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동, 〈Symmetrical-024〉, 2010,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 김태동

카메라 앞에서 인물은 지나치게 특별해진다. 김태동의 ‘Day Break’ 연작을 보면 이는 분명해진다. 이 사진들이 독특한 느낌을 자아내는 이유는 아무런 설명이나 맥락 없이 화면 중심에 던져진 인물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다양한 종류의 컨템포러리 초상 사진에 익숙해져 있으며 화면에서 해석의 단서를 모두 제거하는 소위 데드팬(deadpan)의 언어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진들이 뭔가 석연찮은 인상을 주는 이유는 논리적으로 쉽게 연결되지 않는 장치들의 혼재 때문이다. 우선, 가장 먼저 드는 느낌은 인물이 포착된 인위적 방식이 일관성을 보여주지 않는 데서 오는 당혹감이다. 즉, 인물의 표정이나 자세는 분명 어느 정도 작가의 지시가 개입된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그 설정의 의도나 방향이 모호한 것이다.

예를 들면, 카메라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스스로의 자세를 만들어내는 리네케 다익스트라(Rineke Dijkstra)의 인물들이 자아내는 어색한 자연스러움도 없고, 반대로 오형근이나 토마스 루프(Thomas Ruff)의 인물들처럼 일관된 자세와 표정을 통해 어떤 인물군의 특징을 강조하거나 반대로 제거하려는 의도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인물들은 제각기 화면에서의 비중도 다르고, 자세도 다르고 시선의 방향도 다르다.

각각의 사진들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로 삼을 만한 단서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즉, 사진 속 인물과 공간은 모두 어느 정도 작가의 통제하에 있는 것이 분명하나, 그 통제의 논리를 전혀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사진의 제작 방식을 살펴보자. 작가는 자정 이후에 거리로 나가 적당한 장소를 선택한 후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행인을 섭외한다. 행인이 촬영을 수락하여 포즈를 취하고 열악한 조명 조건 속에서 실제로 만족할 만한 사진이 나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새벽이라는 특수한 시간대의 미묘한 분위기를 잘 반영한다고 생각되는 장소의 선택이 먼저 이루어지고, 이렇게 마련된 ‘무대’에 마지막으로 인물이 (다소 무작위적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의 순서가 알려주는 것은 이 사진의 주인공이 인물이 아니라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단 한 장의 예외를 제외하고, 공간이 인물의 배경으로 전락하지 않고 비중 있게 재현되도록 작가가 기울인 다양한 노력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확인된다. 작가는 공간의 자연스러운 묘사를 위해 인공조명을 최소화하면서도 가능한 구석구석을 정밀하게 담기 위해 고군분투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화면을 지배하는 기묘하게 연극적인 분위기에 일조한다. 애초에 작가는 새벽이라는 특수한 시간에 공간이 주는 낯설고 기이한 느낌에 흥미를 느껴 이 시리즈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 사진들은, 말하자면, 공간이 주인공인 연극이다.
 
그러나 시작 부분에서도 언급했듯이, 카메라 앞에서 인물은 지나치게 특별해진다. 인물과 공간이 서로 양보 없이 전면에 나오려고 하는 데서 오는 불편한 긴장감 같은 것이 화면을 지배한다. 인물들은 자신의 자세를 취하며 공간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카메라, 혹은 작가와 어떤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하여 전면으로 치고 나오지도 않는다. 작가는 새벽길에서 마주친 인물에게 어떤 자세를 취하라고 요구한다.

그것은 작가가 어둠 속에서 인물을 처음으로 마주쳤을 때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재현된’ 자세이다. 결과적으로 인물은 (전통적 의미에서 훌륭한 초상 사진들이 포착한다고 하는) 자기 본연의 모습도 아니고, 그렇다고 작가에 의해 완전히 연출된 모습도 아닌, 그 둘 사이의 애매한 중간 지대에 놓이게 된다. 이렇게 연출된 부자연스러움은 이 사진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애초에 이 사진의 주인공이 아닌 인물은 너무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관람자는 몰입, 공감, 판단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는 대상에 대한 차갑고 무심한 태도로 맥락이 제거된 균질한 화면을 추구하는 데드팬 사진과 매우 유사한 기술이다. 그러나 데드팬 사진이 판단 중지를 위해 단서를 모두 제거하는 방식을 취한다면, 김태동은 반대의 전략을 구사한다. 세심하게 선택되고 공들여서 묘사되는 공간도, 인위적인 자세로 부자연스럽게 서 있는 인물도 마치 어떤 의도, 즉 의미를 내포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면서 실제로 그 의미의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비밀이 힘을 갖는 방식과 흡사하다. 움베르트 에코는 『푸코의 진자』에 관한 인터뷰에서 비밀의 내용이 없이 텅 비어 있을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말한 바 있다. 비어 있는 곳을 온갖 가능한 개념으로 채울 수 있을 때야말로 비밀이 의미와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Day Break’의 화면이 긴장감을 유지하는 지점은 작가의 숨겨진 의도(=비밀)를 찾아내려는 감상자의 탐색을 무력화시키는 ‘비어 있음’에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의미의 자리를 비우는 전략은 공간과 인물이라는 두 개의 중요한 대상들을 한 화면 안에서 조합하는 과정에서 둘 사이의 균형을 유지함과 동시에 의미의 과잉을 방지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혹은 불가피하게 선택된 것처럼 보인다. 공간은 인공조명을 최소화하여 가능한 자연스럽게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고, 인물은 애매한 자세로 인위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동시에 정보를 제거함으로써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모두 차단해버린 것이다.
 
사실 김태동은 공간과 인물의 조합을 매우 잘 이용하는 작가이다. 뉴욕 외곽에 위치한 한인타운 플러싱(Flushing)을 촬영한 ‘Symmetrical’(2010) 연작은 특정한 장소를 묘사하기 위해 인물을 개입시키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연작에서 작가는 미국도, 한국도 아닌 이 경계선적인 지역이 지니는 특색을 표현하기 위해 한글과 영어 간판이 뒤섞여 있는 기묘한 낡은 건물들, 시대착오적인 분위기의 퇴색한 거리들과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불규칙하게 교차시킨다.

이러한 구성 방식은 서울 연신내 지역을 다룬 작업 ‘Break Days’(2013-)에서도 다시 한 번 나타난다. 소위 ‘외곽색’을 표현하는 데는 공간과 인물을 함께 다루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작가의 말은 도시 주변 공간에 대한 그의 관심의 폭과 이해의 깊이를 보여준다. 이 두 연작에서 공간은 공간대로, 인물은 인물대로 별다른 장치 없이, 자연스럽지만 쉽게 지나칠 수는 없는 방식으로 포착된다.

여러 장의 증거 사진들이 모여 사건을 재구성하듯, 이 사진들은 한 장 한 장 쌓여가면서 지리적, 사회학적, 정서적 공간인 이 특수한 지역들의 모습을 어렴풋하지만 정밀하게 전달한다. 흥미로운 것은 여행 중에 우연히 가게 된 낯선 도시 플러싱에서는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면모들을 끌어내려는 시선이,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지내온 지역이라는 연신내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인 느낌을 포착하려는 시선이 감지된다는 것이다. 섣불리 판단, 왜곡하지 않으려는 애정과 대상과의 적절한 거리 두기라는 작가적 원칙 사이의 균형은 두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기능한다.
 
결론적으로 보면 ‘Day Break’, ‘Symmetrical’, ‘Break Days’는 모두 공간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하여, 공간과 인물의 관계를 작품이 작동하는 주된 동력으로 삼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Symmetrical’과 ‘Break Days’의 공간과 인물들이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그 장소에 대한 작가의 시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하나의 명료한 목적에 기여한다면, 〈Day Break〉의 공간과 인물들은 상충하는 관계 속에서 자체적으로 또 다른 의미 영역들을 만들어낸다.

그래서인지 전자의 두 연작은 관람객을 향해 보다 열려 있는 듯한 느낌을, 후자의 연작은 자체의 의미로 충만하여 개입의 여지를 차단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물론 어느 쪽이든 관계없다. 세상에는 직접 발을 내딛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편이 더 좋은 공간도 있고, 바깥에 서서 관찰과 짐작과 상상으로만 경험하는 편이 더 좋은 공간도 있는 법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