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범가옥에서 열린 개인전 《석양에 내려앉은 눈》(2025)을 준비하면서 손동현은 가장 먼저 공간을 찬찬히 붙잡는 데에 공을 들였다. 차곡차곡 내려앉은 시간의 층들이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그곳에 머물렀다. 눈에 담고 마음으로 느꼈다. 거장과 그의 예술을 향한 존경심 그리고 공감이 나란히 깊어지는 장소였다. 전시된 손동현의 작품 크기와 형태, 배치, 설치 방식 모두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감각이 예민해질수록 머릿속은 맑아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몇 번을 방문했을까, 설렘보다 평온함의 비중이 커졌을 때 작가는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뒤 손동현은 수없이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의 작품 이미지를 마주했다. 나중에는 하늘을 보고 땅을 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과가 되었고 의식하지 않아도 숨을 쉬듯 반복하게 되었다. 이전에도 이상범의 산수화를 자주 보아왔다. 전시장에서 만난 산수화는 평면 위의 경치임에도 작가가 머무는 공간으로 스며들었다. 화폭 안에 걸어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적도 있다. 화집을 보고 온라인에서 검색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도록 두 권을 구해 보고 또 보기를 계속했다. 많은 작품을 언제든 원할 때마다 펼쳐볼 수 있었다. 이미지지만 손에 잡히는 무언가로 존재해서 더 좋았다. 그림을 그리는 이상범을 상상하는 작가의 손길이 도판 위에 머물 때도 있었다. 나지막한 산과 개울, 나무, 풀숲, 소박한 가옥과 그곳을 터전으로 머무는 사람은 자기 자리에 정확히 그려졌다. 고요하고 정갈한 풍경이다. 서정적 분위기가 담뿍하다.


손동현, 〈사계산수〉, 2024-2025, 종이에 먹, 잉크, 아크릴릭 잉크, 크레용, 인주, 182 x 360 cm x (8) © 손동현

상상하기의 시간이 흐르면 손동현은 붓을 잡고 그렸다. 이상범의 작품에서부터 만화책에 이르는 산수 그림의 이미지를 오리고 붙였다. 정취와 형식적 논리 모두를 붙잡기 위해 애쓰며 소재와 재료를 실험했다. 경직되지 않기 위해 유희적 태도를 잊지 않았다. 화폭은 하늘과 산, 물과 나무, 대기로 채워졌다. 그렇게 물상이 한곳에 모였다. 두 예술가는 이어지고, 새로운 시간의 층이 더해졌다. 손동현의 내면에서 때때로 시간은 거꾸로 흘렀다. 여러 순간을 옮겨 다닌 것도 같다. 그만큼 작가의 시간도 두터워졌다. 그래서인지 〈달밤 1〉(2025)처럼 달이 두 개이고 별이 빛나는 하늘, 눈이 쌓인 풍경과 눈이 녹은 풍경이 공존하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손동현의 산수-풍경화의 시작은 블록버스터(blockbuster)의 배경이 된 도시를 그린 ‘섬’ 시리즈(2010~2011), 토리야마 아키라(Toriyama Akira)의 출판 만화인 『드래곤볼 Z(Dragon Ball Z)』에 등장하는 전투 장면의 배경 풍경들을 이어 그린 ‘배틀스케이프(Battlescape)’ 시리즈(2013) 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이른 봄〉(2020~2021)에서는 곽희(郭熙)의 〈조춘도(早春圖)〉(1072)를 토대로 하면서도 재료와 표현법뿐 아니라 화면 구성까지 변주했는데 이러한 실험은 겸재 정선(謙齋 鄭歚)의 산수화들을 재조합한 〈한양〉(2022)과 같은 작품으로 이어졌다. 연원이 되는 작품은 있으나 무엇도 그대로 옮기지 않았고, 전통적 준법(皴法)과 삼원법(三遠法)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작가는 화면 안에서 어떤 표현을 할 수 있는지에 집중하게 되었다.
 
사실 작업 초기부터 손동현은 동아시아 회화의 역사와 동시대적 시의성을 담아내는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전통 동양화의 미학, 재료와 표현기법, 주제와 소재, 어느 하나도 소홀함 없이 고심하고 실험해 왔다. 〈이른 봄〉이나 〈한양〉, 그리고 전시 《석양에 내려앉은 눈》에서 선보인 〈사계산수(四季山水)〉(2024~2025), 〈한림모설(寒林暮雪)〉(2024~2025)처럼 동아시아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감흥을 일으켰던 작품, 특히 산수화를 소재로 삼는 시도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사계산수〉와 〈한림모설〉에서는 “작품 속 이미지를 뒤섞기보다” 계획적이지만 변칙적인 “지층을 그리듯 차곡차곡 쌓았다.” 그로 인해 완만한 형상과 수평적 구성에서 시작했으나 가파른 산세의 풍경으로 귀결될 수 있었다. 또한 특정한 작품 한두 점을 지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 이미지와 이미지를 넘나들며 유영한 뒤의 흥취와 영감을 담았다. 어쩌면 도록 한 권이 작가가 노니는 하나의 풍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힌트를 주듯 나룻배나 초가집처럼 이상범을 대표하는 도상들을 풍경 사이사이 숨기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석양에 내려앉은 눈》 전시전경 © 손동현

이런 시대에 작가는 대피 덕(Daffy Duck), 토니 더 타이거(Tony the Tiger) 같은 애니메이션과 광고 속 동물 캐릭터를 바탕으로 영모도(翎毛圖)를 그렸고, 밤비(Bambi), 닌자거북이(Ninja Turtle), 〈텔레토비 Teletubbies〉(1997~2001)의 해님, 〈스타워즈 Star Wars〉(1977)의 데스 스타(Death Star), 〈환타지아 Fantasia〉(1940)의 춤추는 버섯 등이 등장하는 십장생도(十長生圖)를 선보였다.

〈섬 Island〉(2010)에서는 〈딥 임펙트 Deep Impact〉(1998), 〈투모로우 The Day After Tomorrow〉(2004)와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의 파괴된 도시 풍경을 담았으며 〈배틀스케이프 Z Battlescape Z〉(2013)에서는 만화 『드래곤볼 Dragon Ball』 속 전투 장면의 배경을 이어서 산수화를 완성했다.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사건들이다. 그러나 가상의 세계에서는 익숙한 풍경이다. 우리는 만질 수 없는 세상 속에 둘러싸여 있다. 이미지로 서로와 만난다.
 
다시금 질문 하나.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그린 그림이 특이한 것이라면, 자신이 실제로 보지 못한 존재들을 그려냈던 이전 시대 미술가들의 작업과 손동현의 작업은 무엇이 닮았고 무엇이 다를까? 손동현에게는 만질 수 없어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미지가 있었다. 진짜를 그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진정한 재현은 무엇인가? 어쩌면 작가는 회화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실재가 아닌 가상 이미지의 모방이든, 복제된 것의 모방이든, 아니면 사상과 감정의 모방이든 회화다. 그리고 회화(예술) 창작의 시작에는 미메시스(mimesis)가 있다.


손동현, 〈사계〉, 2025, 제본된 종이에 유성펜과 종이 콜라주, 30.3 x 25 x 2.4 cm © 손동현

그런데, 그와 동시에 작가는 조심스럽고 정교하게, 조금은 차갑게 작품과 자신의 거리를 유지하며 회화적 형식 실험의 비중을 높여간다. 여전히 다뤄지지 않은 재료와 표현법이 많으며, 아직 시도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이다. 예를 들어 〈사계산수〉의 일부에서 선과 번짐, 형상들과 색채 같은 조형 요소가 먼저 시선을 끄는 상황은 작가가 회화 그 자체에 집중한 결과이다. 최소한, 〈사계산수〉와 〈한림모설〉 같은 최근의 작품들은 재현적인 동시에 표현적이고, 추상적이다.

이러한 태도는 매체의 사용 방법과 기법에서도 잘 나타난다. 손동현의 초기 작업은 전통적인 재료와 표현법에 집중한 채색화였고 점차 먹의 다양한 사용이 두드러졌다. 최근작으로 올수록 잉크와 크레용도 사용하고 있다. 붓으로 그리고, 칠하고, 탁본하고, 도장을 찍고, 이번에는 콜라주까지 등장했다. 손동현은 〈드로잉 4〉(2025)와 '달밤' 시리즈(2025), 그리고 〈물〉에서 이상범의 도록에 실린 도판과 만화책에 등장하는 자연 그림들을 이어 붙였다. 〈드로잉 3〉(2025)에서는 인보(印譜)를 오려 사용했다.
 
이제 작가는 작품이 놓이는 공간으로 눈을 돌린다. 애초에 《석양에 내려앉은 눈》에 출품된 모든 작품은 외관과 의미 모두에서 장소 특정적이었다. 그림 속 인물이 들고 있는 부채가 날아든 것처럼 네 개의 부채를 벽에 함께 설치했던 〈마스터 스피릿(Master Spirit)〉(2015)을 비롯한 일부 작품에서 손동현은 회화적 환영이 현실 공간으로 어떻게 확산할 수 있을지 고민해 왔다.

10여 년이 지난 뒤 작가는 그림으로 채워진 부채와 화첩을 다락에 설치해 파노라마(panorama) 같은 무대를 만들었다. '산' 시리즈(2025)와 '구름' 시리즈(2024~2025)는 선면화(扇面畵)이자 오브제-부채이고, 산수로 채워졌으나 병풍처럼 공간에 직립한 화첩이다. 회화이자 설치이다. 작품의 받침대가 되어준 이상범가옥의 협탁과 소품들은 자연스러운 산세를 형성하기에 적합했다. “부채 하나하나가 산이고 언덕이고 구름이었다.” 용이 사는 곳은 어디일지 다시금 상상해 본다. 구름은 바람에 이리저리 뒤집히고 흐른다. 구름 속의 산은 홀로 오뚝하지 않아 좋다. 작지만 넓고, 평평해서 깊음을 전하는 시공간이다.
 
《석양에 내려앉은 눈》의 작품들은 누군가에게 회화로 혹은 장소에 상응하는 설치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산수로 경험될 것이다. 이상범의 산수화를 떠올리고 연결점을 찾아볼 수도 있겠다. 그저 눈으로만 경험해도 괜찮다. 가옥의 꽃담과 하늘을 응시하다 잠시 작품으로 눈을 돌리면 또 새롭게 보일 것이다. 아스라한 과거와 그보다는 선명한 현재가 녹아든 장소를 느껴본다. 어느 쪽이든 좋다. 손동현의 작업에 잠시 마침표를 찍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끝을 뜻하는 마침표는 아니다. 지금의 작품을 흠뻑 감상하기 위한 것이자 잠시 느긋하게 머무르기 위한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