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wyo Rhii, Love Your Depot, 2019 © MMCA

언젠가부터 세계는 고정성보다는 가변성을, 견고함보다는 유연함을, 정주보다는 이주의 경로를 따라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 온갖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것들이 범람하는 세계의 단면은 미술계 안에서도 꽤 선명한 편이다. 전 지구적 물류 시대에 로지스틱스의 선언처럼 “이동이냐 죽음이냐”1의 문제는 미술의 생산 방식에 있어서도 가시적 흐름으로 포착된다. 상품의 경로처럼 이동하지 않으면 죽는 시대에 예술이 처한 미학적 조건과 실천의 방향은 어떠한가? 순환하기 위해서 민첩히 움직이며 생산 활동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경제 가치에 부합하는 작업을 생산할 것인가? 혹은 이상적인 예술 환경이라 생각하는 전 지구적 순환, 바로 글로벌 공급 사슬을 희망하며 작업할 것인가? 노마딕한 궤도로 작업을 해온 이주요는 앞선 언급 중 마지막 사슬, 바로 글로벌 순환 회로에 있던 몇 안 되는 한국 작가 중 한 명이다.

90년대 후반 한국미술이 국제적 도약을 위해 스펙터클한 물질성과 정치사회적 조건에 주목할 때, 이주요는 일찌감치 이러한 입장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중심보다는 주변부, 예술보다는 일상, 완고함보다는 약함, 형태보다는 상황과 사적인 관계에 집중해왔다. 작가는 제도와 개인 사이의 어긋남, 환경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는 개인의 심리를 작업으로 포용하면서 불안한 현재와 유예된 미래에 맞서왔다. 오늘날 불확실한 정령이 세계를 지배해 버린 시점에 있어, 이주요의 작업을 다시 이곳으로 소환하는 일은 한 개인의 서사를 넘어선다. 이 영역은 예술 생태계 전반에 거쳐 미술 제도, 예술 생산의 조건을 검토하는 것과 연결된다. 그간 작가의 작업이 미술과 사회에 주어진 익숙한 규범에도 진지하게 반응 혹은 대응하며, 자신에게 들어맞지 않는 불편한 상황을 오브제 및 구조체의 형식으로 드러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로 자신의 일상과 장소에 기반을 둔 그녀의 작업은 전시로 마주하고 나면 매번 어디론가로 흩어져 버렸다. 그렇다고 작업이 전시 후 즉각 폐기되거나, 소멸하거나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임시적 구조의 작업은 카트에 실려 작가와 함께 세계 여러 도시를 떠돌기도 하고, 누군가의 살림살이에 잠시 맡겨진 채 낯선 장소와 타인의 삶을 배회하기도 했다. 그녀의 작업은 위기가 닥치면 금방이라도 해체 가능하도록 투박하게 제작이 되어, 오히려 변용의 가능성을 내포하면서 그 삶을 끈질기게 지속해왔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듯 작가의 오브제들은 자신의 몸체도 조금씩 변형하고, 배치 또한 변화하면서 나름의 생존 방법을 터득해 나갔다. 이때의 임시적 구조는 세계의 완고함과 고착된 제도에 대항하는 나름의 미시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멈추지 않는 이동과 임시적 상태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미래로 유예시켜왔다.

근 20년 간 작가의 활동은 한국, 미국,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 초국적 이동 경로 속에서 이뤄져 왔다. 그녀가 여러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열린 전시와 전시 사이의 궤적, 한 장소와 다른 장소 사이의 여정은 전시의 상황에도 고스란히 담긴다. 2006년 서울 사무소(SAMUSO)에서 가진 개인전 《이주요》는 암스테르담에서 2년간 한 작업들이 카트에 실린 채 이동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 바 있다. 한참이 지나 2013년에 열린 아트선재센터에서의 개인전에서는 2010년 이태원 작업실에서 시작된 개인전 《나이트 스튜디오》가 이후 네덜란드, 독일의 개인전을 거쳐 2013년 한국으로 돌아온 여정을 작업으로 트래킹 하듯 이동과 변형의 흔적을 담아낸다. 당시 개인전을 한 반 아베 미술관(Van Abbe museum)의 디렉터 찰스 에셔(Charles Esche)가 주목하듯,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 한 도시에서 또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불편한 상황에서도 이주요의 오브제들은 임시변통의 기지를 발휘하며 변화와 변용의 상황, 시공간의 흐름을 내밀한 목소리로 품어왔다.2 이주요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불확정적 구조체의 힘은 그 자신을 현실 속에서 적응하고 지탱하는 데만 있지 않다. 허약하다는 말은, 부서지기 쉽다는 말이 아니다. 그녀는 이동할 때마다 이전의 장소에서 지탱할 수 없는 삶의 흔적, 유예된 운명을 이끌고 그다음의 장소로 자신의 시간을 견고하게 이어 나갔다.

이후 이주요의 활동은 동료들과의 관계 속에서 친밀한 연대와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데 집중된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만 있지 않듯이 그녀는 타자와의 연대를 통해 소수화된 목소리를 모으고,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공동의 무대를 차츰 마련해 오고 있다. 이주요가 정지현과 함께 뉴욕, 광주, 서울, 런던을 이동하며 선보인 《도운 브레익스(Dawn Breaks)》(2015-2018)에서는 아예 자신의 작업을 영아티스트를 위한 무대로 열어두며, 2017년 남산예술센터에서의 공연 《십년만 부탁합니다》에서는 십 년 전 개인전 후 위탁자들에게 맡겨둔 오브제의 흩어진 스토리를 불러 모으기도 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현실에서 정주할 수 없는 사물(존재)의 살아 움직이는 영토이자 무대로 타인의 시간과 조우하기도 하면서 지속되어 왔다. 이주요가 십 년간 떠나보낸 오브제들에게 건넨 안부처럼, 나는 이 글을 통해 이동의 궤적 어딘가에 있을 그녀에게 외쳐본다. 컴백(Come Back)! 이 간절한 외침은 2000년 초 이주요가 한강에서 한 작업(〈한강에 누워〉, 2003-2006)을 떠올린 것이다. 과거의 헤어진 연인에게, 만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보낸 간곡한 메시지 마냥 그녀를 향해 외쳐본다. 그런데 온갖 임시적이고 일시적이며 휘발하는 것들이 넘쳐나는 이곳에 이주요를 다시 호명하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90년대 이미 전 지구적 순환 시스템을 예감한 선지자로서 혹은 불확실한 세계의 일면을 일찍이 시각언어로 구축해온 작가로서 명시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녀의 떠남과 돌아옴 사이에 남겨진 반짝이는 스토리, 혹은 글로벌 서사의 잔여물을 동시대 한국미술의 궤적으로 엮어내고 싶은 것일까?

이 막연한 소망은 작가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단순한 꿈에 불과했다. 2019년 이주요는 돌아 왔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다. 그녀가 떠날 때마다 삶을 연장해왔던 오브제들과 함께 돌아 왔다. 지탱해온 시간과 이동의 궤적을 대변하듯 오브제들은 국제 운송용 목재 크레이트에 담겨 비장한 모습이다. 4개의 크레이트는 뒤셀도르프, 런던, 뉴욕, 서울 어딘가에서 출발하여 각기 다른 로지스틱스에 의해 종착지인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장으로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게 운송된다. 이 더미들은 한 예술가의 전 생애가 담긴 예술 작품인 동시에 상품경제 시스템에서 유통될 수 없기에 잉여로서 남겨진 것들이다. 박스와 창고의 어둠 속에 갇혀, 유예된 생이 언젠가는 발굴되길 한없이 기다리는 절박한 운명에 처한 것들이기도 하다. 이 크레이트 박스의 어둠 속에는 전시라는 찬란한 쇼가 은폐하는 예술 작품의 진짜 현실이 숨겨져 있다. 작업을 지속한 만큼 거대해진 작가의 작품 더미 앞에서 과연 예술 작품의 현재적 삶이 어디에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박스가 열리길 기다리며 수년을 어둠 속에 갇힌 예술 작품이야말로 가장 리얼하지 않은가? 공급되지 않을 경우 창고에서 그 생을 연명할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인 세상이다. 이 상황조차도 불가능한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 후 무수히 폐기되어왔다.

이렇듯 현시점에서 이주요를 소환하는 작업은 동시대 미술 작가 생존 모델과 미술 제도, 글로벌 시스템의 양가적 관계를 추적하는 일과 같다. 오늘날 동시대 미술계를 구성하고 작동하는 핵심 시스템은 공급 사슬망에 있다. 상품과 자본의 순환 시스템에서는 수요/공급 모델이 이윤의 추구와 축적 하에 작동하지만, 공급과 수요가 서로 맞지 않는 미술계에서는 수요의 역할을 메우기 위해 공급 사슬망이 더 부지런히 움직이는 편이다. 최근에 미술 제도의 역할이 증대되고 다변화되는 것은 결국 이 사슬망을 유지하기 위한 요구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동시대 작가(다른 말로, 생산자, 창작자, 행위자)는 공급 중심의 순환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생산을 멈출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심지어 더 빨리 생산하고 민첩히 순환하기 위해 견고한 물질성을 포기해야만 하는 게 현실의 실정이다. 작가는 이를 모른 척하면서 자신의 작업을 묵묵히 해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주요는 여기서 잠시 그동안 해왔던 작업을 멈추고,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 작가, 그리고 당장 작품을 폐기할 수밖에 없는 젊은 조각가의 생존을 위해 냉철한 플랫폼 설계자가 되어 미술 생산의 조건과 한계에 맞서기로 자청한다.

그리하여 이주요가 마련한 《Love your depot》은 그간 창작에만 집중되어온 예술의 상상력을 대안 경제 시스템에 접목한 것으로, 예술 작품의 지속가능한 시스템과 인프라에 더불어 콘텐츠를 구상하고 실험하는 플랫폼이다. 4개월 간 미술관은 관람이라는 주어진 조건에서 벗어나 현실에서부터 방기된 예술 작품을 위한 ‘대안 플랫폼’이자 ‘살아있는 창고’로 변모된다. 이 창고는 컴컴한 어둠의 공간, 공급과 수요를 마냥 기다리며 방치된 공간이 아니다. 어둠을 뚫고 나와 그 자체로 있는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어 사람들을 맞이하고, 이와 관련한 이차적 활동과 콘텐츠로 소통하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창고이다. 작가는 이를 이번 전시만이 아니라 3년간의 작업으로 수행할 계획을 세움으로써, “Come Back!”의 외침을 일시적으로 수용하거나 우회하지 않고, 가장 현실적이고 용기 있는 응답으로 대응한다. 미술 제도와 생태계의 모순과 한계,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술가가 지켜내야만 하는 창작의 윤리와 환경을 재점검하고, 한시적으로 유예되어 온 운명에 맞설 대안 플랫폼을 함께 발명해보는 것이다. 이 ‘살아있는 창고’가 우리에게 엄습한 불안을 이겨낼 새로운 영토로서, 불확실한 현재를 지탱하고 미래의 시간을 함께 축적해나갈 수 있길 지지해 본다.


 
1. 데보라 코웬, 『로지스틱스』, 권범철 옮김, 갈무리, 2017 참조.
2. 찰스 에셔, 「남은 것은…… (사람과 사물의) 양가적 관계들」, 『이주요: 나이트 스튜디오』, 박상미∙이성희∙조셉 풍상 옮김, 사무소, 2013, pp101-113.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