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이동훈, 〈아네모네와 델피늄 1〉, 2022, 캔버스에 아크릴, 190x390cm / (우)〈아네모네와 델피늄〉, 2022, 은행나무에 아크릴, 73x45x45cm ©이동훈

1.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의 나무 조각은 채 다듬어지지 않은 뻣뻣한 면들과 온전히 채워지지 않은 채색된 표면을 가졌다. 땅 위에 서 있는 통나무 몸통에서 진실한 시선으로 불러낸 것 같은 그 조각의 형상들은, 원기둥의 수직성 안에서 회전하는 삼차원적 감각을 뒷받침한다. 이 나선 구조의 특징은 (인체) 조각의 고전적 규범 안에서 발생한 것으로, 어떤 형상이 바닥을 딛고 자율적으로 직립할 수 있는 이상적이고 미학적인 조건을 성립시킨다.

이동훈은 그러한 조각의 삼차원적 이상을 좇으면서, 깊은 속마음에서는 회화에 대한 궁리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는 동시대의 회화가 될 수 있는 일련의 대상을 탐구하면서 그 대상과 형식 간의 긴밀한 인과성을 실험해 보려 했음을 나는 짐작해 본다. 이는 그가 조각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전 초기 회화 작업에서 보여준 몇 가지 창작 조건과 형식 사이의 실험적인 접근을 통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지점이기도 하다.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한 그의 초기 작업은, 2015년부터 2016년에 이르는 약 2년 안팎의 시기 동안 문학 작품의 내용을 회화의 주제로 삼아 적합한 형식을 도출해낸 뒤 그것에 대한 충실한 수행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고정시켰다. 이를테면,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의 『가난한 사람들(Bednye lyudi)』(1846)을 참조한 〈마까르 제부쉬낀의 하숙집〉(2015)에서, 이동훈은 등장인물의 하숙집을 아크릴 채색과 프린트된 이미지를 중첩시켜 평면의 회화로 옮겼다. 이는 디지털 이미지로 일괄하는 오늘날의 시각성과 도스토옙스키가 글로 그려냈던 시대적 모순의 리얼리티를 비약적으로 동일시 함으로써, 자신의 회화 방법론의 논리를 구축하고자 했던 것처럼 보인다.

〈마까르 제부쉬낀의 하숙집〉을 다시 눈앞에 펼쳐 놓고, 이미 나무 조각에 심취해 있는 그의 최근 작업으로부터 시간을 되감듯 돌아가보면, 그 표면의 인상은 마까르 제부쉬낀의 하숙집을 직사각형의 화면 안에 짜임새 있어 보이면서도 파편적으로 병렬시켜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화면의 짜임새를 살펴보면, 캔버스에 프린트 하여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의 층위를 중첩시킨 이 회화의 완결성이 구조상 좌우에 대칭으로 놓인 기둥 형상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장식적으로 조각된 이 기둥은 이동훈의 회화가 일련의 이차원 평면에서 시도된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재)증명해 보이려는 것처럼, 정면성과 함께 화면의 대칭성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이는 (자신의/오늘날의) 회화 안에서 흐릿해진 회화의 프레임을 우회적으로 강조하려는 그의 의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후에 이동훈은 회화의 형식 논리를 스스로 갱신해 보려는 당대적 과제를 뚜렷이 자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약 2년 간의 문학적-회화에 대한 형식 실험을 중단하고, 캔버스 프레임에 관한 그의 관심을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2. 새로운 회화의 지지체
 
〈누가 이기나 해보자〉(2017)는 그의 초기 회화와 최근의 나무 조각 사이의 문턱이 될 만한 의미심장함을 지니고 있다. 그는 “캔버스를 이루는 재료의 정보를 강조하기 위해 캔버스를 직접 만들며 캔버스 프레임 형태에 변화를 주었고, 그 위에 고양이를 그려 넣었다”고 했다. 앞선 초기 회화에서 은연 중에 부분적으로 내비쳤던 회화 프레임에 대한 조명은 이때 와서 본격적으로 물리적 가시성을 갖게 되고 더 나아가 캔버스의 형태에 따라 대상을 효율적으로 그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 예컨대,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캔버스 프레임의 구조를 따라 캔버스 천을 잘라 붙인 특이한 변형을 드러내는데, 그는 마치 퍼즐조각처럼 어긋난 그림의 부분들을 “시각적”으로 경험하는 대신 “논리적”으로 지각하도록 배열했다. 가운데가 뚫린 채 프레임의 입체적인 사각 구조에 따라 부분적으로 붙여 놓은 캔버스 천에는 고양이가 그려져 있지만, (노출된 캔버스의 구조를 논리 삼아) 평면과 입체를 넘나들면서 지지체의 표면에 따른 회화적 화면을 갱신해 보려는 충동을 보여줬다. 지지체의 변화에 연동하는 회화적 화면의 가능성에 대해 환기시키면서 말이다.

실제로, 이동훈은 〈누가 이기나 해보자〉에 이어 최근에 하고 있는 나무 조각의 암시가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작업을 그 무렵에도 이미 시도한 바 있다. 캔버스 프레임의 물리적 구조를 낱낱이 드러낸 그 지지체 위에 고양이를 그렸던 그는 그 회화의 대상이 화면 안에 구축하는 내용이나 회화의 주제를 포기한 채 캔버스의 형태와 회화의 형식 간 긴밀한 작용을 실험하기 위해, “고양이”라는 소재의 위상을 밝힌 바 있다. 이때, 이동훈은 나무로 고양이 형상을 직접 조각하여 그 위에 고양이 무늬를 그린 캔버스를 뒤집어 씌우기도 했다. 그는 단지 “좋아하는 대상을 그리는 즐거움”에 대해서 강조하며 말했는데, 사실 그 말은 자신의 회화 안에 등장하는 (적어도 고양이라는) 소재가 어떠한 형식과 내용을 결정짓지 않는다는 의미에 가깝다. 즉 그것은 (캔버스) 지지체와 (채색) 재료를 매개하면서 그리기의 정당성을 부여할 뿐인 것이다. 그는 새로운 회화의 지지체와 그것과 연동할 회화적 표면을 찾고자 했던 것 같다.

이동훈은 나무로 고양이 모양의 조각을 깎아 그것을 캔버스 지지체로 삼았으며, 그 표면은 다시 지지체의 형태에 연동되어 있는 고양이 무늬의 평면 회화로 (마치 피부처럼) 덮였다. 이렇듯 그의 나무 조각과 캔버스 회화의 동기화는 임의적이나 꽤 긴밀하게 이루어졌으며, 그것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 익숙한 형태로서의 고양이를 본 뜨는 행위로 상호 매개되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그가 조각과 회화를 오가며 둘을 병행해 온 것은, 별개의 매체적 접근을 목표로 하기 보다는 둘 사이의 (미심쩍은) 관계를 회화적 상황 안에서 증폭시켜 보려는 가설과 검증의 절차였음을 또한 예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나무 조각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것은 예기치 않게 일어난 즉흥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캔버스 프레임의 물리적 구조와 캔버스 천 위에 그려진 그림 간의 형식적 관계에 대해 나름의 가설과 검증을 시도해 보려 했던 그는, 문득 그림의 액자를 직접 만들어 보려는 마음으로 목공예 기술을 배웠다. 직접적으로는 회화의 프레임으로서 기능하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미적 충족을 다할 수 있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액자를 염두에 두고, 그는 어느 장인에게 목공예 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무 깎는 기술을 훈련하고 왔으나, 그는 자신이 목표했던 나무 액자 만들기는 애초에 시도해보지도 않았다. 흥미롭게도 그는 회화 속에 정물로 있을 법한 꽃을 직접 가져다 놓고 보면서 나무로 그 꽃의 형상을 깎았다. 그의 나무 조각은 그렇게 시작됐다.  


 
3. 그리기 위한 정물 조각
 
목공예 기술을 한창 배울 무렵, 그에게는 꽃을 그린 미술사 속 명화를 골라 모사하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의 꽃 조각은 명화를 “모사”하고 액자를 “모각”하려 했던 각각의 목표에서 출발해 기가 막힌 타이밍에 그가 찾고자 했던 회화 형식에 대한 제3의 결과를 도출한 셈이다.

이동훈의 조각은 몇 가지 특징을 강조한다. 나무를 재료로 사용한다는 것, 세부 윤곽과 질감 표현 대신 전기 톱과 끌을 이용해 형태의 큰 덩어리를 낸다는 것, 조각의 표면에 실제 대상과 적합한 채색을 한다는 것, 식물과 동물과 인체 형상을 주로 다룬다는 것, 그런 정도다. 주로 화병과 화분을 보고 받침대에 올릴만한 적당한 크기로 나무를 깎아 만든 그의 초기 작업은 애초에 “그릴 수 있는” 혹은 “그리기 위한” 정물 조각으로 제작됐다. 이는 두 가지의 수행을 파생시켰는데, 정물 조각이 캔버스 프레임처럼 회화의 물리적인 지지체로서 그 위에 그리기 혹은 칠하기와 같은 회화적 실천이 추가될 수 있다는 것을 자명하게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정물 조각이 (모사의) 대상으로서 전형적인 캔버스 화면 위에 삼차원의 사물이 평면적으로 해석되는 회화적 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을 말한다.

통나무를 깎아 모양을 만든 후 그 위에 아크릴 채색을 한 초기작 〈화분〉(2018)과 〈화병〉(2018)을 보면, 그는 (더 이전에 캔버스 프레임의 구조를 낱낱이 드러내려 했던 것처럼) 재료가 되는 나무의 본래 형태를 끊임없이 강조하듯 노출시켰다. 특히 〈화분〉의 경우, 원기둥 모양의 화분, 수직적으로 꼿꼿하게 솟아 있는 꽃, 게다가 어색할 정도로 반복적인 원기둥의 나선 구조 리듬 안에서 화분 속 이파리들이 제 그림자와 한 몸을 이루어 독특한 덩어리감을 지닌 채 조각의 형태를 삼차원적이면서 자율적으로 직립할 수 있도록 지탱해 놓고 있다. 전체적인 윤곽은 그러한데, 그 내부를 파고들어 보면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을 살필 수 있다. 자세히 보면 그가 톱과 끌로 깎아 놓은 조각의 표면에서 수직과 수평의 직각 구조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운데, 실제 화분 속 화초의 형태를 정교하게 묘사한 조각이기 보다는 어떤 형상을 “담아낼” 면들이 계속해서 교차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말하자면, 어떤 형상의 평면적인 지지체(들)와 같다. 이동훈은 그렇게 깎은 나무 조각을 회화의 지지체로 삼아, 그 지지체 구조에 연동되는 꽃을 (비로소) 그린 셈이다.

2019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화분과 화병을 소재로 한 정물 조각을 제작했고, 동시에 〈플라밍고와 풀〉(2019)이나 〈고양이와 박새와 풀〉(2019) 등 새로운 동식물들이 조각의 소재로 추가됐다. 〈긴 고양이1〉(2019)과 〈긴 고양이2〉(2019)처럼 몇 개의 소재를 결합해 콜라주 하듯 재구성하여 원통형 나무 재료의 구조에 충실한 조각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목련이 있는 화병〉(2019)의 경우, (마치 너무 평면적으로 보일까봐 노골적으로 나선 구조를 드러낸 것처럼) 검은 색 화병을 중간쯤에서 위 아래로 어긋나게 깎아 놓고, 꽃과 이파리는 이전의 〈누가 이기나 해보자〉에서 캔버스 구조를 드러내면서 그 테두리에 고양이 형태를 퍼즐처럼 그려 넣었던 것과 같이 직각의 면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회화적인 효과를 크게 강조했다. 특히 (조각의 형태 안에서) 화병에 꽂힌 이파리들은 거의 직육면체에 가까울 정도로 단순하게 깎아 연두색에서 짙은 갈색을 각각의 면에 음영 효과에 따라 칠함으로써, 조각적 형태에 따르기 보다는 회화적 표면에 의해 대상의 구체성이 밝혀졌다고 할 수 있다.

〈플라밍고와 풀〉은 높이가 164cm나 되는데, 통나무 재료 두 개를 연결해 놓은 듯 조각의 상부와 하부가 나뉘어 있다. 플라밍고의 몸통은 조각 상부에 올려져 있고, 플라밍고의 다리와 그 주변을 감싼 풀들은 하부에 놓였다. 이때도 통나무 원형에서 사방을 입체적으로 돌려 깎은 정황이 물씬 풍기는 가운데, 그것을 무색하게 하는 또 다른 정황은 반복되는 직각면들과 그 표면을 회화적 환영에 따른 음영과 원근감에 기반해 채색 효과를 극대화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이동훈은 회화의 프레임을 강조하는 액자를 직접 만들기 위해 배웠던 목공예 기법을 가지고 액자 대신 회화 안에 들어가는 소재를 직접 “모각”하기로 마음 먹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나무 조각을 회화의 지지체 삼아 캔버스의 평면처럼 그 위에 그 대상에 적합한 회화적인 채색을 연결시킨 셈이다. 조각과 회화, 모각과 모사, 지지체와 내용이 미묘하게 교차하면서 말이다.


 
4. 정물 조각과 조각 정물
 
이동훈은 첫 개인전 《꽃이 있는 실내》(2019)에서 자신이 모각한 정물 조각을 다시 평면의 캔버스 위에 옮겼다. 대략 (삼차원의) 형태를 (이차원적) 색채로 옮기는 이 행위는 애초에 그가 분명하게 자각했던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하는 질문에 다시 가 닿는다. 초기에 캔버스 프레임의 구조가 시각적으로 들어나게 그가 직접 변형시켜 제작한 후 고양이 형상을 사방으로 조각난 캔버스 화면에 그려 넣었던 것처럼, (조금 과장하자면) 그는 단지 “그리기 위하여” 통나무를 그 원형에 맞게 형태를 가늠하며 다듬어서 그릴 만한 면을 확보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충분히, 그리고 동시에 충족시킬 만한 효율적인 해결 방법이었을 테다. 이처럼 여러 과정을 겪으면서 일종의 예측할 수 없었던 또 다른 회화 지지체를 삼차원의 조각적 형태에서 찾아낸 것일지 모른다는 게 나의 추측이다.

한편, 그렇게 완성된 “조각적 회화”는 똑같은 질문에 대한 또 다른 답을 내놓게 되는데, 그는 모각하여 채색한 정물 조각을 다시 “무엇”에 해당하는 회화의 대상으로 가져와서 그것을 평평한 캔버스에 “어떻게” 옮겨 그릴 수 있을까를 실험했다. 예컨대, 나무에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한 정물 조각 〈화병〉(2019)은 완성된 후 다시 하나의 대구를 이루듯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회화적 변환을 거치게 된다. 그는 〈화병1〉(2019)과 〈화병2〉(2019)에서 각각 선행됐던 정물 조각 〈화병〉의 한 부분을 같은 위치에서 보고 거의 비슷하게 옮겨 그렸다. 이때, 독립적인 “정물 조각”으로 완성된 〈화병〉은, 각각 세로 53cm, 가로 45.5cm 크기의 회화에 담길 대상으로 다시 불려 와 보고 그리기 위한 “조각 정물”이 되었다. 그 정물을 “보고” 그린 그림이 〈화병1〉과 〈화병2〉인 것이다. 또 다른 버전의 회화 〈화병3〉은 세로 145.5cm, 가로 112cm로 화면이 크게 확대되고 그림의 표면에 노란색 물감 층이 안개가 낀 것처럼 덮여 있다.

이 작업들을 소개한 《꽃이 있는 실내》에는 받침대 위에 나무 정물 조각이 올려져 있었고, 그것과 가까운 벽에 조각 정물의 한 부분을 옮겨 그린 회화가 거의 서로를 참조적으로 겨냥하며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 모든 정물 조각을 회화로 다시 옮겨 그린 것은 아니지만, 조각과 회화 사이에 긴밀하고 잠재적인 관계가 생겨난 것은 분명하다. 특히 이 둘 사이에서는 흥미로운 간극이 동시에 드러나는데, 정물 조각에 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이며 이것을 대상으로 삼아 캔버스에 그린 회화는 조각과 사뭇 다른 접근을 보여준다.

〈화병3〉을 보면, 그가 나무로 고양이 형상을 깎아 그 표면에 고양이 무늬를 그려 넣은 캔버스를 뒤집어 씌웠던 초기 작업의 맥락을 떠올리게 한다. 입체적인 나무 조각의 표면에 직접 칠한 아크릴 채색과 평면 캔버스에 그 정물 조각 한쪽 면을 보고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그림 사이에는 함께 연동되어 있는 정황들 가운데 미묘한 차이가 시각적인 대비를 이룬다. 이동훈은 나무 조각을 깎을 때 표면의 색채 처리를 염두에 두고 마치 회화의 밑그림을 그리듯 외부의 큰 윤곽과 명암에 따라 색채가 달라지는 내부의 작은 표면들을 다듬어 나갔다. 그런 까닭에, 그의 정물 조각은 사실적인 입체 효과 보다는 색채의 채도와 형태의 음영을 기준으로 형태의 면을 인식해 나가는 일련의 조형 과정을 상기시켜준다. 한편, 그것을 조각 정물로 삼아 다시 이차원의 평면 캔버스에 대상을 옮기는 과정에서, 이동훈은 시점을 전면으로 균질하게 퍼뜨린 듯 실제 대상의 한쪽 면을 일체의 공간감과 입체감과 거리감이 제거된 채 표면을 납작하고 평평하게 눌러 놓은 것처럼 그렸다. 즉, 애초에 그가 나무 조각 표면에 색채 처리를 할 때 채도를 지닌 각각의 면을 병렬적으로 적용했던 것처럼, 색채의 채도에 의한 회화적 환영이 강조되어 평면 캔버스에 그대로 옮겨진 것이다.

정물을 보고 나무를 깎아서 채색한 정물 조각과 그 조각 정물을 보고 평면에 옮긴 정물 회화 간의 지속적인 실험은 〈화병〉2020, 〈상사화〉(2020), 〈선인장〉(2020)을 각각 제작한 후 하나의 평면 캔버스 위에 〈무제〉(2020)라는 제목으로 셋을 결합하여 그린 회화적 실험을 거치면서 계속 이어졌다. 그것은 암묵적으로 조각적 지지체 위에 회화적 환영을 접목한 정물 조각에서 크게 강조되었던 “추상적”인 색면을 계속해서 부각시켜 주었다.


 
5. 조각적 연속성과 회화적 연속성
 
이동훈은 두번째 개인전 《조각이 춤도 추네요》(2021)에서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도한 인체 조각을 소개했다. K-POP 아이돌 그룹의 의상과 안무에 주목한 그의 인체 조각은, 그 대상을 하나의 해부학적 인체로 인식하기 보다는 특정 의상과 결합한 (새로운) 몸이면서 특정 안무의 움직임을 통해 구축된 삼차원적 인체 형상에 대한 (새로운) 규범으로 파악한다.

〈Not Shy〉(2021)의 경우, 가시적으로 드러나듯이 춤을 추는 인체 조각을 대상으로 하여 하체는 통나무를 추상적으로 다듬은 받침대로 대신 하고 그 위에 특정 의상과 안무 동작을 표현한 인체의 상반신을 올려 놓은 구조다. 여기서 이동훈은 흥미로운 시도를 보여주는데, 움직임이 거의 없는 몸통은 그대로 표현하고 (그것을 중심축 삼아) 춤의 연속적인 안무 동작에 따라 머리와 상체에 밀착하여 빠르게 움직이는 손과 팔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이 연속성은 상투적인 나선 구조의 시간적 서사를 반영하지 않고 있으며, 그는 신체 동작의 중첩을 통해 연속적 움직임을 논리적이고 투명하게 구축하기 보다는 오히려 디지털적 편집에 의해 구축된 듯한 무시간적 연속성을 조각에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조각적 갱신은 회화적 시도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내내 말해 온 것처럼 이동훈의 조각과 회화가 긴밀히 연동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이때도 이 정물 조각이 조각 정물로 위상을 살짝 변경해 평면 회화로 옮겨지는 과정이 반복되는데, (갱신된) 조각의 연속성은 회화적 효과를 극대화 하여 두 점의 회화 〈Not Shy1〉(2021)과 〈Not Shy2〉(2021)에서 회화적 연속성으로 변환된다. 이동훈은 원형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그 특유의 나무 정물 조각을 회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중요한 장치를 개입시킨다. 그는 조각 정물을 회전하는 롤러 위에 올려 놓고 정지해 있는 상태가 아니라 계속해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림을 그린다. 어쩌면 《조각이 춤도 추네요》 전시 전후로 그가 실험했던 인체 형상 조각, 특히 춤을 추는 연속 동작의 인물을 조각하면서 움직임의 연속성에 대한 조각적 논리를 한번 갱신함으로써, 그는 이를 회화로 옮기는 명확한 당위를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낡은) 시간적/서사적 연속성이 아니라 오늘날의 조각과 회화의 매체 조건 안에서 디지털적 편집 및 기술에 의한 시각적 감수성을 함의하고 있는 무시간적 연속성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점의 회화에서는, (스스로가 설계한) 조각적 참조를 통해 고정된 이미지와 끊임없이 흔들리는 가상 이미지의 병치를 회화 그리드 안팎에서 지속적으로 조정하고 상상할 여지를 남긴다.

《New Rising Artist: 탐색자》(2022)에서는 다시 화분이나 화병을 대상으로 삼은 정물 조각과 그것을 정물처럼 보고 그린 회화를 보여준다. 인체 조각을 통해 회화와 조각의 참조적 연속성을 한 차례 실험했던 이동훈은, 이번에는 그가 처음부터 다루어 왔던 식물로 돌아가 그것을 조각하고 회화로 옮기는 일련의 과정에 집중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하는 물음 앞에 스스로를 다시 세웠다.

〈아네모네와 델피늄〉(2022)은 은행나무를 깎아 아크릴로 채색한 정물 조각이다. 받침대 위에 올려진 정물 조각은, 마치 목 부분에서 수평으로 절단된 두상 조각처럼 식물의 전체 윤곽과 양감만 남기고 나머지를 잘라내 받침대 위에 올린 것 같은 첫인상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 조각들은 다른 받침대 혹은 다른 형태들과 충분히 호환되어 다른 형태로 계속해서 변환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마저 준다. 그것은 받침대 없이 바닥에 내려 놓은 〈델피늄과 옥스포드 스카비오사〉(2021)이나 〈카라와 클레마티스〉(2021) 등 이 전시에서 보여준 대부분의 정물 조각이 조형적으로 환기시키는 특징이다.

각각의 정물 조각은 그가 초기부터 해 온 조형적 특징들을 여전히 보여주면서도 〈선인장〉(2022)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조각의 양감을 회화적 표면과 절충 내지는 서로 연동시키고 있다는 게 어느 정도 가늠된다. 말하자면, 이동훈은 조각적 양감을 역설적이게도 “평면화”하여 채색할 면을 확보해 놓는데, 그 표면들이 다시 조각적 양감으로 순환된다는 것이다. 이는 〈델피늄과 옥스포드 스카비오사〉(2022)과 〈알스트로메리아, 카네이션과 옥시1〉(2022)과 같은 회화에서 다시 반복된다. 롤러에 위에 완성된 정물 조각을 올려 놓고 회전시키면서 그것을 회화에 가로로 연속해서 그리면서, 이동훈은 조각적 양감을 위해 동원되었던 회화적 표면들을 색면으로 나열하기 시작했다. 조각적 지지체가 사라지고 회화의 평면 위에 펼쳐진 조각의 표면들은 회화의 색면으로 변환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일련의 조각적 참조와 회화적 참조가 서로 교차하는 이동훈의 회화와 조각에서는, 최종적인 단계에 이르렀을 때 “회화”에 주목하게 된다. 나무 정물 조각에서도, 일련의 조각적 지지체는 회화적 가능성을 실험하는 구조로 설명되며 다시 그림을 그리기 위한 모사의 대상으로 재설정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그의 작업에 있어서 형식적 완성에 이르기 보다는 도구적 가능성을 조율하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