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동현의 작업에서 상상력은 중요하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지만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전개되는 상상의 이미지화는 막연한 개념으로 존재하던 회화적 세계를 구체화한다. 선형(線形)의 흐름을 갖던 동아시아 회화의 시간은 작가의 창작 행위로 해체되고 재조합되어 바로 지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손동현의 회화가 전하는 첫인상은 전통이라는 특정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지만 실상 여러 층의 시간을 넘나든다. 현재에 활동하는 작가가 진행하는 예술에 대한 탐구란 과거에만 한정될 수 없기에 당연한 일이다. 작가의 시점으로 재구성된 존재들이 머무르는 시간은 선비가 군자를 지향하며 그림을 그리던 과거일 수도, 초인적 힘을 가진 영웅이 활약하는 미래일 수도 있다. 분명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 시간의 폭을 넓히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문화예술의 영역에서 얻은 다양한 자료에 상상력을 더해 자신만의 이미지 화론집을 만들어냈다.


《소나무》 전시전경 © 윌링앤딜링

손동현은 ‘소나무 Pine Tree’ 연작(2014)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의 회화론, 매체와 기법을 상징하는 인물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먹에 관한 작업을 염두에 두었던 작가는 먹의 재료이자 전통 회화에서 즐겨 그려졌던 소나무를 소재로 선택하게 되었다. 문인화 속 소나무가 의미하는 군자의 절개와 지조는 〈Mister High Fidelity〉(2014)에서 초묵법(焦墨法)으로 그려진 백의(白衣)의 인물이 되었고, 일월오봉도의 소나무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붉고 강인한 〈Pine the Great〉(2014)로 재탄생되었다.

〈Shaman the Evergreen〉(2014)의 소나무는 푸른 팔에 호랑이와 까치 문신을 한 채 영화 〈고스트버스터즈 Ghostbusters〉(1984)의 주제곡 가사가 적힌 부채를 든 존재로 등장해 민화 속 벽사의 역할을 잇는다. 〈Mister High Fidelity〉(2014)는 장수(長壽)의 소나무를 상징하는데 학의 날개를 갖고 거북이 모양의 갑옷, 해와 구름이 새겨진 보호대를 두르고 있다.
 
이처럼 ‘소나무’ 연작을 통해 추상적 생각과 믿음에 인격을 부여하는 작업의 가능성을 확인한 작가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발표한 일련의 작품들에서 서화(書畫), 화육법(畵六法), 준법(皴法), 먹, 채색 등과 관련된 이론이나 특성을 의인화했다. 그리고 그 안에 작가가 동아시아 회화의 역사를 추적하고 화론을 습득, 해석하여 자기화하는 전(全) 과정을 응축시켰다. 내재적 특성을 겉으로 드러내는 존재들은 초상화를 통해 전신사조(傳神寫照)를 실험하거나, 그림 그리는 사람의 정신을 작품에 담아내는 전통 산수화와 문인화를 탐구해온 이전 작업의 지속이다. 동시에 세대를 이어온 사상과 양식을 동시대적으로 체화(體化)하는 새로운 확장이다.


손동현, 〈The Graphy〉, 2015, 지본수묵, 194 x 130 cm(중앙), 107.3 x 39 cm(좌), 84.5 x 50 cm(우) © 손동현

의인화된 존재를 주제와 관련된 구체적 이미지로 채우는 손동현의 회화는 직관과 은유, 보편성과 자의성, 단일성과 다양성 사이를 넘나든다. 시스템에서 통용되는 상징체계를 따르는 이미지와 지극히 개인적인, 작가만의 해석과 경험을 따르는 이미지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통적으로 먹은 글과 그림 모두를 위한 재료이기에 작가는 문자로 그림을 그려 〈The Graphy〉(2015)를 완성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공감하는 전개이다. 그런데 작가는 현재를 사는 자신만의 해석을 덧붙였다. 바로 만화에서 소리나 동작 등을 표현하기 위해 넣는 글자들을 이용해 글과 그림의 중간, 형상과 추상의 중간 어딘가에 위치하는 문자 회화를 추가한 것이다. 〈Master Ink〉(2015)에서는 먹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 인물의 중앙에 먹과 벼루뿐 아니라 자신이 사용하던 벼루에 새겨진 용 문양까지 함께 그렸고, 몸의 일부가 산세 혹은 글자로 변해가게 흐트러뜨렸다. 동아시아 회화 안에서 명맥을 이어온 인물화와 산수화, 그리고 문자 예술이 하나로 어우러지길 원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손동현, 〈Master Bone Method〉, 2015, 지본수묵, 194 x 130 cm © 손동현

자의적 해석의 비중은 작업이 전개될수록 늘어났다. ‘소나무’ 연작을 소나무와 관련해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이미지들로 채운 것과 달리 ‘육협 六俠’ 연작(2015)에서 사혁(謝赫)의 육법(六法)을 무협의 초식(招式)과 연결한 것이 대표적이다. 작가는 동아시아 회화의 중요한 근간이자 오늘날에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작품 평가의 기준인 화육법을 체화한 이상적 존재를 초식을 온전히 익힌 협객(俠客)에 대응시켰다.

여기에는 화육법으로 대표되는 화론을 머리와 몸으로 받아들이고 체득해야 하는 작가의 여정, 전통 회화와 화론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현재의 태도 등에 관한 질문과 고민이 담겨 있다. 작가는 옛 화가들이 최고의 인품과 기술을 위해 수련을 견뎌낸 이야기를 읽으며 그것이 단순히 사실을 기록한 게 아니라 전통 회화가 추구했던 이상의 의미를 전하는 데에 집중한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협지의 주인공들에게도 그와 같은 모습을 발견했다. 작가에게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이상에 다다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상을 추구하는 자세, 한계를 초월하려는 의지가 중요했다.
 
무협지나 무협 영화의 주인공인 협객은 협의(俠義) 정신과 무공, 격투 형식 등이 몸에 배어 자신의 것이 된 존재, 즉 정신과 무술이 하나로 합쳐진 존재이다. 그러고 보니 이론(철학)과 기술의 체화가 필수적인 상황은 과거에서부터 동아시아 화가에게 요구되던 것이다. 생각으로 붙잡고 마음으로 느끼고 몸으로 경험하는 작업이다. 무협물에서 무예(武藝)와 서예(書藝)가 연결되는 듯한 표현이 등장하거나 서예뿐 아니라 악기 연주, 춤에 능한 협객이 등장하는 것도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손동현, 〈Master Dvision Planning〉, 2015, 지본수묵, (좌로부터) 45.5 x 53 cm, 99 x 39.5 cm, 53 x 45.5 cm, 86 x 50 cm, 106 x 41 cm, 75 x 51.5 cm, 45.5 x 53 cm, 53 x 45.5 cm © 손동현

〈육협〉에서 작가가 만들어낸 협객의 모습은 육법의 내용을 극대화하는 데에 집중되었다. 기운생동(氣韻生動)인 〈Master Spirit〉(2015)에서는 대상의 핵심적 특질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을 전달하기 위해 염력을 쓰는 귀신 같은 존재를 생각해냈고, 종규도(鐘馗圖)의 표현법이나 만화에서 기(氣)를 뿜어내는 주인공을 그리는 효과들을 사용했다.

글과 그림을 위해 붓을 다루는 것에 관한 내용인 골법용필(骨法用筆)을 상징하는 〈Master Bone Method〉(2015)는 먹이 뿜어져 나오는 칼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인물이다. 응물상형(應物象形)을 시각화한 〈Master Correspondence〉(2015)를 위해서는 그려지는 대상 혹은 그림의 바탕에 맞춰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인물이 다양한 두께와 질감의 화선지, 순지, 장지, 비단을 바탕으로 한 8폭 병풍에 그려졌다. 수류부채(隨類賦彩)는 〈Master Suitability〉(2015)에서 색의 기운을 상대에게 전해주는 인물로 해석되었고, 경영위치(經營位置)인 〈Master Dvision Planning〉(2015)은 어떤 조건에서든 공간을 구성할 수 있는 인물로 채워졌다.

작가는 〈Master Dvision Planning〉이라면 시공간을 초월해 순간이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상상했고, 만화 속 등장인물들이 순간이동 할 때의 표현법을 응용했다. 한편 앞선 시대의 명작을 학습해서 기법을 익히고 적용해야 한다는 전이모사(傳移模寫)를 한 명의 인물에 담아낼 수는 없다고 판단해 〈The Transmission〉(2015)은 나머지 다섯 인물의 요소들을 결합한 문자도로 완성했다.
 
화육법의 현현(顯現)인 인물상들은 멀고 먼 이상(理想)의 영역에만 머물던 개념을 구체화하여 살아있는 것으로 만든다.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한 영웅 혹은 동아시아 회화의 맥을 잇는 사명을 가진 슈퍼히어로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실제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현재에도 동양화의 가치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화론은 작가에게 초월적 힘을 가진 막강한 존재처럼 느껴졌을 수 있다. 또는 동아시아 회화의 현대적 전개를 위해 꼭 필요한 영웅과도 같은 무엇일지도 모른다.


《Jasmine Dragon Phoenix Pearl》 전시전경 © 송은

이와 같은 손동현의 회화는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나 개념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가상의 영웅인 슈퍼히어로는 그리스 신화 속의 신이나 영웅과 닮았다. 그들은 고대의 우상들이 그랬듯 불멸과 초월성을 성취하려 한다. 오늘날 비현실적인 옛날이야기로 여겨지지만 신화는 인간의 정신적인 세계, 그리고 인간을 둘러싼 외부 세계가 집대성되어 의인화된 것이다.

신화는 문자가 사용되기 이전부터 인간 사회의 집단 기억, 삶의 원형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당대의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는지가 담겨 있다. 인간의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신화는 자연 세계를 설명하려는 노력일 수도 있고, 비유적인 가르침일 수도 있다. 이 모두가 신화이다. 그리고 인간이 예술에 감동하는 것은 그것이 신화처럼 인간의 기억과 삶을 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신화처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동양화의 세계와 동시대적인 상황을 종합적으로 반영하는 손동현의 이능력자(異能力者)들은 예술의 영역을 넘어 작가를 포함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한 관망을 가능하게 한다. 미술 안에 머무르지만 미술의 영역을 넘어서는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미술과 현실 또한 이어진다.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를 관찰하고 인식하여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미술 창작이다. 그렇게 작가의 시공간은 더 넓어진다.
 
동아시아 전통 회화의 테두리 안에 머무르는 것 같지만 손동현이 담아내는 이미지와 내러티브는 시각문화 전반을 다룬다. 그의 작업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대중문화이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대중문화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동시에 우리 시대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전통 회화와 대중문화라는 서로의 거리를 좁힐 수 없을 것 같은 요소들의 결합은 설렘을 동반하는 낯선 의미를 생성시킨다.

이처럼 현실감 있는 한 점의 작품, 하나의 연작을 위해 손동현이 수집하고 학습하는 자료의 양과 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손동현의 작업에는 긴 준비 과정이 필수적이다. 작가는 자신이 준비한 이론적 지식과 조형 기법 등을 토대로 이뤄지는 분석과 숙고의 과정을 거쳐야만 예술적 표현을 시작한다. 인용과 참조에 머무르지 않고 작업의 결말에 새로운 것의 발명을 놓기 위해서이다.


좌: 손동현, 〈Gray Mist〉, 2016-2017, 지본수묵, 194 x 130 cm © 손동현
우: 손동현, 〈Lady Composition〉, 2016-2017, 지본수묵, 194 x 130 cm © 손동현

2017년의 전시 《손동현: Jasmine Dragon Phoenix Pearl》에서 선보인 작품들에서도 이와 같은 기조는 유지되었다. 〈The Origin〉(2017), 〈Lady Composition〉(2016~2017), 〈One Stroke〉(2017), 〈Ideo G〉(2017)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림과 문자 사이를 넘나드는 실험도 여전하지만, 이번에는 특정한 소재나 화론에 국한되지 않았다.

작가는 이전보다 힘을 빼고 한결 자유롭게 유희하는 단계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작가가 자유로워진 만큼 인물들의 역동성은 강해졌다. 특정한 인물의 정신세계를 담아내는 초상화는 아니기에 인물들이 발산하는 기운이 강해진 만큼 손동현이 화론과 기법, 재료를 더 깊게 내재화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이제 작가의 상상력은 점점 더 치밀해져 하나의 무협물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단계에 이른다. 구름과 안개를 그리는 기법으로 채워진 인물인 〈Gray Mist〉(2016~2017)는 자객처럼 언제 어디에서 은밀하게 나타날지 모른다. 섬유질과 같은 표현으로 산을 그리는 준법들로 완성된 〈High Fiber〉(2017)는 마치 스파이더맨과 같은 능력의 소유자이다.

인물의 자세와 행동, 그가 들고 있는 사물과 입고 있는 의복 역시 모두 의인화된 존재가 함축하는 의미를 특정할 수 있는 기호로 기능한다. 재료와 기법에 대한 탐구도 한층 더 생생해졌다. 〈Inky Ink〉(2016~2017)에서는 중력의 작용을 이용해 먹의 물성을 극대화했고, 〈The Other Side〉(2017)에서는 뒷면에서 그리는 배채(背彩)가 가능한 한지의 투과성을 실험했다.

의습을 그리는 방법인 인물 18묘법(人物 十八描法)을 토대로 선으로만 완성한 〈Linear Line〉(2016~2017), 선을 최소화한 〈Broken Splash〉(2017), 평필(平筆)만을 사용한 〈Flat Flow〉(2016~2017)에서는 붓과 안료(먹) 사이의 관계에 집중했다. 붓을 사용하지 않고 탁본으로만 완성한 〈Heelballer〉(2016~2017)와 인주를 찍어서 만들어낸 〈Full Stop〉(2017)은 말 그대로 표현의 다양성을 보여주며 동양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허문다.

그런데 조금 달리 보면 〈Dot dot〉(2016~2017), 〈Linear Line〉, 〈Broken Splash〉는 각각 점, 선, 면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조형 요소를 통해 회화적 형식 실험을 시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을 반드시 동양화라는 틀 안에서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손동현의 작업은 회화이고 미술이다.


좌: 손동현, 〈Dot dot〉, 2016-2017, 지본수묵, 194 x 130 cm © 손동현
우: 손동현, 〈Flat Flow〉, 2016-2017, 지본수묵, 194 x 130 cm © 손동현

회화의 기본 요소에 움직임은 없기에 손동현의 작품들은 실재하는 물리적인 움직임을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손동현의 인물들은 움직임을 전달한다. 각각의 작품에는 작가가 협객, 슈퍼히어로, 이능력 배틀물의 등장 인물에게서 영감을 받아 표현한 행위의 순간이 그려졌다. 모두 강렬한 움직임 중에 있는 인물들이다. 일정 부분에서 작가의 전작인 대중문화 속 가상의 존재와 스타의 초상화는 완벽하고 안정적인 상태로 영원성을 획득한 듯 보였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작가는 움직임을 훼손하지 않고 붙잡았다. 작가가 그려낸 한순간의 이전과 이후를 상상해본다. 고요한 움직임은 더 강하다. 누군가에게는 정적(靜寂)과 같았던 동아시아의 회화에 역동성과 생명력을 부여하는 순간이다.
 
결과적으로 손동현에 의해 고전은 환기되었다. 그리고 재해석되었다. 긴 시간 동안 지속된 전통 위에 낯선 무언가를 덧입히고 결합해 전통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역설은 과거와 현재를 손잡게 한다. 손동현의 회화는 영원이라는 정지된 시간 속에 고이 보존되었던 동양화의 세계를 현대적으로 되살리는 데에 성공했다. 꿈처럼 여겨지던 막연함 속에 존재하던 동아시아 회화의 신화는 이제 동시대적 보편성을 향하게 되었다. 실재하지 않는 것 같지만 실재하는 무언가, 이룰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경지, 한 번쯤 도달해보고 싶은 이상. 손동현의 작업은 그처럼 아득하지만 아름다운 세계를 살아있는 현실로 끌고 들어온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