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쌓아놓았던 한 아름 반의 잣나무들은 작업실의 이곳저곳에 놓인 점과 같았다. 부분을
덜어내면 부분이 만들어졌다. 투박한 요철들 위로 붓이 지나가며 채색이 이루어졌다. 나무의 물성은 그대로 보이기도, 드문드문한 발림 사이로 보이기도
했다. 대상의 관찰은 눈으로, 실천은 신체의 형을 거쳐 덩어리
속으로. 던져졌다. 상대적으로 무거운 재료를 다뤄온 이 작업은
이제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노하우가 생긴 것 같다. 조금 굳어진 상황에서 다른 것을 시도해보는 일이
필요했다. 물질적으로도, 방법적으로도 가벼움을 원했던 것
같다.
전시를
준비하며 하이키, 샤이니, 뉴진스, NCT DREAM의 특정 무대를 골랐다. 방송국, 직캠, 댄스 프랙티스 등 다양한 카메라로 기록된 무대 이미지를 모았다. 여러 방식으로 편집된 다양한 버전이 만들어지는 이 토양은 접근이 매우 쉽고 빠르다. 저장된 타임프레임 위로 연속되는 이미지들을 관찰했다. 조명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무대는 헤메코와 대비를 이루며 절묘한 운동감의 순간을 만들었다. 색감, 손끝의 표현력, 코디의 디테일 등에서 흥미를 자아내는 것들을 하나씩
선택해나갔다.
종이는
나에게 새로운 재료였다. K팝 아이돌의 동세와 움직임을 다루기에 종이라는 재료가 더 흥미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참조한 무대의 색감과 대비를 아크릴 물감으로 조색했고, 밑칠용
붓을 사용해서 올의 속도감이 드러나는 색종이를 만들었다. 점과 같은 덩어리에서, 납작한 면을 그어내는 선으로의 변화. 칼과 가위로만 가능한 볼륨과
윤곽이 있었다. 재료의 변화는 도구와 신체에 이어 부분을 덜어내는 것이 아닌, 미리 준비된 부분을 붙여나가는 과정으로의 변화로 이어졌다. 종이의
휘어지고, 주름지고, 접히는 특성은 안무의 동세를 따라 자연스럽게
핀, 타카, 본드, 철사
등으로 순간에 고정되었다.
카로, 마티스, 칼더와 같은 미술가들의 작업은 다른 대상들만큼이나 꾸준한
관찰을 요구했다. 지류와 선을 다루는 그들만의 방식은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헤어의 볼륨과 의상의 드레이프, 손발의 동작뿐만 아니라, 조각의 구조와 심봉 그리고 패널에의 구성과 구축에까지 다양하게 참조할 여지가 가득했다.
개별
작업들의 맥락에서 떨어져나와 독립적인 형태로 확대 삽입된 〈Compilation 1〉, 〈Compilation 2〉 작업은 전시의 한 축을 구성한다. 스튜디오가 아닌 현장에서 제작된 작업은 전시장에 주어진 큰 벽과 낮은 층높이의 공간을 활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진행했다. 부분이 확대되기도 하고 안무를 이행하는 손발이 분리되기도 했다. 조각과 부조에서 그랬던 것처럼, 만들어가다 보면 그 안에서의 질서가
결정을 이끌기도 한다. 무대 위 대상의 모습은 조각이 되었고, 조각은
그 궤적이 담긴 부조가 되었다. 부조는 그 꽂힌 핀이 잠시 해체되어 확장된 모습으로 벽에 고정되었고, 벽의 일부는 다시 채색되어 3차원 공간에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