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처음 김태동 작가를 만났을
때, 그는 한 문화공간의 신진작가를 지원하기 위한 사진상에 응모하여 심사위원들 앞에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포토폴리오는 엉뚱하게도 사진뿐만 아니라 다량의 스케치와 텍스트로 같이 구성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심사위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답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사진과
함께 제시된 스케치에는 그가 어느 도시의 공간과 관계된 이야기(narrative)가 산만하게 흩어져 있었다.
당연히 심사위원들은 사진과 이 엉뚱한 조우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쏟아냈었지만, 그는
어눌한 대답으로 스스로도 매우 답답해하고 있었다. 작품에 대한 평가를 별도로 하더라도 태도의 문제로만 본다면, 유려한 언어로 작품을 설명해 내던 다른 지원자들보다 참으로 부족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장면이기도 하였다.
경쟁에 의한 선발, 심사의
과정에서 매서운 질타에도 불구하고, 그 형식과는 별개로 제출한 자신의 작품 세계를 매우 수줍고 서툴지만 끝까지
말하고 있는 그는 세상과 섞여 있으면서도 이 세상과는 별개의 삶을 살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시대의 젊은 작가가 살아가야 할 삶의 한 방식이 엿보이는 장면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동시대 미술은 다양한 생각과 방법들을
수용하고 있고,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미술 공간에 선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김태동 작가는 이와 별개로 새로운 무언가를 더 실험하기보다는 자신의 사진 작업을 통하여 현재 존재하는 것들이
어떻게 다르게 보여지고 재해석되는가에 대한 관심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자신과 이웃이 살고 있는 어느
도시 - ‘서울’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의 담론보다 이 도시의 익숙하고 일상적인 공간 속에 존재하는 우리가 그저 스쳐 지나갔던
숨겨진 또 다른 모습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잠든 사이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서울의 밤을 배회하면서 그곳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들을 사진에 담아내고 있다. 바로 이 사진들의 묶음이 ‘Day break’ 시리즈이다. ‘새벽’이라는
의미의 이 작품들은 사실 한밤에서 동틀 때까지의 낯선 사람들과의 우연한 만남에 대한 ‘도시 공간과 삶의 어떤
순간’에 대한 기록이다.
그렇지만 그의 작업은 밤에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해가 떠 있는 낮 시간 동안에도 그는 도시를 배회한다. 그리고 낮의 표정과는
사뭇 다른 장소를 미리 정해 놓은 뒤, 콘탁스 67을 들고 밤이 내린
그 장소에서 무작정 낯선 이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낯선 사람이 그 공간에 나타나면 용감하게
다가가서 말을 건넨다. 어떤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그를 경계하면서 사라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 순순히 자신의 모습을 내어준다.
촬영에 동의한 사람들은 작가가 요구하는 여러 가지 자세를 참을성
있게 취해 주고, 한밤에 세워진 열악한 인공 조명, 디지털 카메라 그리고
바로 전송된 노트북의 데이터를 통해 마침내 작품 속의 등장인물이 되어 다시 우리 앞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일련의 작업이 펼쳐지는 ‘새벽의 공간들은 도시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지만 때로는 그 고요함과 스산함이 나를
안심시킨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재해석된 공간과 시간
그리고 그 속에 존재하는 사람은 비일상적이며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변한 도시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이방인으로 낯설게 다가오는 존재일 뿐이다.
사실 그와 이들도 한밤의 도시, 거대한 인공 구조물 속의 기묘한 상황 속에
놓이기 직전인 5분 전만 해도 전혀 알지 못했던 사이였다. 이들은 어느
순간 찰칵이는 카메라 셔터 소리와 가로등이 만들어내는 길고 불안한 그림자들, 텅 빈 적막함 속에서 짧은 공감대를
형성한 열정적이고 친밀한 예술적 동지가 된 것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그의 작품 전체를 감싸는 미묘한
울림으로 작품 속에 스며 나온다. 마치 스산하지만 부드러운 밤안개처럼 말이다.
특히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가로등 불빛을 뒤로 한 채 서 있는 뒤돌아보는 여자, 번잡했을 사거리에 서 있는 배불뚝이
아저씨, 불 꺼진 빌딩들 속 차분히 서 있는 소녀는 ‘왜 그 시각 그곳에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하지만, 아무도 답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신비함마저 느끼게 한다. 이처럼 그는 도시의 어느 공간에서 타인을 만나 순간의 기록을 통해 ‘낯선 사람과 공간의 초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말보다는 보는 것에 의존하며, 지속적인 관계보다는 타인과의 우연한 조우를
통해 완성되는 그의 작품은 ‘눈으로 보는 것에서 영감을 받는다’는 그의
대답만큼이나 감각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감각적인 것에만 그친다면 아마 한없이 가벼운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눈으로 본 영감이 깃든 모든 곳을 미리 가보고 또 촬영해 놓고 스크랩하고 그것들을 다시
살펴보면서 많은 편린들 속에서 작업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러나 그 방향은 미리 정해 놓은 어떠한 개념은 아닐
것이다. 간혹 동시대의 미학적 개념을 설정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있는데, 이러한 경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품보다는 이를 설명하는 말이 더 명료하고 유려하다.
그 말들은 우리의 눈을 가리고 감각을 혼란스럽게 하며 자신의 가치를 실재보다 더 화려하게 포장하고 있다.
그러나 김태동의 작품 세계에는 말보다 사진이 있다.
이는 그가 말보다 자신의 감각을 표출하고
이 감각을 통해 정직하게 눈으로 보는 사진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그의 사진을 명료한
말로 설명하기가 모호하다. 그가 사진 속에 나타나는 색, 등장인물들의
어정쩡한 포즈들, 밤도 아침도 아닌 시간이 만들어 내는 묘한 공기, 그
속에서 존재하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같은 것들은 말로 스스로를 표현하기 힘들어하는 작가, 그 자신이기에
말이다.
이러한 점은 아마도 향후 그의 작품이 치열한 현대 미술의 현장에서 다른 작가들과 차별되는 전략이
될 것 같다. 그러나 그 전략조차도 꾸미거나 계산되어질 수 없는 그의 모호한 감성과 감각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계기가 내적으로 마련될 때까지 그는 여전히 도시 안의 어떤
것들을 탐험하고 보여주는 작업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화려한 개념이나 계산 없이 도시를 배회하는 끝없는 그의
발걸음과 셔터 속에서 묻어나는 그의 전략은 늘 우리에게 익숙한 삶과 공간 속에서 묻혀 있던 낯선 그 무언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