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tist © Hyeree Ro

삼성문화재단 리움미술관 기획전 《아트스펙트럼 2022》의 작가들을 만났다.
 
다양한 재료를 조합한 오브제, 신체의 움직임, 언어가 어우러진 퍼포먼스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직조를 탐구해온 노혜리 작가. 그가 《아트스펙트럼 2022》에서 선보인 〈폴즈(Falls)〉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혼자 이민 생활을 하던 아버지와 함께 미국 여행을 했을 때 국경 지역에 자리한 나이아가라 폭포를 찾아가지 않은 경험에서 출발했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1997년의 금융 위기, 2001년의 9·11 테러, 2017년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임기 시작까지 세 가지 사건을 다룬다. 폭포처럼 맹렬히 하강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작가는 인간이 세워둔 경계를 뛰어넘는 연대의 가치를 발견한다.

 
먼저 나이아가라 폭포가 〈폴즈〉의 시작점이 된 계기에 대해 묻고 싶다.

어릴 때 아버지가 혼자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시게 되면서 아버지와 10여 년간 떨어져 지낸 적이 있다. 이후 2017년에 로스앤젤레스부터 뉴욕까지 미 대륙을 횡단하고 싶다는 아버지의 말에 단둘이 여행을 떠났다. 이때 아버지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는데, 폭포가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2017년은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한 해인데, 이때 강력한 이민 규제 정책을 추진하고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에서 불법 이민자라고 일컫는 이들을 체포하는 사례도 많았다. 이에 대해 생각하며 〈폴즈〉를 작업하게 되었다.

 
〈폴즈〉가 1997년의 금융 위기, 2001년의 9·11 테러, 2017년의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임기 시작까지 세 가지 사건을 다룬다고 들었다.

세 가지 사건이 각각 다른 의미로 〈폴즈〉의 의미 안에 내포된다. 작품의 제목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무언가가 하강하는 상황을 뜻하기도 한다. 1997년에 환율이 급락했고 2001 년에 건물이 무너져 내렸으며 2017년에는 트럼프의 임기 시작 이후 미국 내 이민자의 지위가 하락했다. 또 우리 가족이 1998년에 미국으로 다 같이 이민을 갔다가 2002년 초에 아버지만 남겨두고 한국으로 돌아왔으니 〈폴즈〉에서 다룬 사건들이 개인사와 연결되는 지점도 있다. 미술관 한쪽에서 재생되고 있는 〈폴즈 인터뷰〉 영상을 보면, 8명의 사람들이 세 사건과 연관된 각자의 기억에 대해 말한다. 이 영상을 만들면서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8명의 출연자는 어떻게 선정했나?

기준이 명확했다. 미국이 아닌 나라에서 태어나 199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 그러다 보니 대부분 1980년대생이고 국적은 한국, 일본, 필리핀, 멕시코 등 다양하다. 출연자들이 미국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로서 느끼는 정서에 비슷한 지점이 있다.

 
이번 작업에 여러 소재를 쓴 것이 눈에 띈다.

나무, 알루미늄, 도자, 유리, 철, 돌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했다. 평소 작업할 때 어떤 형상을 재현하거나 의미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질감, 모양, 색이 만나 이뤄내는 시각적인 물성에 집중하는 편이다. 그런데 〈폴즈〉에는 물이나 종이와 관련한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물이 쏟아져 내리는 형태의 유리, 영어로 미등록 이민자를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인 ‘언도큐멘티드(undocumented)’ 에서 연상한 종이, ‘워터폴 부빙가’라는 이름의 나무를 활용하는 식이다.

 
인스타그램을 살펴보니 ‘THINGS I PICK UP’이라는 제목으로 모아둔 사진들이 있었다. 일상의 사물에서 영감을 받기도 하는지 궁금하다.

흥미로운 조합의 사물을 발견하면 사진을 많이 찍어둔다. 그게 직접적인 레퍼런스가 되기보다는 여러 사진들에서 받은 영감이 작품에 자연스레 녹아 있는 듯하다. 머릿속에 데이터처럼 축적 되어 있다가 언젠가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셈이다.

 
〈폴즈〉는 여러 개의 오브제로 구성되어 있다. 오브제 들의 배치와 전시 공간에 대해서도 고민했을 것 같다.

조각이 아니라 설치 작품이기 때문에 공간 자체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눈높이가 아니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도 고려하며 〈폴즈〉를 작업했는데, 미술관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작품을 감상할 때 선과 면 등이 어우러져 있는 일종의 풍경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축약한 지도나 그래프의 이미지 들을 떠올리며 오브제들을 배치했다.


노혜리, 〈폴즈〉, 2022 © 노혜리

〈폴즈〉를 통해 퍼포먼스도 선보였다.

내 작품은 퍼포머가 등장할 때 비로소 완전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물, 신체, 내레이션 중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지 않고 적절한 균형을 이루게 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는 편이다. 내레이션도 파편화된 단어를 나열하거나 둘 이상의 언어를 섞는 식이다.

 
퍼포먼스를 시작한 계기가 있나?

전체가 온전히 기억에 남지 못한다는 특성 때문이다. 나의 퍼포먼스에는 내가 말하고자 하면서도 명확하게 드러내고 싶진 않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이야기는 퍼포먼스를 통해 한날한시에 미술관으로 모인 관객한테 전해지고, 이후 각 관객의 머릿속에 서로 다른 기억으로 남는다. 퍼포먼스가 각자에게 흩어지며 무언가가 닿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

 
〈폴즈〉의 퍼포먼스에 함께 등장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학교를 같이 다닌 동료이자 수년 전 〈예술 근육 강화 훈련〉을 함께한 작가 중 한 명인 엄지은이다. 〈예술 근육 강화 훈련〉은 5명의 작가가 아무 준비 없이 한자리에 모인 후 1시간 동안 각자의 퍼포먼스를 구성해 선보이는 것으로, 약 1년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충실한 관객이 되어준 적이 있기에 엄지은 작가를 또 한 명의 퍼포머로 선택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엄지은 작가의 체격이 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왜 체격이 비슷한 퍼포머가 필요했나?

〈폴즈〉의 퍼포먼스에서 엄지은 작가는 1997년에 도산한 기업의 목록, 2001년 9월 11일의 날씨, 2017년에 구금된 미등록 이주자의 통계자료 등 객관적인 수치를 말한다. 퍼포먼스는 그가 담당한 거시사와 나의 개인사 혹은 가족사가 교차하듯이 진행된다. 그래서 서로를 ‘쌍둥이’라고 부르 면서 이번 퍼포먼스를 준비했다. 혼자 하는 퍼포먼스가 아니기에 미술관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현장에서 많은 것을 직접 맞춰나갔다.

 
퍼포먼스의 동작을 구성할 땐 무엇에 중점을 두는 편인가?

사물과 동작의 상호작용이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세부적인 부분은 조형을 구성할 때와 비슷하다. 각 사물의 조합을 생각할 때처럼 동작의 속도나 크기가 일치하거나 대비되는 순간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엄지은 작가가 천천히 걸을 때 난 아주 빠르게 움직이고, 내가 종이를 접을 때 엄지은 작가는 펼쳐서 글자를 읽는 듯한 동작을 한다.

 
퍼포먼스를 선보이지 않고 영상으로 촬영해 재생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관객이 직접 퍼포먼스를 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퍼포먼스에 집중하는 관객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물리적 공간이 주는 특유의 에너지가 있다. 퍼포먼스를 마친 내게 관객들이 다가와 각자의 소감을 말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기록하더라도 공개 여부를 놓고는 항상 고민한다. 앞서 말했듯 퍼포먼스를 이루는 모든 것이 낱낱이 이해되기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관객 이 영상을 멈추거나 돌려보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서 퍼포먼스 영상을 만들더라도 이번 전시처럼 미술관 한쪽에 틀어놓는 방식을 더 선호한다. 예전에는 퍼포먼스와 연관 있는 영상을 따로 제작하거나 내레이션만 오디오로 재생하는 방식을 택한 적도 있다. 퍼포먼스의 기록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가지려고 한다.

 
〈폴즈〉에서 다룬 이야기처럼, 개인의 삶과 사회적 사건의 중첩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한 사람이 어떤 사건을 겪는다는 건 사회의 수많은 사람 중에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개인의 경험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그 경험을 왜 하게 되는지, 사회의 제도나 구조의 영향 때문은 아닌지에 대해 고민한다. 〈폴즈〉를 통해 미국 이민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한국에 있는 미등록 이민자들을 떠올렸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라는 혈통을 가진,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기에 이 나라에서 불편 없이 누리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더 나아가 인간은 국적, 인종, 성별, 학벌, 정치적 성향 등에 따라 굉장히 좁은 사회를 이룬다. 인간이 세워 놓은 그 경계로 인해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개인의 삶과 사회적 사건의 중첩을 발견하는 건 어떠한 관점을 얻는 것이고, 이는 연대의 문제와도 연결된다고 본다.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데 예술이 가진 힘은 무엇일까?

어떤 이슈에 관심을 갖게 하거나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데 예술의 효율은 떨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예술이 지닌 힘이 있다면 ‘주의 깊게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의 재료로 사용한 나무의 한 면이 거칠지만 다른 면은 오일이 칠해져 있다는 걸 발견하는 경험은 예술이 줄 수 있다. 이런 경험들을 쌓아가다 보면, 내 주변의 존재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의 뉘앙스가 가진 차이를 보다 잘 알아채게 될 것이다. 존중과 배려를 요하는 이러한 관찰이 기반이 된다면 사회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럴 거라는 믿음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