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라, 〈마지막 잎새#02_당신이 나를 원하는 것처럼〉 / 〈붉은 수레바퀴_당신의 나의 것〉, 2015, 영상설치 ©국립현대미술관

‘표준’에서부터 ‘분단’까지. 김기라는 자신이 속한 현대 한국사회 내부의 이슈를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반권력적 성향을 지닌 작가이다. 작품이 잘 팔리기로 이름난 작가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는 유명 갤러리 소속작가이기도 한 그에게서 반권력적 요소를 언급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시각적 체계를 전복시키고, 인식적 세계관에 경종을 울린다는 일상화된 현대미술에 대한 설명문은 정확히 그에게 들어맞는다. 그의 작업은 ‘불편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현대’를 벗어난 적이 없고, 전통이 되어버린 온갖 터부를 건드리지만, 조형언어의 새로움이라는 도식에서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다. 물론 반권력적인 작업 또한 실은 저항이란 권력의 체계에 의해 생성되는 탓에 전적으로 체계를 침식시킬 수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장치일 수도 있다는 불편함을 떨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햄버거에서 지젝(Slavoj Zizek, 1949~ )까지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것들이 작가에게 포착된 순간, 그 어떤 것도 포르말린에 적신 핀에서 자유롭지 못한 곤충처럼 표본화된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유의미하다.

그는 “조화와 공존이 없는 번영은 폭력”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 사회에 떠도는 증기같은 관념들이 실은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호기로움에 감탄사를 불러일으키는 초기의 젊은이다운 실험적 몇몇 작품을 지나, ‘우리 내부’의 소수에 대한 집중에서부터 대중을 향한 포화를 열었다. 그의 주목할만한 첫 개인전 명은 〈표준〉이었다. 표준은 한국 근대사회를 규정하는 가장 힘 있는 언어 중 하나이다. 사적인 자본인 공장에서 생산되는 모든 제품들은 국가가 규정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인 ‘표준’에 맞추어져야 한다. 공업표준은 물품을 상품으로서 유통시키게 하는 인증서이다. 근대화와 함께 국가권력으로서 행사된 ‘표준’의 시스템은 당연하게도 문화와 인간에 적용되었다. 신사임당이나 세종대왕의 모습을 전 국민이 모두 하나의 모습으로 상상하는 집단성의 원동력이 바로 ‘표준’이다. 위로부터의 강력한 제재의 수단으로 동원된 공업적 표준이 사회 구성원에게도 적용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문화와 개인에게 적용되는 ‘표준’은 내부의 존재를 타자화하고 개인의 차는 거세된다. 결국 억압과 폭력에 의한 표준화 시스템은 주체를 표준화를 향한 욕망적 존재로 화하게 한다.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이 실체들, 구별의 욕망과 그것을 도모하는 것들의 욕망에 대한 드러내기이다.

그의 작품에 따르자면, 표준의 준거는 권력적이어서 통합이 아닌 타자를 생산하기 위한 시스템의 원리일 뿐이라고 해석된다. 표준은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에게 가해졌던 것과 같은 분리 혹은 격리의 정책을 정당화한다. 근대 위생과 이성의 ‘합리적인’ 대응 방식이 식민지 권력을 정당화하였던 것처럼, 다운증후군과 자폐아라는 이른바 장애는 그들의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방식에 의해 구별하게 한다. 빠르게 재생된 춤 추는 장애우의 녹화 화면은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빠르게 재생된 필름 안에서 우스꽝스럽지 않을 수 있는 인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지팡이를 흔들며 걷던 뻗정다리 찰리 채플린의 가속화한 필름 속 삶이 눈앞을 스칠 때, 장애와 우스꽝스럽다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관객의 몫이 된다.

장애인 부부에게 명품 옷을 입혀 결혼사진을 찍어주는 〈웨딩프로젝트〉는 사회적 차별이 실은 자본주의의 속성임을, 그 욕망에서 발원한 것임을 드러낸다. 명품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 사진을 찍는 호사를 장애인 부부에게 누리게 한다. 결혼식 사진이라는 일상이 꿈을 실현하는 프로젝트 같아 보이는 이 낯섦의 실체는 무엇일까. 장애와 비장애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별 짓고 게토화 하는 전략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결과는 생각보다 참혹하다.

실체가 없는 관념들은 사회구성원의 고통의 실체이기도 하다. 임신과 육아에 의해 커져 버린 몸체의 아줌마들은 사회구성원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살을 빼야 한다. 출렁거리는 지방층은 더 이상 지모신의 당당함이 아니라 게으름과 식욕이라는 자본주의의 악을 상징할 뿐이다. 제어되지 않는 신체의 반응을 넘어서야 하는 아줌마의 비현실적 노력의 결과로 그들 삶은 현실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힘겹게 올라간 고층 건물 밖으로 내던져진 카메라가 훑는 시선들을 쫓는 우리의 시선이 눈물범벅이 되는 것은 아이엠에프-IMF, 나는 F 학점이다-를 겪은 1997년 이후 한국에서의 삶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 작가의 숨소리가 삽입됨으로써 가정의 가계를 책임지는 가장을 떠올리게 되고 자살을 택한 그가 바라본 마지막 세상의 모습을 공유함으로써 ‘루저’의 시선을 나 또한 갖는다. 시선의 공유를 통하여 작가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벗어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이른바 YBA 작가들을 대거 배출한 골드스미스에 유학을 다녀왔다. 어느 정도 학벌이 작용하는 한국사회에서 주변부에서 중심으로의 이동을 작가 스스로 경험하였다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서구세계의 유학은 일상적이지만 소수의 일이고, 과거 국가의 인재양성시스템에서부터 부모세대의 자본주의적 사회계층 형성의 욕망 체계로 이동되었지만 교육을 통한 계급의 차를 낳는다는 점에서는 변한 게 없다. 공리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의 학습은 국내에 돌아와 재회한 자본주의적 욕망의 천박함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차별과 편견에 대한 거친 항거와도 같았던 그의 작업이 욕망구조를 파헤치는 데 주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근대화에 동반된 상품의 선전과 정치적 선동의 프로파간다인 선전이 유비되는 언어적 작업은 철저히 자본의 모습을 띤다. 팝아트와 정크푸드를 떠올리게 하는 〈Coca Killer〉는 한국사회에서 단순한 자본주의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 이후 미국 군정과 그에 따른 서구 자본주의에 의해 생성된 한국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을 은유한다. 〈We are the One〉은 한국인 모두에게 88올림픽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급하게 편승한 코스모폴리타니즘의 허구성을 또한 은유한다. 그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고 인기 있도록 한 한창때 네덜란드 정물화를 닮은 화면은 밝고 반짝이며 세부를 들여다보는 재미로 유혹하는 키치의 모습이다. 화면 가득히 많은 것들이 그려져 있다. 먹다 남은 더러운 콜라컵에 붙어있는 하잘것없어 보이는 파리와 메뚜기들이 메멘토모리, 개선장군의 뒤를 따르며 죽음을 기억하라라고 외치는 고대의 노예임은 누구나 안다.

과잉의 이미지들은 〈Security Garden as Paranoia〉, 〈Super Monster〉시리즈에서 극대화한다. 갤러리 안 선반에 얹힌 물건들의 일관성 없음, 영웅적 괴물이라는데 어이없는 모습 앞에서 선택된 혹은 수집된 이미지에 직면한다. 서양인들이 동양의 물건들로 수집한 것들은 기호로서 조합하면 맥락없는 단어임에도 다다처럼 그것은 동양의 모든 것으로서 작동한다. 동양이라는 개념은 결국 물건으로서 상징된다. 그것은 개인의 공간으로 옮겨올 때조차 제국주의의 박물관적인 시각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최근의 〈마지막 잎새〉는 그리하여 글로컬리즘에 기반한 분단 이미지 소비하기가 아닌 지점에 이른다. 우리 내부의 타자, 목소리만 있고 실체는 없는 그들, 떠도는 욕망의 비가시적 이미지는 우리 내부의 주변부의 상징적 기호로 작동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작동의 메카니즘을 응시하는 작가는 한국사회의 특이한 현상을 소비와 착취, 열광과 냉소의 무한궤도로 파악한다. 자본주의의 장인(匠人)으로서 그의 작업은 스펙타클 하지만 공허하고, 소박하지만 강렬하게 한국 현대사회의 일상을 드러낸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