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노이즈, 음악은 서로 분리된 개념이 아니며, 각각에 대한 인식은 개인의 주관적 사고와 감각에 따라 달라진다. 세계는
무수한 소리로 가득 차 있으며, 노이즈는 우리 주변에 언제나 존재하면서도 존재자로 명명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 셰퍼의 질문을 따라가 보자. “우리는 어떤 소리를
보존하고, 장려하고, 증식시키고 싶을까?” 이에 대해 자연인으로서의 권병준은 ‘저마다 다르다’고 답할 것이다. 이어지는
셰퍼의 질문, “예술, 특히 음악을 통해 인류는 어떻게 다른
삶 (other life), 상상력과 정신적 성찰의 삶을 위한 이상적인 사운드스케이프를 만들어내는가.”5
이에
대한 답변은 관객과 독자의 몫이다. 개인의 감수성과 사회적 의식을 조화시키는 예술가로서 권병준의 작업에서
한 가지 단서이자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먼저 현대 도시의 대중적 삶의 사운드스케이프를 떠올려보자. 이견의 여지없이 교통 소음이 주조를 이룬다고 할 것이다. 녹지가
조성된 공원에서, 대단지 주거시설이 밀집한 골목에서, 번화가의 작은 소극장에서도, 자동차, 비행기, 전철이 작동하며 발생하는 속도의 음향이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울린다. 갖가지 인프라를 갖춘 편리한 도시 생활에서 사운드스케이프는 거의 획일화되어 있고,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기계의 작동음에 도시인은 모두 약간의 난청을 앓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사운드스케이프는 어떻게 다른 삶을 상상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권병준은
지난 10 년 동안, 위치인식 시스템을 장착한 헤드폰과 앰비소닉
기술 등으로 녹음하거나 채집한 소리를 들려주는 작업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해 왔다. 이 프로젝트는 무차별하고
혼란스러운 소리 환경(sound circumstance)에서 미세한 개별 음향을 구분해내고 쾌적한 것으로
음미하도록 요구하는 청력 교화 프로젝트가 아니다. 개별 작업마다 사용하는 소리의 의미적 층위가 달라서
일괄적으로 논할 수는 없지만, 직접 감상한 몇 가지 작업에 관한 기억과 작업 관련 기록을 참조하면, 공통적으로 시각과 청각의 ‘이접 (disjunction, 離接)’의 원리가 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일반적인 사용법대로
헤드폰을 통해 개인은 눈앞의 시각적 현실로부터 분리되어 청각적 개별의 세계에 침잠하고, 시각적 풍경과
일치하는 소리, 예를 들어 눈앞에서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가 내는 소리를 듣는 체험과 달리, 시각적 풍경과 유리된 소리를 듣는다. 여기서 작가는 헤드폰으로 들리는
소리를 눈 안팎의 물리적 공간과 새롭게 결부시킨다. 이는 영화에서 시각과 청각이 작동하는 원리와 같다. 영화의 시각적 이미지는 소리를 내재하거나 머금고 있지 않기에, 영화에서의
소리는 시각과 마찬가지로 편집되고 몽타주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권병준의 작업에는 영상이나
사진 이미지가 사용되지 않고 실시간으로 흘러가는 자연적 공간을 마주하도록 하지만, 소리의 편집만으로도
시각적 현실의 이미지는 변형된다.
〈청주에서
키이우까지〉(2022)는 미술관 야외 광장에 가상도시의 소리 풍경을 매핑하여, 관람객이 헤드폰을 쓰고 돌아다니며 감상하도록 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와 한국의 지방 도시 청주 사이에는 별다른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작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긴장된 세계정세와 개개인을 사로잡은 불안의 정동에 주목하여, 도시와 소리 감각을 매개하는 포괄적인 미술관의 기획에 과감한 주제로 응답한다.
이번에도 관람객은 작가가 들려주는 ‘긴장과 불안의 소리’를 여느 때와 같이 헤드폰을 통해 개별적으로 접하게 되지만, 여기서는 모든 관람객이 일시에 같은 소리-사이렌 소리와 비행기 소음을
듣는 순간이 설계되었다고 한다.
〈오묘한 진리의
숲〉(2017~2019)은 제주에 무단 입국한 예멘 난민의 노래, 북한에
인접한 교동도 소리풍경, 충남 홍성 다문화가정의 자장가 등을 들려주며 마찬가지로 선명한 사회의식과 주제를
담아낸다. 권병준은 그가 염려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사건들과 마주한다.
그가 전국에서 수집한 소리는 미술관이나 극장, 작업실과 교실 등에서 헤드폰을 매개로 익명의
관람객과 접속한다. 관람이 일어나는 장소는 대체로 추상적이지만, 작가가
관람객을 이끌어 보여주는 장소는 ‘탈색된 이곳’이 아닌 ‘다채로운 저곳’ 이다. 관람객은 말없는 이야기이자, 재현하지 않는 노래, 눈에 보이지 않게 펼쳐지는 연극을 듣는다. 시인 함성호는 권병준의 작업에서 “장소를 지우는 헤드셋의 사운드”에 주목하지만,6 이 글에서는 오직 소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저곳의 장소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완벽한 이족보행
로봇이 덤블링 동작을 매끈히 소화해낼 때,
권병준의 로봇은 삼각대 위에서
절뚝거리거나 사다리 다리로 삐그덕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