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는 위와 같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은실이 삶 속에서 간직해온 임신과 출산의 경험을 되돌아보는 전시이다. 그러나 방금 전의 되돌아본다는 표현은 그가 말하려는 절박함을 모두 담지 못할 것이다. 이런 언어 대신에 출품작에서 드러나고 있는 새로운 색과 형상들이 정면으로 그의 시간을 마주하게 만든다.
분만 시 압력으로 흰자위 전체에 핏줄이 터진 눈의 모습, 아랫배에 소낙비처럼 흉터로 남은 흔적, 화면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골반뼈와 자궁관, 태아나 태반, 폭발하고 있는 화산과 같은 표현들은 해산하는 주체의 전쟁터 같은 신체를 강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붉은 용암이 혈관처럼 퍼져 나가는 장면이나 푸른 소용돌이, 높은 파도가 휘몰아치는 듯한 모습 등은 그 응집된 에너지를 가시화 시킨다. 이것은 외부를 공격하기 위한 분노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떠올리면 동시다발적으로 상기되는 아픔과 몸의 파동, 피가 물든 장면들과 같은 회고에 대한 작가적인 표현으로 보는 편이 적합한 것 같다.
통증 완화를 위한 경막 외 마취제(무통주사)가 주입되는 순간에 대한 감각을 다룬 대형 신작 〈에피듀럴 모먼트 Epidural Moment〉(2025)는 가로 7.2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스케일과 수묵 채색으로 성실히 겹쳐 올린 화면으로 산통과 마약성 진통제의 환각이 뒤섞인 초현실 속 꿈같은 세계로 보는 이를 인도한다. 화면 전체를 휘감고 있는 뱀이나 용의 이미지, 직접적으로 읽을 수 있는 신체 일부나 주사, 링거 관의 형상, 산꼭대기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구름 같은 기운 등이 눈길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 전체를 통해 더 깊게 감각할 수 있는 것은 집요한 표현과 압도적인 구성을 통해 작가가 걸어오는 대화이다. 극심한 진통의 순간 주입된 환상적인 환각 상태는 마치 14년 전 좋은 부모로서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상처를 뒤로 했던 이은실의 정서적인 마취 상태와 그리 다르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연하게도 앞서 언급한 『누런 벽지』를 통해 길먼이 부정했던 휴식 요법 또한 경막 외 마취와 같이 대부분의 경우 마약성 신경 안정제 사용을 병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남성보다 여성들에게 주로 처방되었으며, 특별한 증세가 없어도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성들을 가정적으로 만들기 위한 명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세기 여성의 활동을 억압했고 동시대 여성의 출산을 수월하게 만드는 환각제의 공통점을 감지하는 것은 과도한 연결이 될까?
그 당시 길먼의 소설은 페미니즘 문학의 핵심적인 텍스트가 되었다. 그리고 양식적으로도, 주제적으로도 이전과 큰 변화를 보이고 있는 이은실의 《파고》의 그림들 또한 여성주의의 맥락 하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어렵게 즉답해 보자면 결코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여성 작가들이 페미니스트라는 분류를 스스로 붙이지 않았던 것처럼 그런 구분에 대한 정의를 한 걸음 우회해서 감상하기를 권하고 싶다.
좀 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이은실이 자연의 위협적인 현상을 그림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모습에 주목해 본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밀려들고 물러갔던 통각, 피와 살점이 흐르고 떨어져 나가는 감각들을 휘몰아치는 파도와 뜨겁게 흘러내리는 용암의 모습으로, 태풍의 눈을 닮은 소용돌이의 모습으로 그리거나,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욱한 안개, 일그러진 구름 등 거대한 자연의 모습에서 주로 찾아냈다.
갑작스러운 큰 파도, 매번 높이를 달리하며 나타나는 풍랑 중 하나처럼 그의 경험은 사실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적인 경험이 신체 기관의 구체적이고 일반적인 모습과 나아가 거대한 자연 현상의 모습으로 이어지면서 작가가 가리키는 방향이 자기 내부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출산하는 여성에서 확장하여 몸을 처절히 사용하는 생명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파고》의 그림들은 출산이라는 사적이자 보편적인 순간이 지닌 강렬한 감각과 기억을 두고 특정한 이미지의 선택과 조합, 치밀한 표현, 표면의 깊이, 색채와 농담 등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은실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간결한 것이다. 화면 깊이 안착하여 있는 하늘과 산맥의 고요함처럼 그의 그림들은 자기 자신의 고통을 마주하고 바라봄으로써 다른 사람의 것도 바라보려 한다.
보는 이들을 겁주거나 경험을 뽐내기 위한 것이 아니며, 내가 겪은 트라우마가 유독 깊다고 하소연하거나 유세를 부리려는 것도 아니다. 그럼으로써 단순히 출산 경험의 유무 차원이 아닌 인간이 겪는 고통에 대한 공감의 가능과 불가능의 차원으로 주제는 이동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긴 시간을 통과하여 작가의 의지와 진정으로 그려진 단단한 그림들이 기어 나오게 되었다. “사람들을 광증으로 밀어 넣으려는 것이 아니라 광증으로 떠밀려 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3] 그리고 이제 그림들은 그들의 일을 할 것이다.
[1] 샬럿 퍼킨스 길먼, 차영지 역, 『누런 벽지』(1891), 서울: 내로라, 2019, p. 19. 마지막 문장은 전체 글의 문맥을 파악한 번역가의 의역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2] 위의 책, 2019.
[3] 위의 인용문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