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하고 단정한
그의 작품은 낭만적이다. 그가
세상에 둘도 없이 낭만적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가 오랜 시간 작가의 마음을 잃지 않고 미술, 음악, 대중문화와 언더그라운드를 망라한 신에 새긴 대체 불가능한
흔적을 목격해 왔다. 내가 그를 통해 본 작가의 마음이란 냉소로 흐트러지지 않는 견고함과 단정함, 무엇보다 필연적인 실패를 직감하면서도 이제 막 세계를 알기 시작한 것처럼 세계를 바라보기를 멈추지 않는 인내의
마음가짐이다. 이런 그의 작업은 낭만적이고 다정하다. 그를
설명하기 위한 서투른 말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일 것이다. 나는 그의 작업이 지닌 진지함, 미세함, 잘 억제된 슬픔을 낭만이라는 좁은 단어에 눌러 담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며, 그럼에도 낭만이 아닌 말로 그것을 달리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엇을 ‘낭만적’이라
부르는 수사는 부드럽게 고양된 감정의 표현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엔 오히려 서늘하고 거친 면이
있다. 그의 전시는 전형적인 형식 뒤에 안전하게 숨어 하고 싶은 말을 에두르지 않는다. 그가 공연하는 사물과 장면은 단번에 아름다운 기시감을 자아내기보다 어딘가 위태로운 몸짓과 작용을 결집하고 그들의
취약함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 위태로움과 취약함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로봇을 ‘싸구려 인조인간’이라 부른 근원의 정서다. 이러한 면모는 우리가 흔히 기술이나 기계에 기대하는 바가 아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미래주의자와 복고주의자 모두를 실망시키면서, 무결한 도달점이 사라진 기술이 균질한 힘으로
작용하는 방식을 살피는 엔지니어다.
인간들
그의 ‘싸구려’ 로봇이 가진 영감의 토대는 어디일까? 나는 내 어린 시절을 지배한
몇 편의 영상 작품을 떠올린다. 「천공의 성 라퓨타」(Laputa:
Castle in the Sky, 1996)에서 주인공 시타는 제국의 요원에게 이끌려 하늘에서 떨어진 기계 병사를 목격한다. 둘은 같은 곳에서 지상으로 추락했다. 인간을 대신하려 창조된 기계
병사는 그에 걸맞은 긴 팔을 가졌고 얼굴에 난 구멍으로 파괴적인 광선을 쏜다. 그러나 인간의 명령이
실전된 후에 그들은 자연의 일부처럼 풍화되어 무의미에 가까운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기계 병사들이 발견한
새로운 사명은 불상의 무덤을 돌보며 헌화하거나 들짐승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시타가 기계 병사를 대면하며
느낀 첫 감정은 이질성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추락으로 반파된 사물에 대한 연민이다. 기계 병사는 시타를
보호하기 위해 인간 군대와 일전을 벌이는데 기계의 압도적인 폭력에도 불구하고 로봇은 인간보다 인간성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다음 장면은 「은하철도 999」(Galaxy
Express 999, 1977~1979)의 기계 인간들이다. 마츠모토 레이지(松本零士, Matsumoto Leiji, 1938~2023)의 세계관에서
기계 인간이 되려는 욕망은 작품의 서사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동기다. 이 욕망은 인간과 기계 인간의
갈등 속에 증폭되거나 좌절되고 공교롭게도 다른 기계 인간의 조력 속에 실행되거나 극복된다. 기계 인간은
인간의 신체에 기계를 이식하거나 반대로 인간의 정신을 기계에 이식한 하이브리드 로봇이다. 이들은 반영구적인
수명을 얻어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그려지는데, 일면의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신의 인간성을 진전시키는
거의 유일한 방법으로 간주된다. 기계와의 혼종을 택한 주인공 쿠사나기를 이전과 다른 ‘망’의 세계로 추락시키는 오시이 마모루(押井守, Oshii Mamoru, 1951~ )의 연출―「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 1995)―이나
그에 앞서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 Tezuka Osamu,
1928~1989)가 기계와 인간의 교차점에서 그린 세계관―「우주소년 아톰」(Mighty Atom, 1952~1968)―은 비슷한 발상의 범위에 있는 대중문화적 토대다. 요컨대 인간의 타고난 순혈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일종의 혼합물 또는 부산물에 가까워짐으로써 역설적으로 더 근본의
속성을 취득한다고 보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심령이나 정령보다 로봇을 관용적으로 의인화한다는 점은 20세기 동아시아의 대중문화가 내포한 흥미로운 태도다. 태생적으로
서브컬처의 맥락을 가진 현대 동아시아 대중문화에서 로봇은 이세계(異世界)에 속한 미지의 존재, 과학적 재앙 혹은 재앙일 수 있는 가능성, 흉흉한 파국의 전조라기보다 인간성 근교의 것, 구체적으로는 인간에게
무엇을 더하거나 그로부터 덜어냄으로써 주류의 ‘순정’ 인간에게
부재한 것을 가시화하는 주체다. 데즈카 오사무의 기념비적 작품 「불새」(Phoenix, 1954~1988)의 한 에피소드는 인간의 가장 정확한 재현물인 클론과 대비해 기계 인간의 인간적
당위를 묻기도 한다. 로봇을 통해 굴절된 인간성의 발견은 동아시아 우주론의 전통이 후대에 공유하는 특징일
수 있다. 기술철학자 육후이(Yuk Hui)의 코스모테크닉스(Cosmotechnics) 개념은 최근 이러한 논의에 자주 인용된다.
우리는
새로운 기술을 말 그대로 새로운 것 또는 미지의 혁신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만, 만약 인간이 존재의
차원에서 기술적 조화나 구성으로 제시될 수 있는 특정 상태의 ‘것’이라면, 기술의 수용은 결국 인간이 내재한 질서와 도덕의 회복과 관련된다. 이것은
권병준의 로봇이 가진 의미와 일치한다. 그의 로봇이 문화적 맥락에서 그렇듯 육후이의 이론은 철학적 서브컬처처럼
읽힌다. 이것이 기술에 대한 과학적 일반론으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근대의 기술 체계에 관한
전유로서 문화·예술을 통해 먼저 실현될 수 있거나 이미 실현되었을 가능성을 지울 수 없다. 권병준이 자신의 첫 개인 공연으로 후술하는 작품에는 그러한 가능성과 태도를 상징적으로 압축한 제목―〈모든 것을 가진 작은 하나〉(2010)―이 붙었다.
그는 언젠가 로봇에 대해 쓴다.
로봇은 1990년대 클럽 신에서 서로의 곁을 지킨 동료다.
로봇은 그에게 ‘없는 존재’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이방인, 이방의 노동자다. 로봇은 좌표를 잃은 난민이다. 로봇은 주정뱅이다. 자질구레한 철물을 조립해 결과적으로 용도 불명에
이른 로봇은 저마다의 결함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동료들은 흩어졌고 자본에 영합하지 않은 예술은 잊혔다. 이방인들은 거듭 추방당한다. 고향은 누구에게든 사어가 되었다. 취객은 꿈속에서 헤매며 숙취로 고통받는다. 로봇은 왜인지 어느 편에도
선뜻 마음을 주지 못한 채 유령처럼 배회하는 그 자신 같다. 그의 로봇은 인간과 동종의 윤리에 기반해
작동한다. 그리고 그것이 보편타당하게 약속된 질서(권병준에게는 ‘진리’) 혹은 에피스테메(육후이에게는
철학적 상위문화로서의)와 대립하는 순간 서로의 오작동을 끌어안아 각성한다.
얼굴들
그는 〈이것이 나다〉(2013)에서
스스로를 미디어로 삼았다. 〈이것이 나다〉는 텅 빈 프로젝션 스크린이나 캔버스처럼 얼굴을 희게 칠한
뒤, 빔 프로젝터를 이용해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 영상’를 투사한다. 그리고 얼굴에 덧입혀진 얼굴의 모습을 다시 비디오 장치로
그가 자리한 너머의 벽에 출력한다. 기계 장치의 눈 부신 빛을 얼굴 정면으로 마주한 그는 때로 기계처럼
무감해 보이기도 때로 고통스럽게 고양되어 보이기도 했다. 그는 미디어나 영매가 된 것 같았다. 〈이것이 나다〉가 다룬 정체성의 문제는 동시대 미술에서 늘 회귀하며 반복되는 것이지만, 얼굴 인식과 매핑, 이미지 생성 기술을 통해 기계적 인지 절차, 그리고 녹화와 상영을 경유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단순히 예술가 개인이 느끼는 자아의 혼란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장치 또는 장치로 간주되는 혼종의 상태에 인간성의 표상―인간의 얼굴―을
내어주는 퍼포먼스가 되었다.
이것은 가벼운 발상을 구조화한 것임에도 그가 미술이라는 터전에서 자신의
입장을 가다듬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2014)의 권병준은 더 중립적인 기술자처럼 작품을 조율한다.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은 〈이것이 나다〉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표되었는데,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것처럼 ‘나’를 극 형식의 경계에 위치시키고 복합적인 무대
장치를 쌓는다. 그는 연출가이자 퍼포머로서 무대 위의 여러 요소를 이용하고 전통에 가까운 극의 요소와
미디어 기술을 융합한다. 그는 마치 극에 이식된 이물질처럼 보인다. 이때
기계에 의해 분사된 수증기가 얼굴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결과적으로 ‘나’는
무대 위에 누적된 이물질과의 관계 속에 새로운 기계적 얼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것은 권병준에게 로봇이라는
메타 주체가 출현한 계기를 함축하는 듯하다.
한편 그는 네덜란드에서 귀국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섯 개의
마네킹〉(2011)을 공연했다. 이 공연은 그의 오랜 동료인
음악가 달파란과 협업한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미술가로서 그의 현재와 과거를 더 유심히 살피게 한다. 마네킹과
로봇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여섯 개의 마네킹〉에 쓰인 마네킹은 수공품에 가까운 로봇과 달리 기성
제품이 제한적으로 변형된 것이다. 그런데 공장에서 찍어낸 대량생산품이란 점이 곧장 마네킹의 특수한 감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량생산은 오늘날 작품의 미학적 특성을 결정하기에 과히 일반적인 물질의 조건이며
그것의 복수(plural)성 역시 미술품을 반드시 좋거나 나쁜 일방향의 국면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로봇과 비교하면 마네킹은 상품과 조금의 틈 없이 밀착한 소비의 껍데기로서 젊고 아름다운 신체를 모방한다.
신체의 에로티시즘에 충실한 마네킹이 죽은 신체처럼 보이거나 기괴함을 자아낸다는 점은 아이러니하지만, 요컨대 이것은 음악가로서의 권병준이 미술가로서 소리를 외부의 물질에 의사 하는 가운데 도달한 어느 기착지였던
것 같다. 달파란과 그는 쉽게 체현될 수 없는 몸짓을 마네킹에 덧입히는가 하면 형언하기 어려운 불협화음과
소음을 비명처럼 덧씌움으로써 마네킹이 직관적으로 유발하는 타자성을 증폭하고 그것을 가속하듯 내파했다. 상품의
임계를 넘어 파열한 마네킹은 그들에 의해 익숙한 소리의 잔해로 수거되었다. 이때 권병준의 실험은 〈모든
것을 가진 작은 하나〉의 일인칭 ‘작가’를 그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극적으로 의사 하는 동시에 ‘극적’이라는 말이
가진 직서성을 교란하는 것이었다. 반면 《클럽 골든 플라워》(대안공간
루프, 2018)에서 그의 의사체(擬似體)로 정돈된 로봇은 비애의 마음을 품게 한다.
시타가 본 지상으로 추락한
기계 병사의 잔해 같이 로봇은 일종의 텅 빈 얼굴, 산업이나 상품의 궤도에서 이탈한 잔존물이 떨어진
곳에 만들어진 동공이다. 그것은 인간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 한때 인간의 것이던 통속과 노스탤지어를
환기한다. 우리가 부서지기 전에 추락한 곳은 어디인가? 이
단계에서 그의 로봇은 로컬 대중문화의 데이터베이스를 경유하며, 인간-상품의
껍질로 제시된 마네킹보다 한층 버내큘러한 면모를 보인다. 〈길의 인형〉(2006), 〈마네킹의 유체이탈〉(2011)이 그 경로에서 참조될
수 있을 것 같다.
빛과 소리
《클럽 골든 플라워》가 미술 전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음에도 로봇에
관한 그의 연작은 대체로 로봇이 무대 위에 오른 연극에 가까웠다.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 2〉는 2022년 실험적인 극을 소개하는 대학로 극장 쿼드에서 개관
기념 페스티벌 초청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소리를 다루는 기술자이자 엔지니어로서 또 급진적인 자취를
남긴 록 밴드의 일원으로서 그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극과 맞닿은 공연성에 기반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작품에는 ‘퍼포먼스’, 그것을 구체화한 ‘로봇 종합 퍼포먼스’, 다시 그것을 매체적 특성으로 구분한 ‘로보틱 매카니컬 시어터’라는 표현이 혼용되지만, 어쨌든 이론적인 접근과 무관하게 그는 각본가와 연출가의 역할을 수행하며, 그의
작품은 극적 체험을 유발함으로써 무대 위의 한 장면에 오른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공교롭게도 극적이란
말은 동시대 미술에서 그다지 훌륭한 상찬처럼 들리지 않는다. 큐레이터와 비평가, 소위 제도의 전문가 그룹에는 연극성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있는 것 같다. 때로
이 공포는 동시대 미술의 어느 부위가 자신이 갈라져 나온 동종의 형질로부터 유전적 고유성을 보호하기 위해 대물림한 방어술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가 연극성을 다루는 ‘무심함’은 동시대 미술이나 그 성전으로서의 미술관을 기어코 불편하게 만들고 만다.
권병준의 극적 요소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그림자의 활용이다. 로봇에 관한 그의 연작은 대부분 인공적인 빛으로 그림자를 생성한다. 여기서
큐레이터와 비평가들은 이미 난감한 입장에 처하는데, 그림자는 대상에 종속되어 수동적으로 열화한 것이란
점에서 고전 철학이 고전 미술을 열등한 재현으로 평가 절하한 기억을 상기시키며, 지지체가 불분명한 환영으로서
근본 없는 ‘기분’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현대 미술이 기피하는
시각성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으로 선택된 로봇은 사물의 의인화로 오인되며 재차
곤란함을 유발한다―신유물론의 광풍 속에서 사물의 의인화는 지난 미술의 낡은 기호로 읽힐 것이다―. 하지만 그림자가 단순히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극의 요소인 건 아니다.
예를 들어 《클럽 골든 플라워》의 로봇이 랜턴을 얼굴 부위에 이식한
발광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 로봇의 그림자는 ‘자신을 포함해
자신을 포함한 구성체’를 조직하고 있는 연결 상태를 가시화한다. 또
인공적으로 강화된 조명이야말로 공연 산업이 무언가를 대상화하는 방식이란 점에서 그것은 힘과 자의식, 고통에
관한 자전적인 표상이다. 그러므로 그의 극에서 인공적인 빛은 기계 장치의 군집을 구성하는, 또 다른 물질처럼 연장된 로봇의 의체다. 《올해의 작가상 2023》에서 로봇은 오체투지, 삼보일배와 같이 인간 세계의 연결망을
과열시키는 정치적 몸짓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로봇은 빛과 화이트큐브에 의해 사물 혹은 기계의
움직임으로 부서진다. 여기서 극대화되는 것은 그림자를 동원한 이중 재현이나 환영의 공간감이 아니라 신체와
의체가 뒤섞여 벽면 위에 균등한 파장으로 흩어지는 기묘한 물화의 경험이다.
그의 극에서 소리는 특수한 지표다. 보는 경험 또는 읽기의 경험과 달리 듣는 경험은 순간의 영원함에 따른 신비롭고 독자적인 체험으로 여겨져 왔다. 현대인에게 음성적인 것은 넘어서야 할 로고스이고 고대인에게 음률과 음계는 불가지한 존재론을 인간 세상과 이어
붙이는 형식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좋은’ 소리의 분별이 그 시대의 질서를 증명하는 일과 연관된다고 믿지는 않는다. 어떤
측면에서 기술 그리고 장치야말로 소리를 해체했다. 오늘날 모든 듣기는 잘게 부서진 부호가 되어 필연적으로
기계적 절차를 통과한다. 반대로 그것은 기계적 절차가 소리를 다시 조립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권병준에게 동시대의 듣기란 이러한 장치의 힘을 포괄하는 탐색이다. 장소를
횡단하는 극 속에서 소리를 생성하는 일―〈경원선 행진곡〉(2014)―,
종의 맥놀이 주파수를 기록하고 해독하는 일―〈흐느끼는 종들〉(2015)―, 더 이상 피아노라 부를 수 없는 피아노를 영매로 도시 정경에 개입하는 일―〈타이베이를 위한 노래〉(2016)―에는 지표로서 소리가 가진 특질, 기술의 작용, 공연성을 결합하기 위한 고민이 녹아 있다.
역사의 숲
소리를 채집하고 편집하는 일은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했다. 1990년대 초의 캠퍼스에서 이념의 ‘서드임팩트’를 목격하며 그는 방향 감각을 잃고 소리에 의지했다. 엄혹한 구체제가
녹아내리듯 무너지는 것이 무색하게 곳곳에 새로운 죽음이 가득했다. 사람들을 끓어오르게 한 해방의 열망은
모든 규범을 지배하는 자유의 전조였다. 혁명의 기수들이 누구보다 빠르게 변화에 부응하자 구호는 흩어지고
소리가 남았다. 어쩌면 이미 너덜너덜해진 시대의 끝에서 헤드폰이 채널링하는 소리의 감각은 그에게 유일하게
잔존한 역사의 감각이었을 것이다. 그가 처음 발표한 〈오묘한 진리의 숲 1〉(2017)에는 이러한 작은 불씨 같은 소리가 웅얼거림처럼 남았다. 완전히 단절된 개인의 방백 같은, 한편으로는 역사의 치찰음과 같은
이 소음은 이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어진 이념의 소리―〈오묘한 진리의 숲 3: 교동도 소리풍경〉(2017)―, 난민과 이주자의 소리―각각 〈오묘한 진리의 숲 2와 4〉(2018과 2019)―로 변모했다.
오늘 그의 로봇은 불빛에 모여들어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인다. 어느 시구가 그린 한 장면처럼 그들은
저마다의 존재 방식을 무용하게 단련함으로써 가장 흔한 민중의 이미지를 환기한다. 그러나 ‘오묘한 진리의 숲’은 단지 인간을 은유하는 인간형 로봇의 고향, 그들을 위해 복원된 무덤 같은 안식처는 아니다. 그가 소리로 적층한
숲에서 로봇과 인간은 각자의 채널을 표류하며 투쟁하는 그림자다. 그것을 어떻게 다시 역사라 부를 것인가? 이제 모든 사람이 쉽게 우리의 서사가 끝장나버렸다고 말한다. 우리
중의 누군가가 변절했다고 말한다. 그것으로 충분한가? 더
이상 기념할 것이 없다면 이곳에 남은 흔적은 무엇인가?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얼룩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는 변함없이 견고하고 단정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은 다정하고 낭만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