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e U-Ram, Gorgonian Chandelier, 2013, metallic material, machinery, resin, electronic device(CPU board, motor, LED), 210 x 107 x 96 cm © Choe U-Ram

“그러므로 신체의 각 부분은 그 안에 각각의 욕구와 균형을 이루는 힘을 지닌 스프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기계에 들어 있는 스프링의 세 부작용에 관해 생각해 보자. 이것의 작용이 모든 자연적이고, 자동적이며, 생명과 관련되는 육체적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이다. 갑자기 예상하지 못했던 절벽을 만나게 되면 우리의 신체가 겁에 질려 기계적으로 한 발 크게 뒤로 물러서지 않는가? 그리고 주먹이 날아올 것 같으면 우리의 눈썹은 자동적으로 닫히지 않는가?... 허파는 끊임없이 송풍기처럼 자동적으로 움직이지 않는가?”
                                    
- 라메트리, 『인간기계론』 중 (1)
 


기계 미학과 자연형태의 상응

반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하나의 중심축을 중심으로 6개의 원통이 시계 방향으로 동시에 회전한다. 각 원통에는 장식 문양 형태로 가공한 금속판이 바깥쪽으로 맞물려 있는데, 90도에서 120도 사이로 위아래로 움직이는 왕복 운동을 한다. 새의 날개나 구름 모양의 장식판은 각 층마다 6개씩 총 5층으로 겹쳐져 있고, 아래층의 금속판 하나에 위층의 금속판이 두 개씩 물려 있다. 금속판의 모양은 층마다 달라지며 변주되고, 재질 또한 황동과 스테인리스 스틸로 번갈아 바뀐다. 각기 왕복 운동을 하는 장식판은 전체적으로 중심을 향해 모였다 흩어지는데, 산스크리트어로 바퀴를 의미하는 제목처럼 만개한 꽃 모양으로 활짝 펼쳐졌다공처럼 움츠러들기를 무한히 반복한다. 위는 전시 중인 갤러리 현대 〈램프가게(Lamp Shop)〉 전의 출품작 〈금빛 차크라 램프(Gold Cakra Lamp)〉(2013)를 묘사한 것이다. 장황할 정도로 상세한 설명은, 소품이라 최우람 작업중 제일 단순한 편인 이 작품도 구조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기술적 정교함과 형식적 아름다움이 투입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본질상 움직이는 조각인 최우람의 작업이 다른 키네틱 조각과 차별점을 지니는 시작은 바로 이 부분, 즉 구조 및 세부의 형식미와 움직임에 있어서 섬세한 우아함이기 때문이다.

수공예를 연상시킬 정도로 빼어난 장식미는 관객을 매료시키는 일차적 요인이다. 같은 전시에 출품된 〈금빛 곤충 램프(Gold Insecta Lamp)〉(2013)의 구 동부는 공작새의 깃털이 나금관의 화염문 내관 장식을 연상시키고, 〈고르곤 샹들리에(Gorgonian Chandelier)〉(2013)의 펄럭이는 갓은 일렁이는 파도나 흔들리는 해초의 문양으로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다. 수공적인 정밀함은 재료의 선택, 가공에서부터 작품의 설계 및 제작의 모든 부분에 적용된다. 예를 들어, 〈고르곤 램프(Gorgonian Lamp)〉(2013)의 장식판은 스테인리스 스틸을 에칭으로 일일이 떠서 만들었으며, 이후 불에 그을려 광택을 죽이고 사포질해 골동품 느낌이 나도록 색감을 조정한 것이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설치되어 있는 〈오페르투스루 눌라 움브라(Opertus Lunula Umbra)〉(2008)의 29쌍의 날개는 CNC(컴퓨터 수치제어)가공을 통해 ABS수지로 원형을 만든 후 그 위에 여러 종류의 무늬목을 입히고, 그중 가장 나무 무늬가 잘 드러나는 수종을 골라 실리콘으로 무늬를 떠내고 FRP 플라스틱으로 최종 모형을 만들어 색칠하는 공정을 거쳐야 한다. 노동집약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다단계의 수공적 개입을 요하는 것은 외견상 두드러지는 요소만이 아니다. 작품마다 크기와 형태, 이에 따른 모터나 기어의 배치가 달라지기 때문에, 매 작품을 구상할 때마다 볼트나 너트, 베어링 같은 세부 부품까지 전부 맞춤설계해야 하는 것이다.〈차크라 램프〉처럼 간단한 경우에도 20-30여 종의 부품 150여 개가 필요하며, 〈오페르투스〉처럼 거대한 경우에는 2백여 종의 5천 개 이상의 부품이 새로 제작된다. 그런고로 시각예술로서 최우람 작업이 지니는 형식적 완성도는 설계와 제작에 있어서의 장인적 공정과 그 결과 도출되는 형태적 조형미가 담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외견상 최우람 근작의 장식적 패턴이 아르누보를 연상케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유비다. 표면적으로는 전술한 수공예적 장식성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이유겠지만, 형태가 도출된 근원이 유사하다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공통점이다. 넝쿨 모양의 장식으로 유명한 아르누보는 자연형태에서 영감을 받은 유기적 구조에 대한 관심이 특징이며, 가공성이 좋은 금속으로 식물의 가냘픈 곡선을 추상화해 재료와 구조, 표현의 통합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최우람의 작업 역시 금속의 기계미와 유기체의 역동성이라는 상충하는 요소가 병존한다. 일단 기계 생명체(Anima Machine)라 통칭되는 최우람의 유사(pseudo) 생물들은 형태나 기능면에서 실제 유기체로부터 모티프를 얻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르곤 샹들리에〉는 물 속에서 흔들리는 부채산호의 움직임을 본떴고, 〈우나루미노(Una Lumino)〉(2008)는 따개비가 열리는 모양에서 착상을 얻었으며, 〈제트 하이 아투스(Jet Hiatus)〉는 정어리 떼를 파고드는 상어의 이빨이 영감의 원천이다.

하지만 좀 더 결정적인 부분은 둘간의 닮음이 형태적 유사성을 넘어 구조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흔히 장식 미술 로 오해되곤 하는 아르누보의 숨겨진 기여 중 하나는 형태의 기능적 일치로, 단순 장식이 아닌 기능을 위한 금속 구조재가 미적인 목적도 달성하는 것이다. 비올레르뒥(E. Violletle Duc)의 주철받침대나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의 지붕트러스는 구조물인 동시에 유기체의 감각적인 곡선을 훌륭히 살려낸 장식이다. 최우람의 작업에서도 동작을 위한 실용적 부품은 조형적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이런 경향은 전작업을 망라하지만, 이번 〈램프가게〉 전의 시원인 초기작 〈루미나 비르고(Lumina Virgo)〉(2002)는 장식과 기능의 합치라는 면에서도 분절점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더듬이를 만지면 불이 들어오는 이 소형 램프에서 날개를 열고 닫는 기능을 하는 구동장치는 크고 작은 기어인데, 이들은 톱니바퀴 역할을 하는 동시에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모티프로 한 손모양의 장식을 이룬다.(2) 형식과 기능이 일치하는 합리성은 기계 미학의 중요한 덕목으로, 최우람 작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움직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동물 기계와 기계 생명체

한 인터뷰에서 최우람은 자신의 작업을 ”움직임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기계라는 것을 주제로 삼아, 기계가 생명을 가지게 되는 이야기”라고 표현한 바 있다.(3) 여기서 움직임의 속성은 최우람의 조형물이(개념이나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여타의 키네틱 조각과 변별력을 갖는 주된 요소다. 최우람의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은 살아 있는 생물의 움직임을 본뜬 것이다. 이때 흥미로운 지점은 최소한의 요소로 최대치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금빛 곤충 램프〉에서 움직이는 다섯 개의 날개 부위는 모두 하나의 축에 연결되어 있다. 메뚜기의 뒷다리 모양을 확장한 장축은 하나의 모터로 통제되는데, 각 날개는 기어의 맞물림에 따라 차례로 펼쳐졌다 접힌다. 이때 날개의 움직임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날개가 동시에 접혔다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최하단의 날개가 최대한 내려갔을 때 중간 이상의 날개들은 이미 올라오는 중인 것이다. 여기서 이 동작이 디지털로 제어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단순한 회전축의 원리에 의해 통제되는 아날로그 방식이라는 것이 핵심이자 매력이다. 회전 중심에서 가까울수록 동작 반경이 커지고 멀수록 작아지는 원리를 활용해 각 날개의 작동범위에 차이를 주는 것이다. 되도록 단순하고 효율적인 구조를 지향하는 태도는 작업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데, 최우람이 즐겨 사용하는 모티프 중 하나인 새 날개의 움직임도 예외가 아니다. 〈아르 보르 데우스 페나투스(Arbor Deus Pennatus)〉(2011)의 양 날개 역시 모터 하나로 제어되는데, 모터에 연결된 기어는 인접 기어들을 회전시키고 기어에 연결된 두 개의 회전축이 각기 다른 박자로 움직임으로써 우아한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아름다움과 효율성의 결합이라는 기능주의 미학은 동물의 생체 구성원리와 동일하다.

가장 효율적인 기능의 발휘를 위한 구성이 결과적으로 아름다움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기계와 동물의 유비는 최우람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요체다. 소재를 얻는 동기도 동식물이고, 세부구조나 동작의 설계를 실제 생물의 골격이나 움직임에서 얻을 뿐 아니라, 경제성을 지향하는 작동 원리나, ‘있을 법한 생명체(lifeasit could be)’(4)를 의도하는 작품의 최종적인 목표까지 모두 기계와 생물의 결합으로 귀결된다. 동물을 기계에 비유하는 것은 상당히 연원이 오랜 일로, 직접적 계보는 계몽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데카르트는 동물이 오직 물질로만 이루어진 기계라는 동물-기계론을 주창했으며, 인간 역시 영혼을 제외하면 시계나 자동 인형이 평형추나 톱니바퀴의 배치에 따라 움직이듯 인체 기관들도 기계적 배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고 보았다.(5) 이러한 인간 기계론은 라 메트리에 와서 집대성되었는데, 그는 인간을 ““그 자신의 태엽을 스스로 감는 기계””이며,“ “영속적인 운동의 살아 있는 상””이라고 정의했다.

영혼 역시 생각하는 근육인 뇌의 작용이라고 본 철저한 유물론자인 라 메트리에게 인간 조직의 운동은 순전히 기계적인 것으로, 일종의 유압장치인 심장이 순환시키는 피로 전달되는 열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었다.(6) ‘자체의 작동 원리를 담고 있는 스스로 움직이는 기계’라는 인식은 인간을 일종의 자동 인형으로 보는 것이다. 이 논의는 정밀 기계공학의 발달과 해부학에 대한 관심에 힘입어 실물로 구현되게 된다. 음식을 먹고 배설하는 걸로 유명했던 보캉송의 기계 오리나 지금도 작동하는 자케-드로의 글쓰는 자동 인형이 그 예다. 이들은 철학적 측면과 공학적 측면 양자 모두에서 최우람의 기계 생명체가 발생한 계보학적 뿌리에 해당한다.
 


자동 인형과 인공생명 사이

최우람의 기계 생명체를 18세기 자동 기계의 격세유전으로 보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이 둘은 모두 내부구조가 섬세하게 설계된 정교한 기계 장치며, 동물의 해부학적 구조나 기능을 기계와 일치시켰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보캉송이 플루트를 부는 인형을 만들 때 인체의 호흡 기관을 모방해 허파와 기도, 입술, 혀를 움직이는 레버와 밸브를 만들었다면, 최우람의 〈아르 보르 데우스 페나투스〉는 요골과 척골로 이루어진 새날개뼈의 이중 구조를 본떠 펄럭이는 새의 날갯짓을 기계적으로 구현해냈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유사성은 기계 장치를 만드는 동기 혹은 욕망에 있다. 최우람의 작업은 흔히 예술과 과학의 융합이나 인공생명체, 로보틱스, 사이버 아트 같은 단어들과 결부되어 논의되지만, 실제 그의 작품은 모터와 기어, 구 동부로 구성된 기계역학의 기본에 원론적으로 충실하며 움직임의 패턴과 시점을 통제하기 위해 CPU보드의 도움을 받을 뿐이다.

기계에 대한 원초적인 매혹은 최우람이 여러 인터뷰에서 반복해서 고백한 바 있는 사실인데, 18세기의 자동 인형들 역시 일차적으로는 최고 수준의 정밀기술을 적용한, 기계 이상의 기계를 만들려는 발명가의 꿈에서 시작된 것이다. (최우람의 많은 작업에서 정교한 시계의 태엽 장치가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아가 ‘움직이는’ 자동 기계는 궁극적으로 생명의 모방 혹은 창조로 이어진다는 특징을 공유한다. 움직임은 생명의 고유한 속성으로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지의 유무는 살아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금속성의 몸체를 한 명백히 무생물인 최우람의 기계들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생명의 상징인 빛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최우람의 기계 생명체 중 ‘숨을 쉬는 기계’가 상당수 존재한다는 것은 꽤나 시사적이다.

그의 작업 중 가장 대규모며 시각적으로 압도적인 〈오페르투스루 눌라 움브라〉의 장쾌한 군무는 갈비뼈 혹은 갑각류의 껍질이 들썩이며 커다란 숨을 뿜어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작년의 개인전에서 단연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쿠스토스카붐(Custos Cavum)〉(2011) 역시 인기의 비결은 바다사자를 닮은 피조물이 사실적으로 숨을 들썩이는 데 있었다. 들이마실 땐 빠르게 부풀었다 내쉴 땐 일정한 속도로 천천히 내려가는 움직임의 차이는 기계가 살아 있다고 믿게 되는 핵심기제다. 생기가 없는 존재가 숨을 쉬는 것은 무생물이 생물이 되었다는 징표고 이를 만든 제작자에게 신의 지위를 부여하는 행위다. 모든 자동 인형에 내재된 존재론적인 야망은 사실상 프로메테우스적인 반역, 즉 생명 창조의 특권에 대한 찬탈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통 기계 생명체에 동반되곤 하는 유사과학적 학명과 가상의 탄생설화 혹은 생태 보고서는 객관성이라는 과학의 권위를 빌어 ‘있을 법한 생명체’에 생물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부여하기 위한 전략일 것이다.

결국 최우람의 기계 생물들은 최대한 자연을 모방하려는 자동 인형의 꿈을 넘어선다. “인간 자신의 피조물들이 스스로 군집하여 번식하고 진화하는 모습을 통해, 새로이 탄생하려는(기계) 종과 인간 사회의 관계를 탐구하는 실험”(작가)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을 초월해 자체의 논리와 자유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또 다른 인공생명으로 확장된다. 이들은 단순히 현존생물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요소를 상호조합해 범주 구분을 흐려놓는다. 제트 엔진의 움직임과 상어의 이빨을 융합함으로써 기계와 동물을 교배시키기도 하고(〈제트 하이 아투스〉), 따개비와 꽃을 합쳐 동물과 식물의 잡종(〈우나루미노〉)을 만들기도 한다. 나아가 이준(quasi) 생명들은 성체와 유생, 암컷과 수컷이 공존하는 생태계를 이루거나(〈어바누스(Urbanus)〉 연작(2006)), 상호작용하며 군집생활을 영위하는 가상의 기계 생명체 군락(〈우나루미노〉)을 재현하면서, 개별적 존재에서 자연 혹은 우주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생명의 기원을 되짚어본 우주연작인 〈겁(Kal pa, 劫)〉(2010)이 그 길의 끝에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이가 상생물들이 인공생명의 과학적 정의를 얼마나 충족시키느냐가 아니라, 생명의 개념을 상상의 지평에서 재고하고 확장하는데 얼마나 기여하는가다. 그것이 시각예술로서 최우람의 작업이 기능하는 지점이자, 그의 기계 생명체가 인조 인간을 꿈꾸던 18세기의 자동 기계와 창발을 지향하는 21세기의 인공생명을 재매개(remediation)(7) 제이 데이비드 볼터와 리처드 그루신의 용어로, 뉴 미디어가 기존의 미디어나 동시대의 다른 미디어를 이용하면서 개조하는 작용을 뜻한다. 하는 접점이 되는 이유일 것이다.
 

 
(1) La Mettrie, L'Homme Machine, 1748. 번역은 다음의 책에 의거하나 약간 수정했다. 게이비 우드 (김정주 역), 『살아있는 인형』, 이제이북스, 2004, 42쪽. 
(2) 방점은 다르나 김선희 역시 2006년 모리 미술관 전시 서문에서 〈루미나 비르고〉를 최우람 작업 전체를 대변하는 작업으로 주목한 바 있다. Kim Sunhee, "Alien Life Forms: The Art of Choe U-Ram, "City Energy-MAMPROJECT004, Mori Museum of Art,2006, p. 31. 
(3) 2009년 1월 18일 앨리스온(Alice on)과의 인터뷰. 
(4) 인공생명이라는 개념을 정립한 크리스토퍼 랭턴(Christopher Lang ton)의 용어로, 그는 생명의 개념을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lifeas we knowit)’에서 ‘있을 법한 생명(lifeasit could be)’으로 확장시켰다. Christopher Langton, "Artificial Life," Artificial Life, proceedings Santa Fe Institute Studies in the Studies of Sciences of Complexity, Vol. 6, Addison-Wesley, 1989. 
(5) 게이 비우드(김정주 역), 『살아 있는 인형』, 이제이북스, 2004,38쪽. 
(6) 라 메트리 인용은 다음의 논문에서 따온 것이다. 조영란, 「라 메트리의 인간 기계론에 나타난 심신이론과 18세기 생물학」, 『한국과학사학회지』 제13 권 제2호, 1991,148쪽. 
(7) Jay David Bolterand Richard Grusin, Remediation: Understanding New Media, MIT Press, 2000, pp. 3-15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