기획자로서 생각했던 밤은 경계 지워짐이 야기하는 비가시적인 우글거림이었다. 그러나 질러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김태동의 밤은 그냥 ‘밤’이었다. 밤의 자명성이 전제되었으며 평면적이었다. 여전히 경계의 소멸이 아니라 경계
지워짐에 기대고 있었다. 결국 전시를 함께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밤이 무엇일까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했다.)
몇 달이 지난 후 작가를 만나 작업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다시 '데이 브레이크' 시리즈를 다시 살폈다. 이 과정에서 발견한 것은 ‘배회하는/헤매는/방황하는 작가’ 김태동이었다. 이는 사진
속 인물들의 모습과 겹쳤다. 무엇이 그들을 배회하게 했을까? 그들의
무표정이 왜 그렇게 자연스러울까? 그들은 왜 고립되었을까? 어쩌면 김태동은 ‘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립’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다. 이야기의 방점을 ‘밤’이 아닌 ‘고립’에 둔다면, 김태동의 작업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의 배회에는 상당 부분 삶의 고단함에 기인한다. 그것을 견디기 위해,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상념에 빠지고 배회한다. 그러나 종국에는 고립되어 있다. 밤의 스산함이건, 공간의 황폐함이건, 건물의 전면화이건, '데이
브레이크'의 인물들은 모두 고립되어 있다. 그들 주변에 어느 누구도
없다. 그들 주변에는 ‘우연’이라는
가느다란 끈으로 만난 자신 앞에 있는 작가 김태동뿐이다. 사뭇 당당하게 포즈를 취해보지만, 역시 고립되어 있다. 스스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누군가의 도움도 그들에게는 없다.
고립은 “비일상적이며 비현실적”(김태동 작품집 『DAY BREAK BREAK DAY』에 수록된 강수정의 글
「그의 전략, Day Break」)인 것도,
“익숙한 공간을 낯설게 보고자 하는 시도”(김태동 작품집 『DAY
BREAK BREAK DAY』에 수록된 신수진의 글 「주변과 중심의 유동성에 대한 탐구」)도,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네이버 캐스트 『헬로! 아티스트』에
수록된 기혜경의 추천의 변)도 아니다. 그간 숨기고 싶었던 뼈아픈 현실이며, 여전히 반복되는 익숙한 풍경 그 자체이다. 단지 보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고립의 교감
'브레이크 데이즈(Break Days)' 시리즈는 ‘고립’을 전면화했던 '데이 브레이크' 시리즈와 쌍을 이룬다. 일출과 일몰이 닮아 있는 두 작업은 유사 관계에 있다. 밤이 낮으로 변했다. 실상 이는 큰 차이는 아니다.
의미 생성에 주요한 ‘고립’은 여전히 그의 사진에 내재한다. 차이는 인물의 유무이다. 물론 '브레이크
데이즈' 시리즈에도 인물이 있다. 하지만 공간만으로 고립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우연’이 만난 인물을 통해 ‘고립’을 전면화했던 김태동의 작업에서 공간만으로 ‘고립’을
이야기하는 작업은 예외적이다. 두 작업의 차이는 인물 뒤에 숨어 있던 작가가 전면에 드러나는 것이다.
자신이 살던 연신내의 낮 공간을 촬영한 이 작업에서 작가는 관찰자의 시각을 버리고
자신을 본다. 작가가 그간의 세월을 보낸 연신내는 익숙하다. 익숙하다는
것은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관계 맺을 것이 도처에 있다. 그럼에도
그의 사진 속 공간은 고립되어 있다. 그가 살아오며 낮에도, 밤에도
수없이 봤을 공간을 지나지만, 그는 무력감을 느낀다. ‘어찌 할 수
없음’의 외로움의 풍경이 여기저기에 편재해 있다. 풍경이 장악한 고독감은
작가 자신의 것이면서, 작가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특정화한 어떤 인물의
고립이 아닌 나를 포함한 누군가의 고립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김태동이 발견한 이 도시의 고립은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만족을 위해 선택한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이다. 연대가 아닌 고립을 통한 무한 경쟁의 강요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전형적인 인간형이다.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 고립을 선택하고, 어느 순간에는 그것이 고립 그 자체로 자기에게 돌아온다. 이는 그릇된 가치관 때문도 아니고,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고, 실수를 했기 때문도 아니다. “가만히 있어라”라고
교묘하게 비가시적으로 강요하는 힘들이며, 그것에 순응해 왔기 때문이다. 김태동은 ‘거짓된 희망’을 품으며 안주하는 것에서 벗어나 고립이 ‘의무’가 되어 있는 지금-여기를 직면한다.
그렇다면 고립을 잊을 것인가? 아니면 고립을
잊지 않을 것인가? 어려운 질문이다. 고립을 잊지 않는다면 더욱 더
고립될 것이며, 고립을 잊지 않는다는 것 역시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립의 교감이 아닐까. 고립을 단일한 주체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교감해야 하는 그 무엇으로
바라보는 것 말이다. 지금 내 앞에는 '브레이크 데이즈' 시리즈 중 한 장이 있다. 구파발역과 연신내역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있고, 거대한 아파트가 있고 그 앞에는 또다시 거대한 갈색 벽돌 건물이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굴뚝이 있고, 컨테이너 박스가 있다. 어울리지 않는 이들이
하나의 풍경을 만들며 서로 기대고 있다. 이 풍경의 장면 장면을 하나씩 호출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말한다. 이질적이고 낯선 풍경이 아니라 서로가 고립되어
있다. 그러나 고립 자체를 이야기하며 각자에게 손을 내밀어 본다. 비록
그것이 김태동이 밤거리에서 우연히 누군가를 만났던 것처럼 연약하고 가느다란 끈이라도 한 번 잡아보고자 한다.
불안과 공포는 고립을 자초한다. 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리지음이다. 강요하는 고립을 희망으로 혹은 낭만으로,
혹은 낯선 것으로, 혹은 이질적인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고립을 통한 교감과 이에 따르는
무리지음이 필요하다. '브레이크 데이즈' 시리즈에서 보이는 기괴하고
불안하지만, 그들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