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자위가 더 드러나는 성난 눈, 바짝 올라선 눈썹, 코에 가까운 두 볼에 옅게 깔린 주근깨, 거침없이 삐죽이는 머리칼, 이죽거리는 입매에 샐쭉 나온 입술, 자기주장이 강한 치아, 올록볼록 나온 살집, 두터운 덩치, 굳이 깎지 않은 체모까지. 신민의 작업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이미지다. 정성스럽지만 어딘가 엉성히 그어진 선과 형세로 만들어진 신민의 조각들은 특유의 익살스러움이 넘친다. 하지만 투박한 듯 귀여운 외형과 달리 매서운 눈매와 다부진 팔뚝은 한 번 보면 기억에서 잊기 쉽지 않다. 누군가를 노려보는 시선, 그리고 한껏 치켜든 시선의 눈은 분노를 담고 있다.

그의 여러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듯, 이 분노는 그의 작업의 원동력이다. 이는 여성, 미술 노동자, 저임금 고강도 노동자와 같은 자신이 속한 사회 공동체에서 출발한다. 획일화된 정상성의 논리, 이름 붙여지지 못하는 그림자 노동 현장, 일관된 감정 노동이란 피로도가 쌓인 상황에 노출되면서 생긴 분노는 작가의 몸을 통과하며 체현된다. 신민은 그 분노의 감정이 지나가는 자리를 인체의 형상으로 표현해 왔다.



편지 쓰기를 작업 환경에 포개어 놓기


신민, 〈경숙〉, 2006, 혼합재료, 17×14×13cm ©신민

그의 첫 번째 작업인 ‘Crying Women’(2006─2010)과 같은 두 눈이 강조되는 두상에서 〈딸기코의 딸들〉(2011)과 같은 한 손에 들어갈 만한 작은 인형, 나아가 〈견상(犬狀)자세 중인 알바생〉(2014)과 같은 하나의 몸을 갖춘 덩치 큰 사람의 형상을 띤 조각까지 다양하게 형상화된다. 그의 조각이 하나의 몸으로 완성되어 갈수록 그는 점차 자기 기억을 통과하여 세계와 소통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간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자기 재현의 영역에서 벗어난 사회적, 윤리적 작업을 지속할 때 창작자는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체화하기 시작한다. 작가는 자기 “작업을 누가 볼 것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며 “페미니즘 평론가나 미학자들의 저서에서 호명되기 위한 전략”으로 비치지 않도록 경계한다.1 이 물음에 응답하는 실천으로서 작가는 “편지 쓰기”를 택했다.2 편지는 늘 받는 상대방이라는 목적지가 존재하는 장소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과 상대를 위하는 마음을 기저에 둘 수 있다는 점이 이 실천에서의 핵심이다. 이로써 그는 ‘작업과 작가가 메타 관계’를 형성하며 자기 존재의 이유를 공고히 하는 것뿐 아니라 작업과 관계된 타자와도 쌍방향으로 소통하고자 한다. 이는 신민에게 세계와 자기가 균형감 있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식이자 자신을 통해 자신과 같은 공동체 안에서 비슷한 분노를 느끼는 이의 감정까지 발화의 범위를 넓힐 수 있는 도화선이 된다.

이 같은 태도는 초기작업부터 꾸준히 발현되어 왔다. 그의 두 번째 개인전인 《딸기코의 딸들》(플레이스막, 2011.10.18.─10.30.)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자본주의의 ‘등가 체계’로서 포섭되기 위한 작업 행위를 할수록 자신이 본래 미술을 시작했던 이유와 멀어지는 현상을 경험하며 작업이 잘 풀리지 않는 시기를 마주한다. 이를 타파하기 위한 방책으로서 편지를 쓰는 상황으로 작업 환경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이때 만든 〈딸기코의 딸들〉은 작가가 만드는 행위 그 자체에 빠져들면서, 그 형체를 ‘자신의 딸’이라 칭하며 자신을 투영하는 동시에, 향을 피워 인형의 구멍 뚫린 눈 사이로 연기가 피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딸들의 몸을 빌려, 향의 연기로” 손에 잡히는 사이즈의 작은 여자아이를 만들고 자신과 그의 주변을 위한 소원을 빌었다.3작가는 이를 통해 자기를 탐색하는 시간을 충분히 갖게 되면서 자신이 자신과 자신 주변의 안녕을 왜 원하는지 직시하게 되며, 조각을 통해 미술가로서 자기 존재의 이유를 드러내고자 했다. 이후 편지 쓰기 행위는 신민에게 중요한 작업 과정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되며 이 연장선상의 작업으로서 퍼포먼스, 해적 라디오 방송, SNS 집필 활동으로 매체를 확장해 나가는 데 근간이 된다.



몸을 통과하는 분노를 구체화하기

신민, 〈견상(犬狀)자세 중인 알바생〉, 2014, 맥도날드 프렌치프라이포대, 색연필, 상자, 스티로폼, 308x200x153cm ©신민

앞선 작가의 〈딸기코의 딸들〉에서 분노는 작가 자신을 향한다. 미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할 수 있는가에 관한 갈림길에서 자신의 노동이 화폐가치로서 등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은 그에게는 큰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4 이후 그는 작업과 일을 분리하며, 맥도날드에 취직하고 사회 공동체 내에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고용된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서비스 업종의 고충으로서 감정 노동을 겪는다. ‘행복의 나라’의 맥도날드 햄버거를 판매하기 위해 강요된 ‘행복’은 요청된 감정 노동을 이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분노를 유발한다. 불쾌한 일 상당수는 ‘행복’이란 감정 바깥에 존재하는 현실과의 괴리 때문이다.5 분노는 신민의 몸을 통과하며 하나의 덩어리로 그려지고, 〈견상(犬狀)자세 중인 알바생〉의 완전한 인체 형상으로 구체화된다. 견상 자세는 기업이 좌골 신경통에 탁월하다고 추천하는 요가 자세인데, 이 이미지를 통해 작가는 노동을 하고 얻은 병을 위해 요가를 하며 치유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에 질문을 던진다. 그는 맥도날드 유니폼을 입고 있는 조각을 만듦으로써 이들이 견상자세라는 요가 동작을 하고 있다고 의도하기보다는 엎드려뻗쳐의 동작으로 보인다. 이는 기업과 노동자가 ‘감정'을 받아들이는 입장 차이는 작가가 사회 구조 속 차별을 오로지 개인의 인내로서만 감내해야 하는 상황을 연상케 한다.

《들이쉬고, 내쉬고, 그대로 유지》(토이리퍼블릭, 2015.8.7.─8.26.) 전시 전경 ©신민

《들이쉬고, 내쉬고, 그대로 유지》(토이리퍼블릭, 2015.8.7.─8.26.)는 맥도날드를 관둔 후 만든 전시다. 신민은 아이스크림을 건네면서 아이스크림에 깔린 형상, 목이 잘린 형상, 근무에 지친 몸을 이끌고 화장실 변기에 앉아 지쳐서 넋이 나간 형상, 텅 빈 눈에 옅게 깔린 분노를 머금고 계산대 앞에 있는 형상을 선보였다. 그는 여기서 맥도날드를 그만두었음에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을 마주한다. 자신을 대체할 노동자는 넘쳐나고, 자신은 또 다른 형식의 노동자가 되어 생계를 이어 나가야 함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아래 서비스직 노동자는 언제나 ‘패자’일 수밖에 없다.6 그는 이 경험을 계기로 자신의 분노 대상이 결코 맥도날드 하나만이 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노동에서 얻은 분노가 단순히 노동 현장만이 아닌 복수의 엉켜있는 사회에서 발현된 것임을 인지한다.

이후 작가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신자유주의 사회 아래 ‘약자’의 목소리를 담아낸 기록을 돌아보며 자신의 분노의 원인이 어디서부터였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분노를 형상화할 수 있는지 천천히 짚어보는 과정을 거친다. 전쟁이라는 상황에 ‘성 노동’의 이름으로 희생됐던 여성의 인권은 여성이기에 겪었던 비인도적 폭력에 주목한다. 그는 이 무자비한 성폭력에 분노를 표하며 〈Basketball Standards〉(2016)라는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작가는 여성인지 남성인지 알 수 없게 형상화한 신체에 농구 백보드에 목을 집어넣은 10명의 퍼포머가 움직이며 상연하는 몸짓과 퍼포먼스가 가진 선형적인 서사 형식에 주목한다. 협업자 김주현의 말처럼, 작가는 “퍼포먼스가 각자의 위치에 선 다양한 사람들의 ‘차이의 담론들’을 형성하기에 적합한 장르라는 것에 착안”하여 강요받은 몸에서 서서히 벗어나며 서로 다른 몸으로서 해체되고 또 다르게 재구성되는 흐름을 조직했다.7 이는 조각과는 다르게 공간의 쓰임에서 오는 유연한 시간이라는 무한의 가능성을 엿보게 했으리라 짐작한다. 종이 소재로 형상화했던 조각 형상에서 점차 자신의 ‘몸’을 소재로 이용하며,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통해 해적 라디오 방송을 진행한 〈신노동 시리즈─VOW 라디오〉(2021) 그리고 〈Invisible Semi: 인비져블세미〉(2022)에서는 작가 또한 퍼포머로서 참여, 자신의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SNS 집필에서는 자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8 이는 그가 처음 선택했던 조각의 특성인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을 비틀어 골격이 크고 눈빛이 센 형상이 어디든 침투할 수 있도록 “삐라 제작자의 마음으로” 작업을 지속해 왔음을 보여준다.9 이것은 내게 작가가 주체적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이 조각 형상에서의 연장선으로서 공간에 정박하지 않아도 되기에 시간의 유연성이 허락되는 ‘몸’으로 확장해 나가는 흐름의 전환으로 읽히며, 그가 사회와의 연대를 더욱더 적극적으로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과도 같이 더없이 긍정적인 행동으로 느껴진다. 세월호 참사부터 미투 운동을 시작하게 한 동시대 사건들이 잇달아 맞물렸던 2010년대 중후반의 기억은 작가에게 쉬이 지워지지 않아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분노를 동력으로 미술을 한다는 건

이 기억은 지금까지도 물음표로 남겨진 시간이며 그가 질문을 던지고 소리 내 말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그가 작업하는 이유인 분노가 점차 선명해질수록 그는 궁극적으로 미술을 하는 의미를 잃어갔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작품으로 현실을 드러내는 방식은 현실과 닿을수록 아름다울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글과 글쓴이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그 거리는 다정하지 않다. 가까울수록 적대적이다. 외면, 길항, 동일시…… 당사자가 자기 현실을 쓰려면 공감받기 어려운, 헤쳐도 헤쳐도 계속 달려드는 칡넝쿨을 쳐내야 한다. 타인의 경험은 보이지만 내 경험은 나조차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10 즉 당사자성이 짙어질수록 작업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작가가 자신의 경험이지만 자신조차도 다시 재현할 수 없는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숱한 자기검열과 깊은 감정의 골은 반드시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민은 씩씩하게 “상상력이 발휘되는 환상적인 이야기보다는 실제에 가까운 이야기를 해왔다.”고 말하며,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분노를 “추상화하지 않고, 삭제하지 않으려 하며” ‘리얼리즘’ 미술의 본유적 상황을 전면화한다.11 미술에서 리얼리즘은 대체로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사실적 형상을 담고” 있으나 “눈에 보이는 대로 옮겨놓는 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 개념으로 파악된다.12 작가가 당대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리얼리즘에는 그의 주관적 인식이 담길 수밖에 없다. 그러하니 신민은 “누구든지 자신의 작업을 보고 웃고 떠들고 공감하고 신나길 바란”다.13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을 체득해 온 것뿐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낸 형상의 두 눈으로 타자에게 세상이 보이게끔 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고민해 왔다. 지금의 그는 세상에 침투하는 방식으로 덩치 큰 체구의 형상이 정박해 있는 전시장만이 더 이상 답이 아님을 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전시장은 운영 시간이라는 제약상 사실 진정한 ‘모두’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민은 안다. 미술이 세상을 바꾸지 못할 것임을. 그럼에도 그는 미술을 계속한다. 미는 윤리를 견인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까?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릴 수는 없어도, ‘자기 재현의 영역에서 벗어난 사회적, 윤리적 작업을 지속할 때 창작자는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무렵 내가 신민 작가의 작업을 흥미롭게 여겼던 순간을 떠올려 본다. 신민의 〈우리의 기도─나는 동료를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껴안는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연대한다〉(2022)의 뒷모습과 〈Invisible Semi: 인비져블세미〉의 멜로디를 떠올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체구가 큰 여성 토르소에 요새는 보기 드문 머리망이지만 ‘위생상의 이유’와 ‘통상적인 심미안적 이유’로 착용할 수밖에 없는 쪽을 진 머리 스타일을 한 형상. 앙다문 입과 결의에 찬 두 눈은 익살스러움을 넘어 어딘가 결연에 찬 눈빛. 몸이 있지만 결국 눈빛이 전부인 얼굴. 그리고 노래에 맞춰 서비스직 노동자의 규격화된 행위를 반복하는 율동. 작업을 보는 내내 이 시대의 노동자가 누구를 향해 저항해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의 자리를 탐하는 사슬고리를 끊고 일어나 서로의 손을 맞잡는 일을 상상하는 순간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 순간의 공감은 투쟁과 연대라는 아릿하고도 덧없는 행위가 끌어올린 에너지였을 테다. 이 힘은 우리가 그의 작업을 보는 이유임에 충분하다. 이 충분함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작가에게 닿아 그가 작업을 계속 발표할 수 있는 또 다른 동력이 되리라 기대한다.


 
IMA 크리틱스 소개

IMA 크리틱스는 일민미술관의 시각문화 비평 연구 프로젝트다. 비평, 글쓰기, 편집 전문가를 초빙하여 비평 쓰기에 대한 원론을 되짚고 담론이 활용되는 전반적인 과정을 익히며, 유의미한 비평의 결과물을 생산한다. 2023년에는 6인의 IMA 크리틱스 연구자 김해수, 박현, 윤태균, 이희준, 임현영, 최재윤이 활동한다.


 
박현

박현은 예술을 통해 개인의 서사가 동시대 사회와 닿으며 촉발되는 장면의 전환에 관심을 갖고, 이를 글과 기획으로 풀어내고 있다. 홍익대학교에서 예술학을 공부했으며 동대학원에서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 이론’의 생태 미학적 가능성에 대한 논문으로 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1. 박현, 신민에게 보낸 이메일, 2023년 9월 19일.
2. 나는 신민에게 자기 재현적 작업을 할 때 초기부터 지금까지 무엇을 가장 경계하였는지 물었다. 신민은 이에 답하며 ‘편지 쓰기’를 작업에 적용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편지는 제 마음을 적은 종이의 목적지, 마음의 목적지가 있습니다. 그 목적지가 저를 향해 있으면 편지는 도착할 수 없습니다. 편지는 목적지가 다른 사람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저만 혼자 계속 소유하고 싶은 생각과 그림들을 봉투에 넣어 미련없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 보내는 것. 이렇게 편지처럼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행동이 작업에도 반드시 적용되게 하려 노력합니다.” 같은 곳.
3. 《딸기코의 딸들》(플레이스막, 2011.10.18.─10.30.) 전시 서문. 2011. URL: https://neolook.com/archives/20111018h.
4. “솔직히 이야기 하겠다. 이번 전시, 앞으로의 작업은 남에게 팔기 용이하도록 정돈된 캔버스나 잘 망가지지 않고 기반이 탄탄한 조형재료들을 이용하여 집에 꾸미기에 손색이 없고 사면 살수록 더 사고 싶은 그림과 조형작업을 하리라 마음먹었었다. 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래서 유화물감과 하얀 캔버스를 샀다. 하지만 나는 그 재료들 앞에서 그림을 그리려고 연필을 쥔 손을 들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엄지손톱만한 똥을 찔끔 싸는 것과 똑같은 그림을
그려댈 뿐이었다.” 같은 글.
5. 오쓰카 에이지, 『감정화하는 사회』, 신정우 옮김(서울: 리시올, 2020), 47 참조.
6. 서비스직 노동자를 '패자'라 칭하는 것은 맥락상의 이유이다. 에이지의 논지 대로, 신자유주의는 사회 다윈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전제에서 ‘약자를 ‘패자’로 간주하는 암묵적 동의가 있다. 약자는 곧 ‘생존 경쟁’의 패자라는 것이며, 자기 책임론이 약자를 향하는 순간 곧 패자가 된다. 나는 그의 전제와 논지에 동의하기에 본 글에서 서비스직 노동자를 일부러 ‘패자’라 칭한다. 같은 책, 123 참조.
7. 김주현, 「끝나지 않은 전쟁, 백보드는 없다: 신민 - Basketball Standard」, 2016. URL: https://cargocollective.com/daughternose/2016-2.
8. 〈Invisible Semi: 인비져블세미〉(2022)는 신민 개인전인 《세미》(더그레잇컬렉션, 2022.9.3.─10.15.)의 전시 연계 퍼포먼스이다.
9. 박현, 신민에게 보낸 이메일, 2023년 9월 19일.
10.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서울: 교양인, 2020), 116.
11. 서울시립미술관, ‘Seoul Museum of Art | 난지 오픈소스스튜디오 토크 프로그램 5. 신민’, 2021년 4월 22일. URL: https://www.youtube.com/watch?v=N6Tgr2Vo6Jo.
12. 김재원. 「‘리얼리즘’ 미술」.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2호(2011): 72.
13. 박현, 신민에게 보낸 이메일, 2023년 9월 19일.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