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에 써니킴은 언제나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림은 여기도 저기도 아닌 아주
두꺼운 경계를 만들고 있었다. 그 곳은 땅이기도 바다이기도 했고 산 것이기도 죽은 것이기도 했으며 당신이기도
나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모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1980년대
초 한국의 경제성장과 급변하는 사회정치적 환경은 무수한 개인들에게 변화와 이동을 강요했고 써니킴은 그 중의 한 소녀였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을 꿈꾸던 한 소녀의 이룰 수 없었던 미래는 성인이 되어 돌아온 고국에서 ‘그리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2001년 나는 써니킴의 ‘Girls in Uniform’ 연작을 처음 만났고 교복을 입은
소녀들이 한 재미교포의 상실된 미래를 재현한다는 것 이상의 다른 무언가를 상상했던 것 같다. 그 때
나의 질문은 써니킴이 ‘무엇을 그리는가?’라기 보다는 써니킴은 ‘왜 그리는가?’에 가까웠다.
써니킴의
초기 그림에 등장하는 이미지들 – 소녀, 교복, 수학여행, 학교, 십장생, 산수화 등 – 은 얼핏 보면 역사 속에 구축된 관습, 가치, 규범, 제도, 전통과 같은 상징체계를 다루는 듯하다. 그러나 거기에서 탈락된 혹은
상실된, 불투명하고 어긋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숙한 이미지들은 보는 사람의 시선을 외면하고 저 바깥으로
이동하고는 했다. 써니킴의 그리는 과정에는 사진, 영화, 신문 스크랩, 잡지와 같은 재생산된 이미지들을 조합하는 시간과 이
이미지들을 기억과 망각, 사실과 허구, 과거와 현재, 성장과 죽음과 같은 알레고리로 구성하는 또 다른 시간의 축이 교차된다.
이러한
시각적 그리고 감각적 콜라주 과정을 지나면서 이미지들은 점차 심리적인 입체감을 획득하고 궁극에는 매우 수상한 장면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써니킴의 완벽하게 가공된 이미지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보고 있지만 볼 수 없는, 즉 ‘본다’는 행위 자체의
균열을 경험하게 한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얼굴 없는 몸이거나 몸만 남은 영혼 같았다. 소녀들은 그 소녀가 아니고 교복은 그 교복이 아니며 풍경은 그 풍경이 아닌 것이다. 써니킴의 그림은 어쩌면 논리 저편에 있는 불완전한 인식체계를 일깨우는 매개자일 뿐 그 어떠한 이미지도 재현하지
않으며 오히려 스스로 그 불안정함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나는 써니킴은 ‘왜 그리는가?’라는
질문을 시작할 수 있었다. 2012년과 2014년 사이 써니킴과
나는 두 개의 재연(Reenactment) 퍼포먼스를 만들었다. 써니킴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했던 그림 속의 소녀들을 실제 공간에서 눈으로 확인하고자 했던 〈Still Life〉와
그 소녀들이 바라보고 거닐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자 했던 〈Landscape〉는 써니킴의 그리는
과정이 캔버스가 아닌 삼차원의 공간에서 재연된 시간이기도 했다. 써니킴은 그림 속의 이미지를 실제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역사 속에서 상실된 개인의 정체성과 과거의 시간성을 현재로 소환하고자 했지만 궁극적으로 이들의 실체는 사라짐으로써 실존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현재에 침전된 과거의 기억을 반복 가능한 움직임과 살아있는 몸으로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열망과
그러나 결코 다다를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이 공존한다. 죽은 것을 살리는 것, 정지된 것을 움직이는 것, 그리고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는 것. 그녀의 이미지들은 세상의 언어로 읽혀지기를 거부하는 듯, 스스로
증발되기를 자청하는 듯, 그리고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 그 자체인 듯, 그렇게 부유하고 있었다.
그린다는
행위는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태초의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아무리 애써도 인간의 언어로
언어화될 수 없는 또 다른 언어이다. 써니킴의 그림이 무섭고도 슬프고 그리고 아름다운 이유는 아마도
말로 옮길 수 없었던 무수한 순간들이 우리의 눈 앞에 홀연히 등장하면서 온몸으로 우리를 관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그림이 무엇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태초의 무엇이기 때문이다. 써니킴은
왜 그리는가? 이 질문은 다시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리고
내 안에 무엇이 계속되는가? 그 인간의 조건을 상기하게 한다. 이러한
사유의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써니킴과 함께 할 아직 다다르지 못한 여정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 시간의 틈으로 들어온 올해의 작가상에 그녀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