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트로스에서
앵무새까지
배영환
작가의 작업에 새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2008년 개인전 《아주 럭셔리하고 궁상맞은 불면증》에
출품된 작품 〈걱정〉(2008)에는 깨진 병 조각으로 된 부엉이가, 작품
〈11 월〉에는 병 조각과 철사를 엮어 만든 여러 마리의 새가 출몰한 바 있다. 이름만으로 등장한 새도 있다. 〈알바트로스〉(2008) 다. 3-4m에 달하는 긴 날개 덕택에 활공만으로 수십
킬로미터를 나는 새 알바트로스는, 그 날개 때문에 이륙과 착륙 시 문제를 일으키고, 땅에서는 날개를 질질 끌고 다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한다. 이런
이유로 보들레르는 이 새를 일컬어 ‘하늘에서는 왕자였지만 땅에서는 비참한 신세’라고 말했다고 한다.
배영환의
알바트로스는 나무로 된 정사각형 새장 안에 든 대팻밥 무더기들이다. 그 대팻밥에는 그리 정확해 보이지
않는 눈금들이 그려있다. 이 대팻밥 무더기가 들어있는 새장의 나무 프레임에도 눈금이 있는데, 이로써 곧은 프레임에 그려진 눈금과 이리저리 구겨지고 마구 휘어지는 대팻밥 위의 눈금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만난다. 대팻밥의 눈금들은 깔끔하게 곧은 정사각형 프레임의 그것과 비교하면 부정확하고, 마구잡이이며, 불안정하다. 한마디로
비표준적이다. 표준과 척도를 암시하는 곧은 눈금과 제멋대로 그어진 비 표준적 눈금의 대조는 〈바보들의
배〉(2007)에도 등장했던 바 있다. 수심계처럼 눈금이
매겨진 나무 기둥들 사이에 모양이나 길이가 제각각인 합판조각들이 둥그렇게 뭉쳐 있었고, 그 아무렇게나
잘린 나무 파 편들 위에도 눈금이 그어져 있다. 이 작품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작업[바보들의 배]의
핵심적 요소는 버려진 나무 파편들에 자의 치수를 그려 넣고 다시 그것을 조각 형태로 조합한 것이다. 물론 ‘손으로 만든 자’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 부정확성은 정확성의 기준 그 근거에 대한 질문이 된다.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겠다.”1)
이제까지
배영환 작가의 작업은 “실업자나 노숙자에 대한 정밀한 사회적 통계로는 잡히지 않는”(박찬경) 존재, 세상이
요구하는 표준과 척도에 편입되지 못하는 외부적 존재, 한 마디로 비표준적 존재들에 주목해왔다. 사람들은 이를 ‘주변적인 삶’, ‘하위
문화적 스타일’, ‘하위 주체적 정체성’ 등으로 지칭하면서, 이 존재들의 비표준성 자체에서 항의와 저항의 가능 성을 읽어내려고 했다. 어떤
이는 “사회적 불화와 거기에 대한 개인적 저항의 예리하고도 통렬한 상징”2)을 읽고, 다른 이는 “사회의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떠맡고 있는 보편적 주체를 재현하려는 욕망”3)을 본다. 심상용 평론가에게도 대팻밥-알바트로스는 “어떤 종류의 약호화도 거부하는 시인의 본성적 태도”를 보여주는 존재였다. “이 운명적인 새는 야유투성이의 땅에 떨어진 채 그 푸석푸석하게 쌓여있는 제각각의 척도들로 변신해있다. 보들레르이기도 하고 배 영환이기도 한 그것은 활 쏘는 사람 – 이론화, 맥락 화하는 사람들 – 을 비웃는다. 우리 모두 에게 적용되는 표준이나 참고해야 할 평균치는 없다. 지침도
없고, 조바심을 낼 필요도 없다.”4) 적어도 이 시기에는
작가 자신도, 비 표준성 자체에서 이런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언뜻 보면 새장 안에 갇혀있는 듯한 대팻밥-알바트로스가 새장 프레임들
바깥으로 슬그머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무정형성과 비 표준적 불규칙성 덕분이었다. 작품 〈알바트로스〉는
새장의 척도에 갇힌 듯 갇혀있지 않은 비 표준적 존재의 탈주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새의
노래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통기타를 들고 유행가를 부르던 과거
‘하위문화 주체’ 들은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정규직이나 공무원이 되어 문화 상품화된 과거의
비표준성들을 향 수에 젖어 소비한다. 연예기획사의 연습생이 되기 위해서라면 성형과 단식도 마다치 않는
젊 은이들은 어떻게든 주류에 진입하기 위해, 오디션 프로그램의 비인간적 경쟁을 감내해야 할 통과의례처럼
받아들인다. 경제적 부를 이루는 데 성공한 창업가들이 사회의 멘토로 등장하 고, 모두가 그 모범에 따라 살아가려고 애쓴다. ‘글로벌화 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위협 앞에 서 기업, 정부, 공공기관은 물론 미술관 같은 문화n술 분야도 글로벌 표준화를 목표로
내걸 고 표준의 세계에 진입하기 위한 각축전을 벌인다. 한마디로, 표준과
척도가 그 외부를 철저 하게 소거시키며 사회를 지배해가고 있는 것이다.
설치작품
〈새들의 나라〉는 이처럼 훨씬 더 막강해진 표준과 척도의 세계에 대한 우화다. 〈알바트로스〉에서 두껍지
않던 새장의 나무 프레임은 어떤 힘과 압력에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굵은 메탈 횃대로 변했고, 희미하게
손으로 그어져 있던 눈금은 깊고 뚜렷하게 새 겨진 정밀한 치수가 되었다. 그 황금색 횃대 위에는 황금색
모자를 눈까지 내려쓴 거대한 앵무새가 올라앉아 있다. 그에게 새장 같은 건 더는 필요 없어 보인다. 횃대에 새겨진 척도를 자랑스럽게 내면화한 나머지 그로부터 달아날 생각 따위는 조금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올라앉은 척도의 필연성을, 표준적인 것의 미덕을
열을 올려 찬미하고 있는 듯하다. 당신이 누구이건, 어느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가건 표준의 척도를 습득해 야 한다고.
여기에 당신을 맞추지 못하면 당신은 그저 이 사회의 잉여,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할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경고하면서. 앵무새가 반복해대는 위협과 찬미의 노래 앞에서 대팻밥-알바트로스의 비표준성은 하찮고 우스꽝스러운 시대착오로, 어리석고 순진한
치기로 변한다.
앵무새는
지구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전 작품 〈불가능한 대화〉(2012)에서
지구는 엎드려 있는 듯한 책상의 엉덩이 쪽에, 마치 그 책상이 낳은 신생아 혹은 책상이 싸지른 배설
물처럼 놓여 있었다. 새로운 생명체로 자라날 수도, 배설물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채 말이다. 그런데 〈새의 노래〉에 등장하는 지구의는 굵은 금속 축으로
한가운데가 관통되고, 두꺼운 눈금이 새겨진 황금색 틀에 단단히 포박되어 있다. 강력한 척도와 표준으로 둘레가 감싸여 있어 이제 그로부터 빠져나온다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 지구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바위 덩어리처럼 각지고 울퉁불퉁한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교정기처럼 부착된 황금색 틀의 균일한 치수에 맞게 얼마 있으면 깔끔하고 표준적인
원형으로 훈육되어 버릴 것 같다.
매달린
핸드 마이크(〈작품제목 ###〉)에서는 점점 그 개체 수가 늘어나면서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앵무새들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세계 각국의 뉴스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알아듣지 못할 웅얼거림이다. 그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별 상관은 없다. 알랭 드 보통이 지적하 듯 “뉴스는 우리가 뉴스보다 더 중요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데 대한 이상적이고 자 못 심각한 변명”5)이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해 “초조함을 느끼고 스스로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질 때” 우리는 “새로운 것은 중요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즉각 가정”6)하고는 뉴스를 소비해댄다. 그런 뉴스들로
만들어진 앵무새의 노래는 결국 우리 자신의 초조와 불안을 잠재우려는 위약(僞藥)에 다름 아니다.
〈새의
노래〉에는 아직 축과 틀의 교정기가 채워져 있지 않은, 여전히 각지고 울퉁불퉁한 모양의 지구들이 남아있다. 작가는 우리가 탈주할 수 있는 어떤 ‘구멍’이, 이 표준과 척도의 세계의 ‘외부’가 아직은, 어딘가에 남아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추상동사-Can you remember?”
안소연은
배영환 작가의 ‘추상동사’를 “모든 물질성으로부터의 이탈시도”7)라고 평가한다. 추 상동사는 “‘누추함’ 또는 ‘손맛’으로 통칭하던 모든 조형성에의 노력을 버리고 허공 중에 흩어지는
행위와 소리만을 남겨둔 것이다. 이는 물질과 노동으로 도달하고자 했던 리얼리즘으로부터 거리를 둔 추상
세계로의 이행이라 할 수 있고, 적극적인 소통을 이루기 위한 풍부한 내러티브 대신 내면성과 침묵의 세계를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8) 가타오카 미미는 추상동사에 서 “공간
혹은 여백, 중심에 대비되는 주변의 보이지 않는 존재를 발견하고, 눈앞의
물체가 아닌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공기나 힘에 시선을 두는”9) 동양적 미학을 읽는다. 그리고는 작가의 작업이 “자기 성찰과 우주(세계)로 이어지는 광대한 공간을 중심과제로 재발 견하고 재조명하는
의식개혁”10)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배영환의
작업에서 모종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해 보이나, 그를 “물질에서
정 신까지”(안소연) 또는
“침묵으로부터 숭고로의 승화”(가타오카 마미)라는
말로 정신화, 내면화 시키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성급하다. 이
전환을 “현실과 직면하고 있는 과거의 관심 영역과의 결별이라기보다는 변증법적 합일을 이루기 위해 가려진
존재들, 즉 내면과 정신의 영역으로의 확장을 모색한 것으로 이해”11)하더라도, 적어도 ‘과거의 관심 영역’과 ‘내면과 정신의 영역으로의 확장’ 사이를 매개할 어떤 계기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추상동사’ 가 그런 전환의 계기를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배영환의 ‘추상동사’는 단순한 표현방식이 아니라, 그 자체가 우리 시대 운동과 행위, 움직임과 그 주체들에 대한 작가의
의식을 보여주는 메시지다.
2012년
처음 선보인 〈추상동사-댄스 포 고스트 댄스〉는 흰색 와이셔츠를 들고 춤추는 장면을 촬영한 후 무용수를
지워버린 영상이다. 그 결과 유령처럼 움직이는 와이셔츠 두 벌의 모습만 남았다. 이 흰색 와이셔츠는 87년 민주화 시위 때 도심거리를 메웠던 화이트
컬러를 떠올리게 한다. 이미 지겹도록 이야기된 알만한 이유들로 그때 그 주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지금은 전혀 다른 삶들을 살아간다. 이들에 대해 말하려면 우리는 ‘변절’, ‘제도권’, ‘타협’ 등의
단어를 들먹어야 한다. 배영환의 영상은 이 주체들을 지워버리고는 움직임만을 남겨놓았다. 운동과 행위, 움직임으로부터 그 주체를 없앰으로써 ‘누구’가 아니라 ‘무엇’, 곧 행 위와 움직임에 주목하게 하는 “추상동사”의 제스쳐는 복합적이다. 한편에는 행위와 운동의 주 체들에 대한 환멸과
불신이 작동한다. 이 점에서 작가 배영환은 ‘지배문화의 미적 구성 원리에 대항하는 하위주체’(백지숙)이건, ‘보편적인
주체로서의 노동계급’(서동진)이건 이런 종류의 주체들에게는
더는 어떤 기대를 걸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여기에는 그 환멸과 불신이 행위와
움직임까지 싸잡아 폐기하지는 않게 하려는, 그 운동과 행위, 움직임을
기억하고 재소환하려는 열망이 남아있다. 운동과 행위, 움직임이
다른 주체에 의해, 이전과는 달라진 존재들에 의해 환기되고 되살려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그 행위와 움직임은 과거의 주체들로부터 풀려나와야 한다.
과거의
주체들로부터 행위와 움직임을 해방시키려는 시도는 배영환 작가의 근래 ‘문 자’ 작업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14년 안양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설치된 〈사라져가는 문 자들의 정원〉이나 2015년 철원군 노동당사 앞에 설치된 〈빛의 사원〉에는 사라져
가는 문자들 로 둘러싸인 구조물이 등장한다. ‘사라져가는 문자들’은
읽을 수 없게 된 문자들이다. 읽을 수 없기에 그 문자들은 음성화되지 않고 보이는 대상으로만 남아있다. 음성이란 무엇인가를 발화하는 구체적인 주체에 의해 생겨난다. 음성이
소거된 문자는 발화의 주체가 지워진 문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문자화된 말은 음성이나 음색과
같은 말의 개별성을 없애고 말의 가능성을 보편화시킨다. 이제 이 문자들은 누군가에 의해서든 전혀 새로운
말로 실현될 수 있다. 이 점에서 문자화는 ‘추상동사’와 맥을 같이한다. 문자화가 말을 하는 음성과 소리를 없앰으로써 말을
주체로부터 떼어냈다면, ‘추상동사’는 행위와 움직임을 그
주체로부터 해방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문자들을 어떻게 소리 낼 것인지, 그 행위와 움직임을 어떻게 소환해 낼 것인지가 이제부터 새롭게 찾아지고 모색되어야 할 과제가 된다.
이번에
선보이는 영상작업 〈추상동사- Can you remember?〉는 움직임과 행위의 소 환과 기억을 중심
주제로 삼는다. 영상에는 서로 다른 색 깃털을 입은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무용수의 몸을 지워버렸으니 사실상 눈에 보이는 것은, 검은색 깃털과
오렌지 색 깃 털, 그리고 그 두 가지 색이 섞인 깃털의 동작과 움직임들이다. 이들은 리듬에 맞추어 홀로 움직이거나, 때로는 서로 마주보고, 어떤 때는 한 화면에 동시에 나와 춤을 추기도 한다. 작가는 이
영상을 제작하기 위해 여러 명의 무용수를 만나고, 수없이 리허설을 하고, 많은 장면을 찍고 또 다시 찍었다. 기존의 어떤 춤과 무용의 형식들로부터도
자유로운 움직임을 원했기 때 문이다. 작가가 원했던 것은 리듬에 따라 움직여 낼 수 있는 자유로운 춤, 자유자재의 춤이었 다. 하지만 이전까지 익숙해 있던 관습적 형식들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몸동작을 통해 기존의 춤과 무용의 형식들에서 자유로운
움직임을 구현해내려면 무용수는 이전까지의 습관적 자아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몸에서 새로운 움직임을 이끌어내야
한다.
배영환
작가의 이런 시도는 〈추상동사- Can you remember?〉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작가는 이미 영상의 제작과정에서부터 이전과는 다른 주체, 달라진
자아를 불러 내려했던 것이다. 새로운, 행위와 움직임의 주체는
어딘가 외부로부터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바로 그 행위와 움직임을 통해서만, 오로지 그 행위와 움직임 속에서만 소환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영상 속 검은 깃털 새와 오렌지 깃털 새의 관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 둘의 관계를 짐작해볼 수
있는 한 장면에서 검은 깃털 새와 오렌지 깃털 새는 어딘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움직임을 보인다. 오렌지
새는 검은 새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흘겨보며 그를 따라하려고 애쓴다. 자신의 리듬을 붙잡지도 못하고, 스스로의 움직임에서 자유롭지도 못한 채 검은 새의 몸동작을 흉내내려고 버둥거린다.
이
버둥거림이 여전히 흉내에만 머무르는 동안 오렌지 깃털 새는 〈새의 노래〉에 등장하는 앵무새를 닮았다. 무서운
속도로 세계를 지배해가는 표준과 척도에 적응하려 안간힘을 쓰면서 그에 대한 초조와 불안은 앵무새의 노래로 잠재우고 있는. 〈추상동사 Can you remember?〉는 그러나, 바로 이 버둥거림과 꿈틀거림 속에서, 오직 그 속에서만 만 년 동안
잠을 자고 있던 - 〈만 년 동안의 잠〉(2010) - 어떤
리듬에 대한 기억이 새로운 주체와 더불어 소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1)
인터뷰, 배영환 97-08, 132.
2)
찰스 에셔, 이유 없는 반항/이유
있는 패배자, 배영환 97-08,, 63.
3)
서동진, ‘상식적인 삶, 상식적인
미술가, 배영환 97-08,, 63. 92.
4)
심상용 ‘미묘한 반역 혹은 실존의 처방, 배영환의
세계읽기, 〈유행가〉에서 〈불면증〉에 이르기까지, 배 영환 97-08. 54.
5)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286.
6)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286.
7)
안소연, ‘물질에서 정신까지: ‘애린‘의 유행가를 부르는 수많은 방법’, 유행가- 엘리제를 위하여, 12.
8)
안소연, ‘물질에서 정신까지: ‘애린‘의 유행가를 부르는 수많은 방법’, 유행가- 엘리제를 위하여, 12.
9)
가타오카 마미, 말할 수 없는 심상 풍경: 침묵으로부터
숭고로의 승화, 유행가-엘리제를 위하여, 89
10)
가타오카 마미, 말할 수 없는 심상 풍경: 침묵으로부터
숭고로의 승화, 유행가-엘리제를 위하여, 92
11)
안소연, ‘물질에서 정신까지: ‘애린‘의 유행가를 부르는 수많은 방법’, 유행가- 엘리제를 위하여,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