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그림을 보고 있는 누구든 그림 속의 주인공이 ‘마이클 잭슨’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팝의 제왕’이라는 거대한 타이틀을 얻으며 그가 대중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만큼, 그의 외모와 의상 같은 외형적 특징은 팝 음악사의 한 단면을 상징하는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이클 잭슨이 이미 영원한 잠에 들었을지라도, 우리는 그의 이미지를 어디서든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 한 장의 그림은 조금 다르다. 이 그림이 우리의 시선을 붙드는 이유는 우리 시대의 팝스타를 전통적인 동양화 기법으로 그린 데서 비롯된 어떤 낯섦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 임금의 영정에서 볼 수 있는 왕의 붉은색 어좌에 앉아 있는 미국의 팝가수, 더욱이 그림 한 쪽에 찍힌 낙관으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 그림이 먹으로 그려진 동양화라는 사실은 그림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부추긴다.


Portrait of the King (You Rock My World), 2008, Ink and Color on paper, 194 x 130 cm

전통 동양화 형식으로 대중문화 소재 담기

손동현은 2005년 작가로 본격 데뷔하자마자 현대 동양화의 영역을 넓힌 신예 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전통 동양화 기법을 따른 그의 그림은 그간 동양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었다. 영화 〈007〉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나 <스타워즈> 시리즈의 감초 로봇 캐릭터, 영화 <배트맨>의 배트맨과 악당 조커, 그리고 애니메이션 <슈렉>의 등장 캐릭터들을 전통적인 동양화의 초상화 방식으로 그린 것이다.

전통의 방식을 차용하는 이러한 시도는 단지 그리는 방식에만 머문 것이 아니었다. 각 작품의 제목 역시 독특했다. 이는 그림 속 주인공인 인물의 됨됨이를 축약하여 묘사하는 전통 초상화 방법론을 따르는 동시에, 프랑스를 발음상 ‘불란서’로 표기하고 발음하듯 외래어를 한자로 표기하던 옛 방식을 고려한 것이다. 즉 작가는 각 캐릭터 이름과 발음이 유사하고 그 뜻까지 고려한 한자로 음차(音借)한 제목을 달았다. 따라서 제임스 본드의 초상은 <영웅재임수본두선생상>으로, 배트맨의 초상은 <영웅배투만선생상>, <스타워즈> 시리즈의 캐릭터인 로봇 알투와 디투는 <인조인간알이두이시삼피오도>로, 애니메이션 <슈렉>의 주인공 슈렉과 동키를 그린 <막강이인조술액동기도> 등과 같은 제목을 붙였다. 이러한 제목들은 전통의 방식으로 현대적 소재를 담아내는 그의 작품 특유의 유쾌한 재치를 더욱 강조했다.


Portrait of the Hero, Mr. Batman, 2005, Ink and Color on Paper, 190 x 130 cm

손동현은 영화 속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소비문화 속의 다양한 소재들에도 주목했다. 흔히 접할 수 있는 상표나 로고의 형태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기능하는 현대 사회의 단면을 포착하고, 맥도날드, 버거킹, 스타벅스, 코카콜라 같은 서구의 유명 로고를 전통 문자도(文字圖) 형식으로 그린 것이다. ‘문자’도란 글자의 의미와 관계있는 고사나 설화 등의 내용을 대표하는 상징물을 자획(字畵) 속에 그려 넣어 서체를 구성하는 형식인데, 손동현은 이러한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가운데 각 로고와 브랜드를 상징하는 다양한 이미지들을 형태 안에 담았다. 예를 들어 <문자도-코카콜라>를 보면, 먹과 채색을 사용하여 ‘코카콜라(Cocacola)’ 로고 안에 TV 광고에 등장하는 모티프나 캔 음료를 연상시키는 자판기 등과 같은 다양한 상징물을 그려 넣었다.  

Munjado-Coca Cola, 2006, Ink and Color on paper, 130 x 320 cm (2pieces, Each 130 x 160 cm)

소재와 형식의 극명한 대비, 유머 넘치는 해학과 비판성

손동현의 작품은 미술계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많은 호응을 얻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의 친근함 덕분에 사람들은 한층 쉽고 빠르게 그의 작품에 공감하고 반응할 수 있었던 듯하다. 따라서 그는 점점 힘을 잃어가던 한국 동양화계에 새로운 흐름을 제시한 젊은 작가로 인정받았다. 지금 우리 삶을 잠식하고 있는 서구 문화의 단면들을 전통적인 동양화 방식으로 그린 점에서, ‘소재’와 ‘형식’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현 시대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젊은 작가의 유머 넘치는 해학성을 주시한 것이다. 반면 아쉬운 점도 있다. 각 소재들은 친근한 만큼 가벼운 느낌을 줬고, 따라서 그의 작품은 단순한 풍자적 시도이자 재치 넘치는 아이디어의 측면으로만 인식된 부분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 어느 인터뷰에서 손동현은 “김홍도가 현대에 온다면 무엇을 그렸을까?”라고 고민했음을 밝힌 적이 있다. 지금의 현실을 살고 있는 작가가 동양화를 전공하며 전통의 방식을 차분히 배워 가는 과정에서는 무수한 질문이 생겨났을 것이다. 100년 전의 화가들이 당시의 풍경과 현실을 특유의 미감으로 그려냈던 것처럼, 손동현 역시 전통의 뿌리를 이어가는 가운데 그가 살고 있는 지금 현실의 모습을 그림의 주요 소재로 반영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대중 문화 속 아이콘을 통해 그 시대를 살펴본다

시대에 대한 손동현의 진지한 고민과 태도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대표 시리즈로, 많은 이들은 마이클 잭슨의 초상화 연작인 <왕의 초상(Portrait of the King)> 시리즈를 꼽곤 한다. 2008년 갤러리2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작가는 ‘왕의 초상화’를 그려 선보였다. 그런데 그 왕은 조선시대 혹은 옛 유럽 중세시대의 왕이 아니라, 작가의 유년기를 지배했던 ‘팝의 왕’이었다. 작가는 마이클 잭슨이 첫 싱글을 발표했던 1971년 소년 시절부터 이미 ‘팝의 제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후 2003년 마지막 싱글을 발표하던 시기까지의 모습을 조선시대 임금의 영정 그림 형식으로 그렸다. 특히 각 시기별 마이클 잭슨의 외형적 특징과 제스추어뿐만 아니라 짐작되는 인물의 내면까지도 그림 속에 아우르기 위해서 방대한 자료 조사를 거쳤고, 그렇게 완성된 그림 중 15점을 시간의 흐름별로 갤러리 벽에 나란히 부착해 전시한 것이다.


Portrait of the King (Scream), 2008, Ink and Color on paper, 194 x 130 cm

이 시리즈는 손동현이 ‘팝의 제왕’이라는 마이클 잭슨의 별명에 착안하여, 그의 초상을 한국의 전통 ‘왕좌’와 연결시킨 것이다. 작가는 마이클 잭슨이 1989년 시상식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 로부터 ‘소울, 그리고 록, 팝의 제왕(The King of Pop, Rock and Soul)’이라는 칭송을 들었던 사건을 하나의 터닝포인트로 파악했다. 따라서 1989년 이후의 초상화는 왕을 상징하는 붉은 어좌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그 이전에는 태자가 사용하는 호피 깔린 의자에 앉아 화문석 바닥에 발을 올린 모습으로 그렸다. 어좌의 형식은 조선시대의 그림에서 차용했다.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가 이제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되어 버린 것처럼, 이 초상화 연작은 한 개인의 초상화가 아니라 팝 음악계를 장악했던 어느 인물의 변천사를 통해 추적하는 바로 ‘우리 시대의 초상화’라고 불릴 만하다. 작가의 꾸준한 조사에 의해 포착된 마이클 잭슨의 시대적 특징은 비단 한 개인의 역사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암시하고 있다. 검은 피부와 동그란 코 등 전형적인 흑인의 외모를 가진 소년의 얼굴이 백인우월주의의 현실 속에서 잦은 성형으로 점점 하얗고 어색하게 변해가는 장면, ‘팝의 제왕’으로 군림하며 현대의 대중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점점 더 권위적이고 제복처럼 변해 가는 그의 의상 등, 일렬로 배치된 그의 초상화는 마이클 잭슨이라는 가수가 보여 주고 있는 그 시절의 대중문화 속 다양한 ‘욕망’들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시대를 표상하는 새로운 동양화

2011년 개인전 《Villain》에서 선보인 영화 〈007〉 시리즈의 악역들을 그린 인물화 20여 점 역시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손동현은 영화 〈007〉 시리즈가 시작된 1962년부터 2002년 사이 약 40년 간의 작품 20편에 등장하는 주요 악역 캐릭터를 그림으로써, 시대마다 존재하는 ‘두려움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긴 시간 동안 지속된 한 편의 영화 시리즈 속에는 그 시대의 대중이 열광하거나 혹은 두려워하는 특징들이 자연스레 반영될 수밖에 없다.


007 Ernst Stavro Blofeld, 2011, Ink and Color on Paper, 162 x 130 cm

작가는 〈007〉 시리즈를 분석하면서 여러 가지 특징들을 포착했다. 냉전기 초기에는 악당 캐릭터에 사회주의 인민복을 연상시키는 복장이 일관되게 나타나다가 이후에 광기 어린 억만장자나 미디어 재벌 같은 유형으로 다양화된다는 사실, 그리고 흑인 마약왕, 북한군 같이 시대와 무관하게 인종과 문화에 대한 서구의 일관된 고정관념을 보여 주는 악당 캐릭터도 자주 등장한다는 점 역시 파악했다. 또한 작가는 이 악당들이 영화 속 ‘가상의 인물’일 지라도 그 인물의 내면과 외면을 연구하고 그대로 화폭에 담아내는 동양화의 ‘전신사조(傳神寫照)’ 기법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영화와 영화에 대한 다양한 평론글, 실제 배우의 특성 등을 면밀히 조사해 각 캐릭터에 대해 철저히 분석한 결과를 가지고 각 악당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이렇게 손동현의 그림은 그저 유명한 캐릭터나 사람들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다. 그 친근한 이미지 속에 담겨 있는 더 깊고 많은 이야기들, 그 시대와 문화, 그리고 이를 즐겨 온 대중들의 취향과 트렌드, 소비 문화와 욕망 모든 것들을 ‘표상’하고자 하는 것이다. 먹물의 색상은 그저 검정이 아니라, 실은 더 많은 각양각색의 색상을 품고 있다고 하던가. 그래서 깊이를 지닌다고 말이다. 그처럼 손동현의 그림도 그저 친근한 대중문화의 초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속에는 이렇게 ‘시대’를 향한 보다 많은 이야기와 고민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