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아카펠라’의
곤궁
이탈리아어로 ‘교회 형식으로’라는 뜻의 ‘아카펠라’(a cappella)란, 악기 반주 없이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이뤄지는
연주나 공연 형식을 지칭한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또는 교회를
매개로 중창과 합창 경험을 했던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거나 샤워실에서 별다른 자의식 없이 누구나 경험했을 이 음악형식은, 1990년대 보이즈 투 맨이라는 미국의 흑인 보컬 그룹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소수 음악 애호가들의 영역을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몇몇 우연한 계기를 통해 나 역시 아카펠라 그룹 활동을 하게 됐는데, 운 좋게도 1집 음반이 40만
장 가까이 팔리고 유학 가기 전까지 몇 장의 앨범을 더 내게 되면서 영미권에 ‘아카펠라 신(scene)’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다. 이때 접한 것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아카펠라 음악에 인공적인 효과를 얼마나 허용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아카펠라 자체가 악기 반주를 배제하는 것이므로, 지나치게 기계적인 음향효과를 덧붙인 그룹의 곡이나 앨범은 아카펠라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 논쟁은 곧 잊혔는데, 그것은 기계들을 배제하고서는 녹음 자체가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비인간적인 것을 철저히 삭제하고, 순수하게
사람의 목소리로만 이뤄진 노래만이 ‘진정한 아카펠라’라면
녹음은 이뤄져선 안 되며, 결과적으로 다른 지역과 나라, 대륙에
거주하는 이들의 노래는 현장에서가 아니면 들을 수 없다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엄밀히 말해 소리라는
현상 자체가 공기와 공간이라는 매체 혹은 매질 없이는 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문제의 논쟁은 처음부터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이는 「스타워즈」와 같은 영화에서 듣게 되는 박진감 넘치는 효과음들, 특히
공기가 전혀 없는 진공상태의 우주 공간에서 벌어지는 전투 장면의 소리가 원칙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소리란 매체와 본질적으로 분리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리를
만들고 궁극적으로 들리게 한다는 의미에서, 매체란 소리의 가능성의 조건 그 자체다. 이러한 인식의 잔향은 유학 시절 미국의 작은 교회에서 7년 넘게
이어간 성가대 지휘를 지나, 매체가 예술 일반과 갖는 관계에 대한 탐구로 꾸준히 이어졌다.
《올해의
작가상 2023》 수상자로 최종 결정된 권병준의 전시는,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이 오랜 기억의 타래를 고스란히 재소환해 줬다. 그것은 이번 전시와 그간의 그의 작업 전체가
크게 소리와 기계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작년부터 가속화된 AI의 광풍 속에서 익숙해진 목소리들을 떠올려보자. 브루노 마스가
부른 것처럼 들렸던 뉴진스의 「하입보이」나 BTS의 정국 목소리가 분명한 위켄드의 「스타보이」를 넘어, 아이유와 박명수가 부르지 않았음에도 누구나 그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만든 가수 비비의 히트곡인 「밤양갱」의
다양한 버전들 말이다. 이들은 인간이나 특정 개인에게만 고유한 것이라 간주되던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인공적인 것과 구분 불가능하게 뒤섞인 상황을 첨예하게 드러낸다.
매끄럽기보다는 투박하고, 자동화 보다는 수작업에 가까운 권병준의
작업은 이러한 최첨단의 ‘포스트 휴먼 (목)소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1 하지만
동시에 그의 작업은 ‘자연스러운 (목)소리’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예멘 난민이나 한국의 다문화 가정을 비롯한 이른바 ‘소수자’들에 지속적으로 보여온 관심이 강조되면서 역설적으로 간과되어온 지점이란 의미에서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가 로봇을 이러한 이질적 존재들의 소실점, 즉 “가장 낯선 이방인”으로 떠올렸고,
이번 전시에서 그것을 “인간 사회의 소수자이자 동반자”로
제시했다는 건 난민과 이주민들이 이질적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환기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난민과 이주민들이
말 그대로 ‘기계적’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기계적인 것은 이질적이지만, 이질적인 모든 것이 기계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때 우리는 권병준이 20년 넘게 섬세하게 세공하고 확장해온 구축물 전체를 ‘타자에 대한
포용’을 촉구하는 투박한 성명서만으로 성급하게 환원하게 된다.
이는
소리란 대개 ‘음악’과 혼동되지만 그보다 큰 범주며, 기계, 또는 자동기계 역시 대개
‘휴머노이드,’즉 인간의 형상과 기능에 기반한 로봇을 떠올려 주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 단순한 규정은 다분히 로봇의 형상 재현에만 집중된 전시에 대한 편향적 반응을
교정하고,2 권병준의 작업이 만들어온 폭넓은 공명을 포착하는 데 있어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로봇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소리
개념을 통해 되먹임 된 확장된 의미의 음악이 그의 작업 안에서 기계적인 것과 맺어온 내재적 관계를 적확하게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존 케이지의 「4분 33초」가
환기한 침묵, 혹은 ‘완벽한 침묵의 불가능성’이 좁은 의미의 음악을 넘어서는 사운드를 시사한 가장 유명한 사례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권병준의 작업에 관한 논의에서 보다 유의미한 것은 오히려 대표적인 미니멀리스트 작곡가이자—실험적 민족지 영화인 「코야니스카치」(1982)에서 「트루먼쇼」(1998)와 「디 아워스」(2000)와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거쳐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2013)에 이르는, 다채로운 영화의
음악을 맡은—영화음악가로도 잘 알려진 필립 글래스(1937–)의
회고일 것이다.
밥
딜런과 필립 글래스, 또는 권병준
줄리아드
음악원을 졸업하고 떠난 3년간의 파리 외유 직후인 1967 년, 글래스는 뉴욕으로 돌아온다. 이때 자신이 들었던 “가장 큰 것/사건”으로
그는 “필모어 이스트에서의 증폭된 소리”를 적시한다.3 당시 로큰롤 공연장으로 유명했던 필모어 이스트에서는 당대의 인기그룹인 제퍼슨
에어플레인이나 프랭크 자파의 음악들이 흘러나왔는데, “진동하며 스피커들의 벽에서 찢을 듯 터져 나오는, 높은 볼륨의 리듬에 이끌린 음악의 광경과 소리”가 그를 흠뻑 매료시켰던
것이다. 물론 로큰롤의 증폭된 사운드가 가져온 결정적인 분수령과 충격은, 이보다 2년 전인 1965년 7월, 뉴포트 페스티벌에 나타난 밥 딜런이 1964년산 전기기타인 선버스트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를 연주했을 때 이미 정점에 달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때 많은 팬들은 딜런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느꼈다. 앞서
두 번의 연이은 페스티벌 출연을 통해 다진 ‘포크 음악’의
선도자 이미지를 그가 내던졌다고 여긴 청중은 거친 야유와 욕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이러한 청중의 부정적 반응이, 포크 음악의 중핵이라 할 노래의 가사를 전기기타의 증폭된 사운드 때문에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4 포크 블루스
기타리스트이자 음악사학자인 엘라이자 월드는 이 사건을 미국의 1960년대를 둘로 쪼갠 분수령의 역할로까지
격상시킨다. 린든 존슨이 미국을 베트남전으로 밀어 넣고 “블랙파워”의 부상이 민권운동 내부의 백인 중심주의를 도드라지게 만들면서 1960년대
전반의 “공동체적 감정”이 내파된 상황에서, 그러한 감정적 공동체의 수장으로 동일시되던 딜런이 이를 압축적으로 거부하며 폭발시킨 셈이 됐다는 것이다.5 이는 기계적 사운드의 증폭이 클래식 애호가와 포크 음악팬들 각각에게 가져온 효과가, 음악의 핵심적 구성요소라 할 멜로디와 화성, 그리고 가사라는 요소의
파열을 넘어섰다는 것을 뜻한다.
가령
글래스의 초기작인 「5도 음악」이나 「유사한 움직임의 음악」은 그가 필모어 이스트를 바삐 드나들던 다음
해인 1968년 6월부터
12월 사이에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그의 다른 작업이 그렇듯, 이들은 대개 음정들 사이의 수학적 구조와 패턴, 특히 가산(addition)과 감산 (subtraction)이라는 차원에서 요약되곤
한다. 이러한 측면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글래스는 당시
이들이 선사한 “충격의 큰 부분은 소리의 증폭 그 자체”에서
왔다고 강조한다. 청아한 그랜드 피아노를 사용한 후대의 녹음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의아하겠지만, 글래스는 1960년대 말 당시 자신이 사용했던 “일렉트릭 피아노와 필요 이상으로 둔중한 붐박스 스피커 같은 당시의 기술 수준”이
이 곡들을 “그런지”(grunge)하게 만들었다고 인상적으로
회고한다.6 그런지? “더러운”(dirty) ‘시애틀 사운드’라 회자되던, 펑크록과 헤비메탈을 결합한 의 1990년대의 얼터너티브 록 말인가? 사운드가든, 펄 잼, 앨리스
인 체인스, 무엇보다 요절한 커트 코베인의 너바나 같은 전설적인 밴드들로 대표되는? 필립 글래스의 곡이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리트」처럼 연주됐다고 상상할 이들이 몇이나 될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커의 증폭장치를 통해 나온 기계적 사운드는
다시 글래스의 표현을 빌면 좁은 의미에서 규정되던 클래식 음악의 “문지방”, 혹은 “역치”(threshold)를
넘는 것이었다.7
“증폭
장치는 음악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했다”8고 반복적으로 강조하면서, 그는 이렇게 기계장치를 통해 증폭된 사운드를 사용하는 ‘록’이 클래식 음악계에서 ‘음악’으로
간주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여기에 록 음악의 단순한 베이스라인을 또 다른 ‘마이너스’ 요소로 덧붙이는데, 글래스는
이 단순함을 인도 음악과 병치시킴으로써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 형성 과정을 적극적으로 재규정한다. ‘음악가의
음악가’라 불리던 나디아 불랑제와 함께, 자신이 프랑스에
머물며 사사한 또 다른 거장인 라비 샹카르9를 통해 접한 인도 음악의 “격렬한 리듬”은 로큰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기이한 우회로를 통해 자신의 모국에서 뒤늦게 접한 “로큰롤은
내 음악의 형식적 모델이 되었고, 기계 장치라는 기술적 측면은 감정적 모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10라고 그는 요약한다. 이는 대개 ‘미니멀리즘’이라는 건조한 구조 놀음의 차원에서 요약, 또는 기각되곤 하는 그의 작업11뿐 아니라, 권병준의 작업을 보다 섬세하게 듣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발언이다.
사실 “록 음악은 그들을 지탱해 주는 매체의 힘 그 자체를 노래한다”라는
키틀러의 지적처럼12 로큰롤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기계적이고 전자적인 보철물(prosthesis)이다.
평소에 쓰던 안경을 깨거나 잃어버린 사람이 시각장애인과 다름없어지듯, 스피커를 찢을 듯
증폭된 기타의 디스토션과 볼륨을 잃고 멜로디와 코드로만 환원된 록 음악은 누군가에게 더 이상 록 음악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1971년, 이후 필립 글래스
앙상블과 글래스 영화음악의 사운드 엔지니어를 도맡게 될 커트 문카치를 영입한 글래스가 “가능한 한 크게, 하지만 디스토션 없이, 매우 깨끗하게” 소리를 재생하길 원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13 록에서
착안해 사운드의 볼륨을 클래식 음악의 임계점까지 밀어붙이면서도 디스토션을 제거했다는 건, 클래식 음악도
록도 아니라는 그럴듯한 비난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편으로 가령 잉베이 말름스틴의 ‘바로크 메탈’처럼 클래식 음악을 전기 기타로 연주하는 방식이, 이후 바네사 메이의 전자 바이올린을 거쳐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파헬벨의 캐논에 의해 손쉽게 대체되었듯, 단순한 형식주의나 악기를 물신화하는 함정에 빠질 것을 염두에 둔 행보라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기계적인 악기와 전자적인 사운드를 매개로 포크 음악과 클래식 음악의 위상과 형질 변형을 꾀한 딜런과 글래스의 궤적은 권병준의 작업에 관한 논의에도
적절한 접점을 제공한다. 그것은 이 시기가 콘서트홀이 아니라 미술관 갤러리에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사운드 아트’의 역사적 태동과 맞물린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14 다만 이 접점은 역사적 시차와 아이러니로 충만하다. 딜런에게 포크음악을 넘어 1960년대를 홍해처럼 가르게 한 전기기타와, 글래스에게 일종의 해방구로 다가왔던 록이 그사이 함부로 취급하거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유산을 가진 산업의 상징이자
장르가 되었다는 사실이, 권병준에게는 무거운 제약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자신은 “록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자기 색깔을 끝없이 유지하고자 하는 뮤지션”15이 아니었다는 자각은, 권병준의 음악 활동과 미술 신에서의 작업을 무비판적으로 연결하는 적지 않은 논의에서 대부분 간과된다.
그가
펑크 록과 모던 록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1990년대는 글래스가 인상적으로 환기한 ‘그런지 록’의 여파가 한국에까지 미친 시기였다. 하지만 이후의 음악적 실험은 그가 부딪힌 록 음악의 역사적 위상과 한계에 대한 첨예한 인식 속에서, 가령 디스토션이 걸린 기타 중심의 록에서 달파란과 함께 한 ‘미니멀
하우스 음악’으로 이행한다. 그렇게 「모조소년」(2004) 앨범으로 구체화된 시도조차, 궁극적으로 산업 안에서의 ‘음악’이라는 범주로 포섭될 수밖에 없다고 그는 간주했던 게 아닐까? 한국에서의 모든 활동을 접고 떠난 헤이그 왕립음악원에서 음향학(sonology)을
전공한 후, 그가 아티스트들을 위한 실험적 악기를 만드는 독특한 기관인 스타임(STEIM)에서 일했다는 사실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구체적으로 곱씹을
필요가 있다. 그의 작업은 록이건 악기이건 그것이 하나의 전통이자 유산으로 화석화되고, 좁은 의미의 ‘음악’에
복무하는 요소로 공고해지는 지점에 지속적으로 개입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우회와 표류
예를
들어 〈하이브리드 피아노›(2013)는 2011년 귀국한
후 2년 만에 만든 작업으로, 피아노처럼 보이지만 현악기
소리를 낸다. 이는 버려지고 풍화된 피아노를 스프링의 미세한 떨림을 통해 현을 발진시키는 방식으로 개조한
결과다. 이번 전시장 천장에 매달린 〈풍경 그리고 풍경›(2012)의
연장선에 놓인 작업으로, 진천의 종 박물관에서 가진 〈흐느끼는
종들›(2015) 퍼포먼스 역시 종을 때려 소리를 내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진동 소자를 이용해 종을
공진하게 만들어 소리를 만들어내는 시도였다. 이렇게 권병준의 악기들은 나름의 소리를 낸다. 하지만 이들은 더 이상 기타나 건반처럼 누구나 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자는 오랜 연습을 통해 체득한 피아니스트의 기술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고, 후자
역시 인간이 습득한 타종의 노하우를 일순간 증발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조금 더 나아가 보자. 〈타이베이를 위한 노래›(2016)는 실지로 ‘하이브리드 피아노’를 활용한 퍼포먼스 작업으로 타이베이 외곽산 중턱에
자리 잡은 전시공간에서 진행됐다. 자신이 개조한 피아노의 음색을 활용해 현장에서 작곡한 여덟 편의 곡을
권병준은 타이베이의 전경을 향해 한 시간 단위로 송출했다. 전시장 옥상에 위치한 두 개의 혼 스피커를
통해 재생된 이 음악들은 타악기와 현악기는 물론,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축 양자를 뒤섞으며 타이베이에
정향 되었다. 그런데 타이베이의 청중들은 정말 이 음악을 들었을까? 그는
연주할 수도 없는 악기로, 누가 듣는지도 모르는 소리를 송출하는 게 아닐까?
이렇게
보면 권병준의 작업은 지극히 관념적인 이상주의자의 백일몽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주어진
악기의 외면을 유지하는듯하면서도 타악기와 현악기 사이에서 진동하게 만들고, 각각에게 부여된 자리와 위상을
전치(displace)시키는 권병준의 개입은, 2차대전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상황주의자들’(Situationists)의
실천을 떠올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런던 지도를 펼쳐 놓고 지도 속의 길 안내를 따라 독일의 하르츠 지역을
돌아다녔다는 기 드보르의 한 친구처럼,16 그들은 오래된 영화에 엉뚱한
자막을 입히거나 교향곡을 그대로 둔 채 제목만 바꾸는 방식의 개입을 통해 현실을 재구성하려고 애썼다. ‘섹스
피스톨즈’의 매니저였던 맬컴 매클러렌은 펑크록이라는 장르의 시원에 자리 잡은 영국의 이 대표적 그룹이, 상황주의자들에 대한 자신의 연구 속에서 성장했다고 반복해 밝힌 바 있다.17 공교롭게도
펑크록에서 시작한 권병준의 작업들 또한 상황주의자들이 ‘표류’(dérive)와 ‘우회’(détournement)라 이름 붙인 개입의 방식과 절묘한
공명을 만든다.
이번
전시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 〈오묘한 진리의 숲›(2017–19) 시리즈를 떠올려보자. 2017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혁명은 TV로 방송되지 않는다》에서
처음 선보인 이 시리즈는, 서울시립미술관(〈예멘 난민의 노래›)과 교동도(〈교동도 소리풍경›)를
지나 〈다문화 가정의 자장가›에 이르기까지 네 번에 걸쳐 변주됐다. 〈예멘
난민의 노래›의 경우 평온한 미술관 주변의 풍경은 난민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향의 노래들과 엇갈렸고, 〈교동도 소리풍경›에서 들리는 대남/대북 방송 소리는 교동도의 아름다운 풍광의 주파수와 부딪히며 역사적인 맥노리 현상18을 남겼다. 눈에 보이는 풍경과 귀에 들리는 소리 중
어떤 것이 더 ‘현실적’인 것일까? 권병준의 소리 작업들은 둘 중 어느 하나를 특권화하지 않으면서 이 질문을 꾸준히 던진다.
이 시리즈는 2021년 부산시립미술관의 어린이 갤러리에서 열린 《네버랜드
사운드랜드: 권병준—소리산책》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이번 전시에서처럼 헤드폰을 쓴 관객과 청중들은 베트남과 중국,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필리핀의 언어로 불리는 자장가를 들을 수 있었다. 해당
국가 출신의 사람들이었다면 누구나 편안함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여기서도 관건은 자신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불리는 자장가가 자신에게 낯선 이국적 풍광 속에서도 ‘작동’하는가에
가깝다.
이렇게
이미지와 사운드가 헤드폰을 비롯한 일련의 기계를 매개로 서로를 ‘우회’하고
각자에게서 ‘표류’하는 작업 특성이, 과연 이번 전시장에서 오롯이 드러났느냐 질문하면 아쉽게도 긍정적으로 답하긴 어렵다. 헤드폰을 통해 듣는 청각적 감각은 그대로였을지 모르나 전작에서 현실, 혹은
자연적인 공간과의 엇갈림—또는 뒤에서 상술할 ‘이의 제기’—속에 놓였던 것들이 만드는 이질감이 미술관 갤러리의 어두운 아이보리색 공간에 감금되자 오히려 일반적인 의미의 ‘예술’로 작동한 듯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다분히 로봇에 집중된 전시공간과, 이에 치우친 관객들의 반응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닐까?
어둠을
돌보는 빛
그러므로
곧 다시 마주할 이 질문을 잠시 유예하고, 권병준의 로봇들에 주목해 보자.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이들은 곱씹을만한 몇 가지 흥미로운 특징들을 갖는다. 가장
인상적인 건 이들의 머리다. 그것은 한국에서 ‘랜턴’ 또는 ‘플래시 라이트’라
불리는 조명용 장치로 익숙한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로봇의 머리에 부가적으로 부착된 것이 아니라 머리
그 자체를 형성한다는 사실이다. 즉 이 로봇에서 조명은 얼굴이나 뇌를 대체하며, 말 그대로 ‘조명’ 이외에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은 없어 보인다.
이는
이 로봇의 움직임, 아니 ‘작동’ 자체가 ‘자동적’이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자신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결정하는 뇌, 또는
컴퓨터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의 작동이 자동적(autonomous)이지
않다는 것은 자율성(autonomy)이 없다는 것이며, ‘독립적’(independent)이기보다는 ‘의존적’(dependent)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에 의존하는
것일까? 일차적으로 사람에 의존한다. 빠르고 절묘하기는커녕
느리고 삐걱대지만, 이들의 투박한 움직임조차 전시장에 상주하는 인간 기사들의 돌봄의 산물인 것이다. 이렇게 사람에 의존하는 기계로서, 권병준의 로봇들은 자동적이기보다는
의존적이다. 이렇게 인간에 의존하는 기계들은 대개 ‘도구’나 ‘수단’의 역할을 수행한다.
자동차는 우리를 원하는 목적지로 데려다주고, 프린터는 필요한 서류를
인쇄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 의존하는 권병준의 기계들은 대체 어떤 목적을 갖고 작동하는 것일까? 이는 이 기계들이 어떤 의미의 ‘도구’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한데, 이에 답하는 건 쉽지 않다. 가령 ‘춤추는 사다리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데 쓰이는 사다리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 채 작동한다. 그들은 앞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해진 트랙을 왕복하거나 원형 트랙을 돌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의 정상적인 작동은 이미 오작동이며, ‘쓸모’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들이 ‘도구’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움직이는가? 이들이 ‘자율적’이지 않고 ‘의존적’이며, 뇌와 같은 컴퓨터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환기해 보자. 그때 이 질문은 이들이 아니라 인간, 즉 작가인 권병준에게 제기될
것이다. 이 쓸모없는 기계들을 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작동시키는 것일까? 그는 이들을 대체 왜 만들었을까? 자율적이지도 않고 도구도 아닌, 이들의 ‘존재 이유’(raison
d’être)는 과연 무엇일까?
바로
이 지점에서 그들의 머리가 ‘조명장치’라는 사실을 재소환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들의 머리는 조명장치일 뿐이다. 그것은 무엇을 비추는 것일까? 권병준에 의하면 이들은 다른 로봇들을
비춘다. 자신과 같은, 다른 로봇들. 그는 이 로봇들을 “반쪽짜리 존재”라
부르는데 그것은 이들이 ‘외팔이’이기 때문이고, 궁극적으로 이들이 조명을 통해 양팔을 가진 존재로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독해들은 대개 이 지점에서 ‘소수자’에 대한 관심으로 비약한다.
하지만 여기서 진정으로 흥미로운 건 문제의 완전함이 오로지 ‘그림자’로만 성취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제 말 그대로 “완전해 보인다.” 이는 그들의 완전함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실체’인 로봇의 궁극적 목적이
‘완벽한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라는 아이러니 자체다.
그들은
가령 ‘트랜스포머’처럼 실지로 ‘합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리 완벽하다 해도, 그것은 결국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 반문은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랜턴이
대개 어떤 비상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물품으로 간주된다는 자명한 사실을 곱씹지 않을 때만 제기되는 것이기도 하다.
주지하듯 문제가 되는 비상상황이란 대개 낮이 아닌 밤, 특히 인간의 일상생활을 가능케 하는
조명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을 가리키며, 비상용품으로서 랜턴이란 바로 이 상황에서 어둠을 몰아내는 데
쓰인다. 그러나 권병준의 랜턴은 어둠을 몰아내는 게 아니라 그림자를 만드는 데 쓰인다. 자신의 일반적인 ‘존재 이유’를
거꾸로 물구나무 세우는 것이다. 이를 ‘어둠을 돌보는 빛’이라 부르면 어떨까?
상황주의자의
미래
이는
연관된 또 다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로봇에게 빛과 어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오늘따라
얼굴이 어두워 보인다’는 표현이 찬사가 아니듯, ‘빛과 어둠’은 긍정과 부정의 대립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는 개념 쌍이다. 실지로
권병준은 자신의 작업에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는 지적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차원의 답을 제공하기도 했다. 작업에
등장하는 로봇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지치고, 어떤 형태로건 공동체를 만들어보려던 자신의 시도들이 실패한
산물이라는 것이다.19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그의 로봇들을 ‘소수자’라 이름 붙이려는 욕망을 납득할 수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권병준의 작업은 그러한 조급함보다는 신중함을 활성화한다.
최근작인
〈청주에서 키이우까지›(2022)는 바로 이런 측면에서 곱씹어 봐야 한다. 제목이 시사하듯 이 작업은 러시아의 침공으로 벌어진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을 배경으로 삼는다. 외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한 관심이 거의 사그라든 시점에서, 작가는
그러한 무관심이 한국 사회 자체에 팽배한 무관심과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고백한 바 있다. 전쟁을 떠올릴
수 있는 직접적인 소리 대신, 목재가 분쇄되거나 굉음이 일상화된 건설 현장의 소리를 채집하기로 그가
결심한 건 이런 맥락이다. 헤드폰을 쓴 관객이 창문과 유리가 빼곡한 건물에 가까이 가면 유리들이 깨져
쏟아져 내리거나, 바닥에 놓인 유리가 걸음에 맞춰 깨지는 듯한 소리가 매핑됐다. 물탱크 아래를 걸으면 물벼락을 맞는 듯한 이러한 소리들은 물론 가상적(virtual)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상성을 전쟁으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에 대한 단순한 상상이나 ‘공감 능력’의 문제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이보다
미묘하고 결정적인 사실은, 문제의 소리들이 청주와 키이우라는 실제 장소 양자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청주의 국립현대미술관 미술품수장센터 건물 유리는 깨지지 않았고 물탱크 또한 누수와는 거리가 멀며, 해당 소리들은 키이우의 실제 상황을 모사하고 있지도 않다. 청주에서
벌어질 가상의 재난을 통해서만 키이우의 재난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일까? 하지만 이러한 추정은 청주에서
벌어질 가상의 재난에, 서울이나 부산, 혹은 제주처럼 한국의
다른 지역에 있는 이들이 곧바로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불러들인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서로 다른 도시와 지역의 재난에 공감할까? 혹 상황주의자들의 ‘우회’와 ‘표류’는 그사이 지극히 역설적인 의미에서 이미 완수된 것은 아닐까? 런던
지도를 펼쳐 놓고 지도 속의 길 안내를 따라 독일의 하르츠 지역을 돌아다니던 드보르의 친구는, 서울에서
뉴욕이나 베를린의 부동산 지도를 펼쳐보는 테슬라 주주에 의해 대체된 것은 아닐까? 우리는 진정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미 속속들이 산산 조각나 있던 것은 아닐까?
헤테로토피아와
심리지리
프랑스의
영화감독이었던 로베르 브레송은 관습적인 영화, 즉 ‘시네마’와 그가 ‘시네마토그라프’라
부른 것을 구분하면서, 후자에서는 “어떤 소리가 어떤 영상을
구제하러 와서는 결코 안 되고, 어떤 영상이 어떤 소리를 구제하러 와서는 결코 안 된다”라고 적은 적이 있다.20 권병준의 이번
전시 전체가 이미지와 사운드 간의 이러한 분리 속에서 (오)작동한다는
건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강조되어야 한다.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수많은 로봇들은 사운드의 축을 담당하는
〈오묘한 진리의 숲› 시리즈와 철저히 분리된 채 작동했다. 천장에
매달린 〈풍경 그리고 풍경›은 이러한 유리를 더욱 강조할 뿐이다.
그의
이전 작업인 〈자명리 공명마을›(2019)은 이러한 분리가 시사하는 모종의 불안을 잠재우는데 가장 효과적일
듯한 작업이다. 작가가 특수 제작한 헤드폰은 물리적 거리에 따라 자신의 소리와 상대의 소리를 섞어주는데, 이때 관객은 서로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춤으로써 서로의 소리를 교환할 수 있다. 헤드폰이 개인을 타인과 융해시키기보다는 분리시킨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지극히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 작업은 동시에 이 아름다운 공명이 오로지 헤드폰을 매개로 해서 이뤄진다는
아이러니를 자명하게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 지점을 놓치면 안 된다.
돌이켜보면, 그가 작업의 주요 요소로 헤드폰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은 2017년부터다. 당시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이 전시는 사운드를 중심으로 구성됐는데, 열
팀 이상이 함께하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연기처럼 퍼지고 스미는 소리의 특성상, 각각의 소리가 공간의 경계를 넘어 누수하고 다른 작업을 방해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이런 곤란함을 우회하려는 목적에서 착안한 것이긴 했지만, 권병준의
작업에서 헤드폰이 수행하는 기능과 함의는 이후 점차 두터워지게 된다. 실지로 시인이자 건축가인 함성호는
권병준의 작업에 대한 인상적인 글에서 “권병준에게서 ‘장소
특정성’은 ‘비장소 특정성’
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그의 공간은 규정되지 않는다”라고
지적한 뒤, “장소를 지우는 헤드셋의 사운드는 권병준 작업의 가장 중요한 요소”21라고 단언한 바 있다. 이러한 평가는 흥미롭지만
동시에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헤드폰은 장소를 지우고 다시 쓰지 않던가?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착용한 채 큰소리로 웃고 떠드는 이들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권병준 헤드폰의 독특한 위치 인식 기능은 이점에서 흥미롭다.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GPS가 아니라 RTK(Real Time
Kinematics) 기술을 이용하며, 이를 통해 ‘헤테로토피아적인
사운드 아트’라 부를 수 있을 작동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들에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 부른 특성은 “다른 모든 공간에 대한 이의 제기”라는 점이었다.22 이런 의미에서 권병준의 헤드폰은 특정 장소에 관객이 가까이 가면 그 자리에
걸맞게 설치된 사운드가 작동하는 방식과, 헤드폰을 통해 장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식 모두와 구분된다. 장소를 이동하는 관객 개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면서도, 그 자율성
위에서 특정 장소 본래의 것이 아니라 그것과 차이화되고 “이의 제기”하는
사운드를 활성화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의 제기는 방대한 실제 공간으로 침투하며 확장되기도 했다. 대개 몇십 미터에 불과한 갤러리 공간이
아니라, 반경이 2–3킬로미터에 달하는 남산한옥마을과 홍성의
홍동저수지에서 진행된 〈유령극단, ‘심각한 밤을 보내리’›(2021/2022)는
상황주의자들이 ‘심리지리’(psychogeography)라
이름 붙인 방식을 본격적으로 떠올려주는 퍼포먼스 작업이다. 이번 전시의 주 전시장 공간을 느슨하게 채웠던
온갖 종류의 엉성한 로봇들을 작가는 이때 지역 여기저기에 풀어 놓았다. 함성호가 지적했듯 이들은 하나같이 “외팔이, 외눈이에다 술주정뱅이들”같은“싸구려 인조인간들”처럼 보였다. 혹자는
그의 초기 작업인 〈행복 찾는 나그네의 눈동자는 불타오르고›(2011)까지도 거슬러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주제가의 가사를 절취한 제목이 시사하듯, 이때 그가 작업의 주된
참조점으로 삼은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 자체가 영생을 누리는 행복을 찾아 나선 인조인간의
얘기였기 때문이다.
태초에
매개/기계가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권병준이 언제나 기계, 혹은 기계적인 것과 함께 해왔다는 사실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떠올릴 건 〈모든 것을 가진 작은 하나›(2010)다. 권병준이 자신의 본격적인 “첫 번째 단독 공연”이라 적시한 이 공연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을 준비한
바 있다.
새로운
악기가 주는 새로운 몸짓과 연주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누군가와 함께 무대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으로 소통하는 것에서 더없는 기쁨을 느끼는 자가
왜 기계와 함께 무대에 설 수밖에 없는지를 얘기하려고 한다.
권병준에게
기계는 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을까? 그는 “왜 기계와 함께
무대에 설 수밖에 없는지를 얘기하려고” 했을까? 일단 위에서
논의했듯, 그가 실험적인 펑크록에서 미니멀 하우스 음악에 이르는 폭넓은 장르의 음악에 몸담았던 뮤지션이었다는
사실을 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 신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 그는 공중파 음악방송에도 출연하며
한국 대중음악 신에서 활약했고, 연주와 작업 양자에서 기계는 본질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언플러그드 음악’이
있지 않았냐고 반문할 이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서두에서 환기한 ‘진정한
아카펠라’의 연장선에서, 이러한 반문은 ‘녹음된 언플러그드 연주를 과연 아날로그라 할 수 있느냐’라는 아이러니를
벗어날 수 없다.23 전 지구적 음악산업 자체가 스트리밍 중심으로 재편된
상황에서, 설혹 LP로 재생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수반하는
청취 경험에 부여되는 당대의 위상과 함의는 ‘디지털 인프라’와의
관계 속에서 상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을 깔끔하게 구분하려는 이러한 순진한 입장은, 권병준의 작업이 세밀하게 (오)작동시켜온
함의들과도 직결되기에 더욱 찬찬히 뜯어볼 필요가 있다.
이번
전시장에 입장한 관객들의 정면 허공에 배치되었던 〈풍경 그리고 풍경›을 떠올려보자. 이 작업은 16음계로 이뤄진 전통 악기인 ‘편경’(編磬)을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원격 조정될 뿐 아니라, 소리 자체가
전기적으로 변조된다. 원천은 아날로그임에 분명하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그렇지 않다. 이를 단순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합성 정도로 간주하는 게으름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글래스가 기계적으로 증폭, 또는 변조된 록 사운드와
단순한 베이스라인을 통해 클래식 음악을 내재적이고 구조적으로 변형하려 했다면, 권병준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기계적이고 전자적인 매개를 통해 이미지와 사운드, 디지털과 아날로그,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를 ‘우회’하고
서로에게서 ‘표류’하게 만든다.
가령 ‘랜턴’ 머리를 한 채 주 전시장을 활보하던 기계들 대부분과 전시장
오른쪽 구석에 놓인 〈6개의 마네킹›의 가장 큰 차이는 머리와
얼굴을 둘러싸고 진동한다. 축소된 크기의 전신 마네킹 인형들과 정상인 크기의 마네킹 두부(頭部)가 설치된 후자는 ‘휴머노이드’로, 인간의 형상을 도상적으로 모방한다. 물론 전자에서 머리 부분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령 곤충을 ‘머리-가슴-배’로 파악하거나, 실지로는 복부에 해당하는 문어 신체의 둥글게 부풀어
오른 부분을 인간의 입장에서 머리로 오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24 대개
머리, 더 정확하게는 얼굴이 인간이 참여하는 ‘인터페이스’의 가장 중요한 평면으로 인지된다는 점에서 이는 중요한 표지가 된다.
소위 ‘언캐니 밸리’ 현상이나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하는 SF 영화 「컨택트」(Arrival)를 환기해 보라. 실지로 권병준의 초기작 중 하나인 〈인터페이스›(2010)부터가
얼굴의 정체성, 더 정확하게는 얼굴과 (목)소리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의문시하는 작업이었다. 눈썹과 뺨에 자력
센서와 자석을 붙인 일곱 명의 남녀(‘dirty sound orchestra’)가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청중이 듣게 되는 소리는 개구리나 두꺼비,
또는 새소리에 가깝고, 그마저 전자적으로 변조된 것이다.
이 작업이 “우스꽝”스러웠던 것은 기계를 매개로
변조된 얼굴과 목소리 사이의 간극과 무관하지 않다.25
여기서
시사적인 건 〈이것이 나다›(2013)라는 그의 초기 퍼포먼스 작업이다. (목)소리 뿐 아니라 (비)인간의 얼굴이라는 요소에 동시에 천착했다는 의미에서, 이 작업은 이번
전시로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 그의 작업 전반의 문제의식이 구현된 대표적인 사례다. 의자에 앉은 작가의 휘파람으로 공연을 시작한 작가는 종이에 그려진 얼굴 드로잉을 카메라로 읽게 만들고, 안면인식 프로그램은 이 그림을 얼굴의 매핑을 위한 기초자료로 인식한다. 이후
하얀 분칠로 캔버스가 된 그의 얼굴에는 백남준과 조지 부시, 마릴린 먼로와 김구와 같은 유명인들의 얼굴이
투사되고, 이는 다시 그의 뒤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상영된다.
한편으로 이 퍼포먼스는 작가를 만나 “우리는 모두 낯선 자들입니다”(We are all strangers)라는 말을 전했던 크지슈토프 보디츠코의 프로젝션 작업을 떠올려준다. 다른 한편 그것은 내가 다른 곳에서 이미지와 사운드, 얼굴과 목소리
사이의 “기원적 간극”(originary gap)이라 규정했던 ‘페르/소나’의 개념을
따로 또 같이 체화한다.26 어떤 의미에서? 타자 이전에 우리 각자가 이러한 간극과 이질성으로 규정된다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는 혼자서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앉았다 일어서거나 명상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로봇들의 행위에도 고스란히 적용 가능하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율적인 존재가 아닌
한, 그들의 이 모든 행위가 말 그대로 우리, 즉 인간에게(만) 그렇게 보일 것이라는 역설적인 의미에서.
나가며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전시장 오른쪽 구석에 배치된 작업이다. 공간 배치상 대부분의 관객은 이를 주 전시장에
포진된 작업들을 보고 난 뒤에 보게 되는데, 이는 시적인 에세이의 초록(abstract)처럼 이번 전시를 요약함과 동시에, 그의 이전 작업들을
압축적으로 소환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공간에 들어갈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일련의 마네킹들이다. 그 위에 그들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거대한 손이 보인다. 인형
안에 인형이, 그 인형 안에 또 다른 인형이 들어가 있는 러시아 인형을 떠올려주는 형식이다. 이 광경을 또 다른 마네킹의 얼굴이 우리를 등진 채 지켜보며 이를 인간인 우리가 다시 바라보게 된다. 즉 네 겹의 레이어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전시장 안에서 작업을 보호해야 하는 안내요원 외에도, 우리는
천장에 설치된 CCTV 카메라의 응시 속에 항상적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작가의 작업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추론 자체가 그의 작업이 촉발한 메타적 시선의 산물이다. 물론
이러한 추론은 무한히 이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추론의 끝, 다시
말해 목적과 쓸모가 상정되기 때문이다.
전시장
카메라의 목적은 자명해 보인다. 작가의 작업을 보호한다는 것. 그렇다면
남는 건 마네킹들을 조종하는 손을 바라보는 마네킹과 우리일 것이다. 엄격한 사이버네틱스주의자라면 하인츠
폰 푀르스터가 “사이버네틱스의 사이버네틱스”라 불렀던 것, 즉 “우리는 우리의 관찰을 관찰해야만 하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설명을 설명해야만 한다”라는 공리를 환기할지 모른다.27 거기서 마네킹과 인간의 차이란 없다. 권병준도
이러한 입장을 따를까? 최소한 우리는 앞에서 이와 유사한 질문을 따라가 본 적이 있다. 거기서 랜턴 머리를 한 권병준의 불완전한 로봇들은 완전히 자율적이지도, 완전히
도구적이지도 않으면서 서로를 비추고, 이를 통해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그림자를 만든다는
것. 그것을 목적이라 부를 수 있다면 “어둠을 돌보는 빛”이야말로 이들의 ‘존재 이유’라는
것. 이것은 우리에게 빛일까 어둠일까? 이것을 따라가도 되는
것일까? 문제는 문자 그대로 어둠을 몰아내고, 어리석음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을 우리가 ‘계몽’(Aufklarung/Enlightenment)과 ‘각성’(Enleuchtung/Illumina tion)이라 규정한다는
데 있다. 이는 사다리의 역할 수행에 ‘실패’하는 권병준의 로봇들이 성장을 증진하고 개선에 기여하는 계몽주의적 프로그램과 어긋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이들의 실패가 우연적이지 않고 ‘반복’되도록 프로그래밍 됐다는 사실에 의해 다시 한번 강조된다.
가령 “더 낫게 실패하라”(Fail Better)라는 베케트의 유명한 말을
떠올려보자. 이를 여전히 ‘작년, 지난달, 어제보다 기록/성적이
좋아졌으니, 이제 목표가 코앞이다’라는 고루하고 건강한 상식의 ‘문학적 수사’로 여기는 만성적 습관은 이번 전시나 권병준의 작업을
근원적으로 포착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베케트가 환기하는 실패란 오히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준 자체를 의문에 붙이고, 그 자명성 자체를 근원적으로 재규정할 수 있는 역량을 포착할 수 있게 하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계기를 지칭한다. 주어진 가치판단의 잣대 자체를 재규정하게 강요한다는 급진적인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따라서 최선이 아니라 최악이며, 후자를 더욱 섬세하게 쪼개고 밀고 나아가는 것이 된다. 베케트 자신이 어쩌면 번역 불가능할 것이라 간주했던 아래의 문단, 즉
단 한 가닥의 머리카락을 잘게 채 썬듯한 아래의 미세한(hair-splitting) 문장 다발들이 “보다 나은 말이 없어서”(For lack of a better word)라는
관용구를 거꾸로 물구나무 세워 “[이]보다 나쁜 최악[의 옵션]이 없어서”(For
want of worser worst)라고 적확하게 쓰인 것처럼.
Less
best. No. Naught best. Best worse. No. Not best worse. Naught not best worse.
Less best worse. No. Least. Least best worst. Least never to be naught. Never
to naught be brought. Never by naught be nulled. Unnullable least. Say that
best worst. With leastening words say least best worst. For want of worser
worst. Unlessenable least best worse.28
웃음이란
유연하게 ‘살아있는 생명’(elan vital)이 기계적
경직성에 사로잡힐 때, 거기서 벗어나라는 일종의 ‘경고’로 주어진다는 베르그송의 주장은 잘 알려져 있다.29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권병준의 로봇들이 반복하는 ‘기계적 실패’는 이런 역설적인 의미에서 ‘모범적인 실패’(exemplary failure)에 가깝다. 권병준의 ‘어둠을 돌보는 빛’이 우리에게 길잡이가 된다면, 그것은 이 시대에 빛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의 눈을 멀게 할 정도로
경합하는 수많은 빛들 때문에 이전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워 보이는 이 시대에, 그것이 실패와 어둠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로봇은 저만의 악기이고 음악을 확장하고 움직임을 탐구하는 과정을 하나의
연주로 생각해 주면 좋을 것 같다”30라는 “확장된
음악”(expanded music)에 대한 그의 당부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더욱 섬세하게 귀 기울여야만 한다.
1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다음을 참조하라. 곽영빈, 「레플리컨트와 홀로그램, AI의
(목)소리들」, 『블레이드 러너 깊이 읽기』, 임태훈 외 지음(서울: 프시케의
숲, 2021), 183–204.
2
권병준의 《올해의 작가상 2023》 수상을 전한 언론 보도 대부분은 ‘로봇’에 집중됐다. 「‘로봇 작가’ 권병준,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3’ 수상」,
『SBS』, 2024년 2월 8일 자. 「로봇
퍼포먼스 권병준,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받는다」, 『한국일보』, 2024년 2월 8일 자. 「전시장서
춤추는 ‘로봇 종합극’… “이방인과 더불어 살 미래 그려”」, 『문화일보』, 2024년 2월 14일 자. 「쇠파이프
다리에 사람 얼굴… 백남준의 ‘로봇 K’를 잇다: 권병준 작가 ‘올해의
작가상’ 전시」, 『한겨레』, 2024년 3월 21일
자.
3
Philip Glass, Words without Music: A Memoir (New Y ork : Liveright
Publishing Company, 2015), 229. 필립 글래스, 『음악 없는 말』, 이석호 옮김(서울: 프란츠, 2017), 332. 번역 수정.
4
“그들이 뭐라고 노래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도끼가 있었다면 [기타와 스피커를 전원과 연결하는] 케이블을 잘라버렸을 겁니다.” 브래드 톨린스키·앨런 디 퍼나,
『굉음의 혁명: 일렉트릭기타로 바라본 대중음악 100년의
이야기』, 장호연 옮김(서울: 뮤직트리, 2019), 258. 이 책의 원본은 다음 책이다. Brad Tolinski and Alan Di Perna, Play It Loud: An Epic
History of the Style, Sound, & Revolution of the Electric Guitar, foreword
by Carlos Santana (New York: Doubleday, 2016). 문제의 라이브 영상은 1963년부터 65년까지 3년
동안 이어진 딜런의 뉴포트 페스티벌 공연을 담은 다큐멘터리인 「거울의 이면」(The Other Side of
the Mirror, 2007)에 담겼고,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PfsUlFxhrI.
5
전기 기타를 쓰기로 한 결정이 공연 전날에야 내려졌다는 점에서, 월드는 딜런이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계획했다고 보진 않는다. 하지만 밝고 친근한 태도로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이전까지의
태도와 달리, 이날 아무런 멘트 없이 세 곡만 연주하고 무대를 내려간 그의 태도는 ‘포크음악의 영웅’인 그에게서 혼란에 빠진 시대에 대한 “해답을 구하던” 관객들에 대한 에두른 응답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50 Y ears Ago, Bob Dylan Electrified A Decade With One Concert,”
NPR, July 25, 2015; Elijah Wald, Dylan Goes Electric!: Newport, Seeger,
Dylan, and the Night that Split the Sixties (New York: Dey Stree Books,
2015). ‘펑크 포크’(punk folk)라 규정되기도 하는 이 사건은, 이런 의미에서 펑크록 밴드 삐삐롱스타킹의 보컬이었던 권병준이 1997년 9월 공중파 방송 중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던 사건을 떠올려 주기도 한다. 방송
출연정지와 함께 대중의 엄청난 비난을 불러온 이 해프닝은 록이라는 음악형식과 산업에 대한 그의 증대하는 이질감을 넘어, 어쩌면 몇 달 후 IMF라는 파국으로 정식화될 역사적 흐름에 대한
때 이른 ‘신경감응’(innervation)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벤야민이 기술적 매체와의 관계 속에서 세공하려 했던 이 개념은 대개 감당하기 힘든, 양립 불가능한 정신적 흥분이 신체적인(somatic) 무엇으로 번역되는, 에너지의 이송을 뜻하는 프로이트의 개념에 토대를 둔다. 벤야민은
영화와 사진에만 집중했지만, 이 논의는 음악과의 관계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다음을 참고하라. Matthew Charles, “Secret Signals
from Another World: Walter Benjamin’s Theory of Innervation,” New German
Critique 45, no. 3 (2018): 39–72; Miriam Hansen, Cinema and Experience:
Siegfried Kracauer, Walter Benjamin, and Theodor W. Adorno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2), 132–147.
6
Glass, Words without Music, 240. 글래스, 『음악 없는 말』, 345.
7
원문의 “threshold experience”를 한국어 번역본은 “음악의 문지방”으로 옮겼는데,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A] major part of the impact of the music
comes through the amplification itself, which raises the threshold experience
to a higher level,” ibid., 230. 같은 책, 333.
8
ibid., 240. 같은 책, 345.
9
본명은 라빈드라 샹카르 초두리(1920–2012)이다. 인도의 전통악기인 시타르(Sitar) 연주의 대가로, 2차대전 후 특히 비틀스의 멤버인 조지 해리슨과 바이올린 연주자인 예후디 메뉴인을 아우르는 서구의 대중음악과
클래식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0
ibid., 229. 같은 책, 332.
11
탁월한 피아니스트이자, 최근 한국어로도 번역된 현대의 고전인 『고전적 양식: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언어』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음악학자 찰스 로젠은, 케이지와 글래스의 작업을 고전음악의 음계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의미와 기능을 벗겨낸 몇몇 “고전적 공식”을 “중립적인 음악적 ‘표면’”(neutral
musical ‘surface’) 위에 얹은 것에 불과하다고 요약한 바 있다. 이는 “흥미로운 계기”이긴 하나 “헐벗은
음악”이라고 그는 일축한다. Charles Rosen and
Catherine Temerson, The Joy of Playing, the Joy of Thinking: Conversations
about Art and Performance, trans. Catherine Zerner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20), 57–58.
12
Friedrich Kittler, Grammophon, Film, Typewriter (Berlin: Brinkmann
& Bose Verlag, 1986), 107. Friedrich Kittler, Gramophone, Film,
Typewriter, trans. Geoff Winthrop- Y oung and Michael Wutz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111. 프리드리히 키틀러, 『축음기, 영화기, 타자기』, 유현주·김남시 옮김(서울: 문학과
지성사, 2019), 206.
13
“가능한 한 크게, 하지만 디스토션 없이, 매우
깨끗하게”(to reproduce as loud as possible, but very cleanly,
without distortion)라는 표현은 문카치의 것이다. David Allen
Chapman, “Collaboration Presence, and Community: The Philip Glass Ensemble in
Downtown New York, 1966–1976,” University of Washington in St. Louis, PhD
thesis (2013), 92에서 재인용. ‘디스토션 없는 굉음’에 대한 글래스의 매혹은, 이후 하드록과 헤비메탈이 극대화한 기계적
소리의 질감과 거대한 볼륨이 “진정한 로큰롤”(authentic
rock and roll)이란 “본질적으로 남성적인 형식의 음악”이라는 신화를 강화하게 된 경향과 비교할 때에도 흥미로운 접점을 제공한다.
cf. Christopher R. Martin, “The Naturalized Gender Order Of Rock and
Roll,” Journal of Communication Inquiry 19, no. 1(Spring 1995), 71;
Simon Frith and Angela McRobbie, “Rock and Sexuality,” in S. Frith and A.
Goodwin(eds.), On Record (New York: Pantheon, 1990), 371–389.
14
사운드 아트 연구자인 케일럽 켈리는 1969년을 북미와 유럽의 사운드 아트가
갤러리를 통해 전경화된 분수령으로 간주하는데, 글래스와 스티브 라이히가 핵심 구성원으로 참여한 휘트니
미술관에서의 《반-환영: 절차들/재료들》(Anti-Illusion: Procedures/Materials,
1969. 5. 19.–7.6.) 전시를 그 모범적 사례로 든다. Caleb
Kelly, Gallery Sound (New York: Bloomsbury, 2017), 특히 111–123.
15
“Kwon Byungjun | Artist Interview | MMCA Cheongju Project 2022: Urban
Resonance,” 국립현대미술관 MMCA, 2022년 10월 7일,
https://www.youtube.com/watch?v=7jVf_gTwvCc(2024년 2월 7일 접속).
16
Kenneth Goldsmith, Uncreative Writing: Managing Language in the Digital
Age (New Y 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1), 37. 케네스
골드스미스, 『문예비창작: 디지털 환경에서 언어 다루기』, 길예경 외 옮김(서울: 워크룸
프레스, 2023), 70.
17
“Sex pistols, the invention of punk,” France 24 April 16, 2010; Fergal Kinney,
“Did Punk Start as a Situationist Stunt?,” Jacobin, May 3, 2023,
https://jacobin.com/2023/05/did-punk-start-as-a-situationist-stunt;ibid., 39. 같은
책, 74.
18
비슷한 진동수의 두 소리가 겹쳐 들릴 때 주기적으로 진폭이 커졌다가 작아졌다 하는 파동 현상을 지칭한다.
19
“Kwon Byungjun | Artist Interview | MMCA Cheongju Project 2022: Urban
Resonance,” MMCA 2022년 10월 7일,
https://www.youtube.com/watch?v=7jVf_gTwvCc.
20
로베르 브레송, 『시네마토그라프를 위한 노트』,
이윤영 옮김(서울: 문학과 지성사, 2019), 54. 동시대의 중요한 사운드 아티스트인 김준의 개인전에 붙인 서문에서 인용한 이 문장은, 사운드 아트의 핵심 공리라 해도 손색이 없다. 김서량과 함께, 그는 권병준이 〈청주에서 키이우까지›를 선보인 2022년 청주 전시에 참여한 나머지 두명의 사운드 아티스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독일의 1세대 사운드 아티스르로
잘 알려진 크리스티나 쿠비슈(Christina Kubisch)를 사사한 김영섭이나 김준보다 먼저 사운드
아트로 송은미술대상을 수상했던 김영은, 노이즈와 음악의 관계에 천착해온 류한길, 침묵과 음악의 관계에 주목해온 서소형 등 흥미로운 동시대 한국의 사운드 아트 작가들이 많지만, 시간과 분량의 제한상 권병준이 이들과 동시대 사운드 아트 지형에서 맺는 관계에 대한 폭넓은 논의는 다음 기회로
넘긴다. 그중 일부로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곽영빈, 「시네마 이후의 페르/소나, 혹은 ‘가면과 묵시의 논리’ 너머의 소리기반예술: 김준 작가론」, 『김준: 템페스트 JOON KIM: TEMPEST』, 전시 도록(서울: 송은, 2022),
32–38. 곽영빈, 「(목)소리와 이미지의 비대칭성을 (안)보여주고 (안)들려주기: 서소형
론」(2022).
21
함성호, 「존재를 넘어서—알 수 없는
장소와 이름 없는 시간들: 《유령극단 “심각한 밤을 보내리”—홍동저수지, 2022》를 중심으로」,
https://drive.google.com/file/d/1gPQGVcmeV0dfIDagsJLhQLiYTopFtNX4/view.
22
미셀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14), 24.
23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Benjamin Peters, “Digital,”
in Digital Keywords: A Vocabulary of Information Society and
Culture(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6), esp. 101.
24
문어의 머리는 몸통과 다리를 연결하는 작은 부분으로 실지로는 다리와 배 사이에 있다.
25
“Inter-FACE by Byungjun Kwon[STEIM] & The Dirty Electronics Ensemble,” PACE
Studio 1, DeMontfort University, Leicester, 20th Jan 2010,
http://www.youtube.com/watch?v=SrNjNlaPg48.
26
곽영빈, 「페르/소나로서의 역사에
대한 반복강박—임흥순과 오디오-비주얼 이미지」, 『한국예술연구』 21호(2018):
197–222.
27
Heinz von Foerster, “Cybernetics of Cybernetics,” in Understanding
Understanding: Essays on Cybernetics and Cognition (New York: Springer,
2003), 285–286.
28
Samuel Beckett, Nohow On: Company, Ill Seen Ill Said, and Worstward
Ho(London: John Calder, 1989), 118.
29
앙리 베르그송, 『웃음—희극성의 의미에
관한 시론』, 정연복 옮김(파주: 세계사, 1992).
30
「전시장서 춤추는 ‘로봇 종합극’… “이방인과
더불어 살 미래 그려”」, 『문화일보』, 2024년 2월 14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