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아는
〈넌센스 팩토리〉라는 비디오 프로젝트로 ≪올해의 작가상 2013≫의
네 명의 최종 후보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함양아 작품에 담긴 이미지의 개념적 창조를
고찰하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함양아의 이미지들은 미학의 추상적 카테고리를 겨냥하는 기술적 추구도, 어떤 공공의 이슈에 주목하는 미디어 작품도 아니다. 심지어 작가
자신에 대한 재현이라 볼 수는 더더욱 없다. 말하자면 그것은 더 이상 누구 혹은 어떤 것에도 귀속되지
않는 인접(neighboring)의 이미지이다. 어떻게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인접성으로, 혹은 인접해 있는 이미지로 바라보는가? 이미지는
어떻게 인접해 있는가? 이 점과 관련해, 함양아는 들뢰즈와
유사한 기본 전략을 제안하는 것처럼 보인다. 들뢰즈가 가상과 실재가 구별되지 않음을 폭로한다면, 함양아는 한편으로는 일상생활에서 환영과 일상의 모호함을 제시하고자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독점’이 갖는 특유의 특권을 폐지하기 위해 역동적인 관계를 활성화시킨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자아와 이미지, 이미지와 이미지, 타자와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를 꿰뚫는 실험적 개념들을 집결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함양아의 개념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은 하룬 파로키의 이미지 개념뿐일 것이다.
우리는 2013년 작품 〈넌센스 팩토리〉를 2010년 작품 〈형용사적 삶〉넌센스
팩토리〉 개념의 확장으로 볼 수 있다. 〈형용사적 삶〉넌센스 팩토리〉에 담긴 함양아의 아이디어와 하룬
파로키의 소프트 몽타주의 목적은 둘 다 오리지널이란 미명으로 현대미술을 상품화하고 권력화시키는 이미지의 구현을 멈추게 하는 데 있다. 외려 두 사람은 일상생활을 묘사하기 위해 지금 현 세계의 클리셰나 혹은 이 세계에서 사용되거나 생산된 클리셰를
관찰한다. 이런 활동을 통해 두 작가는 스펙터클한 사회의 역설을 다양한 모든 측면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예를 들면, (일반 대중의) 위태로운
삶, (상품화, 기계, 스펙터클로
인한) 비인간적 이미지들. 이런 이미지의 재가공 방식은 파로키가
소프트 몽타주라 부른 개념적 전략이자, 함양아가 우리 삶을 고찰하는 데 사용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사실 두 작가는 모든 작품에서의 ‘관계’를 좀더 분명히 규정하기 위해, 동시에 중심화된 주체로서의 예술가
지위에서 벗어나 관계의 지속적인 변화상태를 보여주기 위해, 관계미학이나 포스트 프로덕션의 개념적 전략
너머로 나아간다. 결국 두 작가는 이미지 생산에 대해 언급하는 한편,
정치와 비평의 예술적 행위(말하자면, 예술 그
자체는 형용사가 되어야 한다1)를 이어가고
있다.
파로키와
함양아가 보여주는 예술적 행위에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예술적으로 보여주는 방식과 개념적 전략의 측면은
동일하다. 그러나 미학-정치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에는 차이가
있다. 강수미가 지적한 바 대로, 함양아는 아트선재에서 열었던
전시회의 한국 전시 명칭 〈형용사적 삶〉넌센스 팩토리〉에서 부등호를 사용했다.2 여기서
부등호는 흔히 말하는 예술의 가능성들을 나타낸다. 부등호는 수학에서 근접함을, 정신분석학에서 충동을 의미한다. 라캉은 환상(phatasm)이 가진 정신분열증적 힘에 대해 더 파고든다. 자본주의
세계는 기 드보르가 과도하게 이데올로기에 젖은 어조로, 상품으로 구현된 세계가 실제세계를 대체해버렸다고
주장했던 것만큼이나 불운하다. 이런 주장은 함양아의 〈형용사적 삶〉이 의미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큰)의 가능성들이 보이는 것은 위태로운 관계로서의 형용사 때문이다.
게다가
대상 a와 대타자(A(S), big Other)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라캉과 파로키의 방식들이 환영 공식의 이중적 불평등, 즉
“$◇a”을 따르기 때문이고, 대타자로부터 대상 a가
산출되는 방식을 고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파로키는 매우 유럽적인 이 비평적 사고에 매달려
있고, 그는 종종 작품의 통제자로서 일종의 대타자와 연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함양아는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논쟁적인 또 하나의 가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철저한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상 소타자는 대타자 과잉에서 비롯되는 경험이며, 이런 경험은 환상과 판에 박힌 일상의 일치이다. 이런 측면에서 종종 대립적 태도로 작품을 배치하는 파로키와 달리,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비디오 이미지 모음에서 함양아는 경험의 관찰과 이해에 깊이 파고들어 이미지가 노출시키는 장인적 순간을 건드린다.
이번
전시에서 함양아는 회화 복원의 장인을 초대해 실제로 퍼포먼스를 실현시키고자 한다. 분명 이러한 전개는
이 프로젝트의 쌍방향성을 강화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가능성을 좀더 분명하게 파악하게 만들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심지어 기계적 생산의 한 부분만을 담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창조성(plus
creativities)을 양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2007년 프로젝트 〈형용사적 삶-아웃 오브 프레임〉과 마찬가지로) 형용사 상태에 위치한 이 작가는 이미지 세계에서 시각적 미장아빔(‘mise
en abyme’ 심연으로 밀어넣기, 한 작품 안에 또 하나의 작품을 집어넣는 예술적 기법: 옮긴이)을 생산할 수 있다. 이는
일상의 노동에 젖어 있는 관객들을 자아 세계로 돌려 보내고, 관객들이 스펙터클 사회로서 대타자의 밖에
있는 그 이상의 창조성을 볼 수 있게 만든다.
이것은
리차드 세네트가 논의한 것과 유사한 가능성이다. 세네트는 이러한 가능성을 규명하기 위해 거의 20년 동안 현장연구를 했다. 노동(labour)과는
구분되는 작업(work)의 의미를 정립한 스승 한나 아렌트의 뒤를 이어 한 걸음 더 나아간 세네트는
거대 서사의 유령 밖으로 이탈함으로써 해방의 가능성과 휴머니티의 가치를 좀더 깊게 고찰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이론가들은 모두 예술가의 난제를 피했다. (반대로 함양아가 예술가에게 주어진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아마도 몇 차례의 경제적 위기와 세계화의 새로운 무대가 된
아시아의 상황 이후, 함양아는 현장 작업 관점에서 주어진 감각 분할 경로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하는 듯
하다. 이런 시도는 아주 중요하다. 그녀가 우리 눈 앞에
보여주는 미장아빔의 시각성은 일상 노동과 그 이상의 창의성 사이에 차이를 만든다. 여기서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주어진 감성의 분할은 가상의 것에 인접해 있다는 점이다.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 분할 이론의 모호한 해방 개념과 대조적으로, 함양아는
한결 분명한 경험의 방법을 제시한다.
세계화
이후, 세계 도처가 공장과 과학 공원, 쇼핑 몰로 가득차
있는 것은 일반적 현상처럼 보인다. 게다가 거의 모든 이들이 과로의 상태로 살아 남으려고 노력한다. 19세기에 군사적인 관리의 위계가 사회의 본질적인 구조가 되었다면, 2000년
이후 아시아는 서구 국가들이 수십년간 계획해온 세계화 구조와 아주 똑같은 체제를 뒤따르고 있다. 사회
관계의 모든 커넥션, 특히 생산 관계의 커넥션은 개인화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생산 관계와 작업 상황을 진척시킨다. 한편으로 개인으로서 우리는 생산이 투자자인 일부
소수만 납득시키는 상황, 그러나 기계적으로만 생산에 임하는 거대 다수에게는 무의미한 상황에 점점 더
대처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 노동력의 분배와 밀접히 관련돼 있는 감성의 분할은 분명 우리에게
생산의 구조와 관계들의 차별화를 요구하지만, 이 차별화는 언제든지 구매할 수 있는 새로운 감수성들로
이룰 수는 없다.
전시장
입구에는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판재들이 걸려있다. 따라서 입구는 한정된 문틀로 축소된다. 어두운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관객은 자기 체중으로 인해 약간 흔들리는 무대에 오를 것이다. 무대 위에는 고정된 작업 벤치가 있다. 이 무대 장치는 일종의 상황의
선언이다. 즉 〈다섯 번째 방: 팩토리 지하〉: 우리는 흔들리는 표면에 위치한 채 고정된 작업 자세를 부여 받는다. 무대
앞에는 이 전시의 가장 큰 비디오 영상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이 여섯 개의 방(여섯 개의 각기 다른 생산 장소) 중 첫 번째 방인 〈첫 번째 방: 중앙 이미지 박스 통제실〉이다. 거기에는 전시 전체를 관통하며 많은
작품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통일 교회의 리틀 엔젤스〉를 뒤집어 놓은 흰색과 검은색의
이미지다. 사실 이 전도된 이미지는 1972년에 텔레비전
방송 도중에 일어난 실수였다. 이처럼 우발적인 전도는 한국이 경험한 이데올로기의 신봉에서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감춰진 진실로의 (이행) 과정으로 간주될 수 있는 듯하다. 제한된 해상도(dpi)를 가진 이 뒤집어진 이미지가 확대되면, 사람들은 천사의 모습을 식별하지 못하고 오직 픽셀만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이 픽셀들에 감춰진 다양한 작업의 이야기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전도된 이미지처럼
모든 작업의 이야기는 일상과 전문가, 노동과 지식, 시스템과
발명 등 역설의 공존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가 이러한 모순적인 현실에 저항하는
동시에 그것에 예속돼 있음을 드러낸다. 〈중앙 이미지 박스 통제실〉의 다양한 다큐멘터리 리포트에서 이
비디오 클립들을 볼 수 있는데 이 영상들은 전문지식과 그것의 뛰어난 실현의 순간에 집중적으로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작가를 통해, 우리는 노동과 창조 사이의 경계의 순간을 볼 수 있게
된다.
설치작업이
있는 전시장 공간 안에는 어떤 가이드라인이 없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첫 번째 설치작품에서 이미 모호함과 불확실함을 오가는 상태를 경험하게 되면서
전시공간 전체를 유령이 배회하는 공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관람객들이 본 것은 그들에게 친숙한 미디어
이미지로 그들은 물화(reification), 상품화, 환상(fantasization)의 자본주의 사회 속의 다양한 시체-이미지(cadaver-images)를 보고 있다고 느낀다. 넌센스 팩토리의
여러 방을 돌아다니는 관객들은 사실 시체에서 막 빠져 나온 유령처럼 아마도 작가가 의도했을 조우의 순간을 찾아 다니게 된다. (데리다의 유령(specter) 개념의 차원에서). 그러나 이러한 조우는 작가, 창조성 혹은 걸작과의 만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노동에 내재된 외부(dehors)와의 만남이다. 무대의 왼쪽 편에는 비디오 설치작품 〈영원한 황홀〉이 있다. 거기에는
세 개의 비디오가 있는데, 하나는 서로를 죽이는 벌떼의 이미지이고, 또
다른 하나는 거리의 한 장소에서 장시간 촬영한 이미지이다. 세 번째는 거리장면의 오른쪽 윗편의 한 건물옥상에
설치되어 있는 전광판이다. 전광판에서는 광고나 뉴스가 흘러나온다. 여기에
작가는 뉴스클립이나 자신이 만든 클립을 추가하여 다시 이 전광판 화면으로 되돌려 놓았다. 이 작품은
서울시장선거 기간에 완성됐다. 결국 작가가 이 특정 종류의 설치작품으로 관객들에게 인지시키려고 한 것은, 자연과 소외의 차이가 아니라 각기 다른 세 종류의 생활시간과 생존욕망의 공존이다. 관객들은 이 설치작업의 한 난간에 있는 창문으로 〈넌센스 팩토리〉의 간략한 프로젝트 담론을 이해할 수 있다. 함양아는 관객들이 즉시 몰입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전용하고 있지만, 매
순간 관객들이 이 이미지들에 자아를 투영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시각적 거리를 장치해 놓는다. 그는 관객을
유령처럼 만든다.
〈중앙
이미지 박스 통제실〉의 뒤쪽에는 두 개의 삼각형 구조물들이 위치해 있다. 한쪽 면에는 〈여섯 번째 방: 새로운 팩토리의 도면을 그리는 방〉이, 다른 면에는 〈새의 시선〉(2008)이 있다. 전자는 쥐의 머리에 설치된 카메라 샷(camera shot)이다. 이 작품에서는 물 공급 시스템으로 계속
움직이는 쥐를 관찰하고 규명하기 위한 각종 기구들이 사용되었다. 이 작품은 동시에 세 개의 다른 측면, 즉 아상블라주 드로잉, CCTV 모니터 이미지, 쥐에 관한 데이터 등을 제각각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시되고 있다. 후자인
〈새의 시선〉은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구 서울 역사에서 비둘기를 촬영한 비디오다. 비디오는 세 파트로
구성되었는데, 첫 번째는 고속카메라로 촬영된 제한된 공간의 비둘기이다.
두 번째는 비둘기의 등에 설치한 CCTV 카메라 파일럿에 의해 기록된 비둘기의 시각이다. 두 번째 비디오 이미지에서는 이전의 좁은 공간이 창문으로 개방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세 번째 비디오는 이 때 서울로 날아오는 다른 비둘기를 보고 있는 비둘기의 시각처럼 보인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비-인간 이미지에 대한 특정 종류의 환영을 창출하는
경향을 보인다.
〈중앙
이미지 박스 통제실〉 뒤에는 작가가 만든 모호하고 냉소적인 작품 두 점이 있다. 하나는 〈I came for 행복/항복 〉이라는 제목의 네온 튜브로 만든 설치작품이다. 로마자 필기체로 쓰인 영어의 끝이(I come for) 흐려지고
한국어 단어의 한 부분의 네온 빛이 깜박거리면서 모호한 한국어 단어는 행복/항복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또 다른 작품은 초콜릿으로 만든 조각상 〈예술가〉로, 이는
작가의 역설적인 의도를 나타내는 〈지속적인 초상들〉 프로젝트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각각
〈두 번째 방: 복지정책을 만드는 방〉과 〈네 번째 방: 예술가들의
방〉이 된다. 비록 미술작품으로 전시되어 있지만, 이 두
작품은 각각 대화의 상실, 그리고 불만과 키치에 관한 이야기 부분에 해당되는데 이 두 이야기는 이데올로기와
정체성의 중간에 내재된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
〈팩토리
지하〉의 무대의 다른 쪽에는 〈세 번째 방: 쿠폰을 만드는 방〉이 있다. 이것은 노동과 욕망의 암시와 가장 관련이 깊은 작품이다. 관객들은
통화나 신용카드처럼 금융자금을 다루는 수많은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또 생산라인과 유니폼을
강조한다. 〈쿠폰을 만드는 방〉의 입구와 끝에는 각각 예술가를 가리키는 비눗방울 퍼포먼스 이미지와 〈팩토리
지하〉에 관련된 붉은 잉크의 펜 이미지가 보여진다. 붉은 잉크의 만년필 영상 뒤로는 관객들이 그 이미지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도록 계단이 있다. 이렇듯 올라감이라는 위계화된 특성을 통해, 관객들은 팩토리 공간 전체를 내려다 보면서 역사를 기록하는 권력자처럼 느끼게 된다.
사실
여섯 개의 주제가 있는 여섯 개의 방은 다큐멘터리 리포트의 특정이미지와 작가의 상상력이 엮인 팩토리 각 섹션의 여섯 개의 이야기와 일치한다. 여섯 개의 이어지는 이야기는 환상으로 가득 차고 부조리한 카프카적인 여행과 매우 흡사하다. 유일한 차이점은 카프카의 여행에서 성을 방문하는 측량사나 공무원이 함양아의 버전에서는 노동자와 노동자 신문의
리포터로 대체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카프카와 연관된 가장 심오한 이미지 예술가 오손
웰스를 언급해야 한다. 오손 웰스부터 테리 길리엄이나 스티븐 소더버그에 이르기까지, 이미지 내러티브의 핵심은 고딕적 어둠(noire)이 가득한 현실(the real)이었다. 함양아는 상대적으로 카프카식의 불합리를 꼬여
있고 계층화된 현실 경험으로 밀고 나갔다. 세계화된 창조적 산업 시대의 노동과 작품은 아렌트의 “생존하다/창조하다”의
이분법으로는 구분될 수 없다. 사실 일상생활은 사이성(in-betweenness)의
끊임없는 교차를 지속시킨다. 다시 말하면, 불안정한 욕망은
일상생활의 안락함과 역사의 상징적인 업적 사이에 위치한다. 비-인간
이미지(동물화된 대상성, animalized objectivity),
다른 이들의 이미지(일상생활에 대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작가의 이미지(자기해체)로부터 전개되면서, 이러한 공간 배치는 세부적이고 개별적인 노동의 경험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이와
동시에, 그것은 교차하고 얽히는 관계의 공간에서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변화시키는 리좀적인(rhizomatic) 세계를 낳는다.
함양아
작품의 이런 재구성을 통해 관객들은 경험과 세계에 대한 작가의 시각, 그리고 작가의 개념이 어떻게 이미지를
재생산하는지에 주목할 수 있다. 유령으로서 관객들인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 스스로를
바라 보고 들뢰즈의 노마드(nomad)의 해방의 순간, 즉
시체와 유령의 조우를 찾고 있다.
1. 그것이 한스 벨팅의 글로벌 아트를 지칭하든, 보리스 그로이스의 도큐멘타를 지칭하든 그것은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2. 강수미, 「삶의 섬세한 형태소, 센스-넌센스 스크립트」, 『함양아』,
SAMUSO: Space for Contemporary Art, 2011, p.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