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류, 〈Circle for the New Moon〉, 2024, 캔버스에 유채, 259.1 x 387.8 cm © 윤미류

약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개인전과 그룹전을 통해 작업을 선보여 온 윤미류는 드물게도 사이즈가 큰 인물 중심의 구상 회화를 그리는 여성 작가다. 윤미류에 대한 잘 쓰인 비평이 이미 여럿 존재하기에 나는 처음에는 이 글을 인터뷰 형식으로 쓰려고 했었다. 그에게 유용할 만한 ‘다른’ 관점과 해석을 전개할 자신도 없는 데다 ‘지금’ 그래야 할 필요 또한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진행한 인터뷰의 말미에 어째선지 나는 작가의 작업에 대고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자꾸 갖다 붙이고 있었다.

비록 기존 비평으로부터 그리 멀리 나아가진 못하겠지만 기왕 이리된 김에 나는 만화, 애니메이션 같은 서브컬처와 케이팝 같은 대중문화의 시각적 약호와 (재)생산 프로세스를 내재화한 디지털 전환기의 세대로서 윤미류가 작업을 통해 모종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유사-기획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을 이 짧은 글에서 짚어 보기로 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작업에서 방점은 작가만큼이나 관객에게 찍혀야 할 것이다. 정확히는 ‘세계관’의 ‘플레이어’로서의 관객(성) 말이다.

대체로 기존 비평은 그의 회화가 사진, 영화와 같은 회화의 인접 매체와 맺고 있는 관계를 참조 삼아 어떻게 그가 회화의 고유한 시간성과 물질성을 구현하고 상연하는지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전개해 왔다. 이러한 논의에서 마땅히 회화의 주제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인물은 그의 “회화적 실험”을 위한 “도구”, 혹은 “알리바이”나 “미끼”로 간주되는데 이는 그가 인물의 고유한 맥락과 역사에 비교적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에서 인물은 단지 회화의 탈(脫)회화적 확장을 위한 “작은 불씨”에 불과하다. 이것이 통상의 인물 중심 구상 회화를 ‘읽어’ 내려는 관습적 독해 방식이 그의 작업 앞에서 줄곧 먹통이 되고 마는 이유다.

그런데 그의 작업에서 인물이 단지 회화를 위한 “매개체”로 ‘사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회화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대문자 ‘예술’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기라는 행위”의 “수행성”이 투사되고 “압착”될 수 있는 물질적/물리적 지지체로서 단순히 요구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 과정을 ‘회화’라는 언어로 번역하기 위해 존재하는 결과랄까.

윤미류에게 ‘그리는’ 과정은 이를테면 특정한 종류의 인지적 경험과 시각/촉각적 체험을 위한 “상상적/허구적 이미지”를 ‘제작하는’ 과정에 가깝다. 그는 주로 여성 인물에게서 받은 주관적인 인상을 모티프 삼아 전체 프로젝트의 ‘컨셉’을 구상하고 완성한다. 이번 개인전 《Do Wetlands Scare You?》의 경우 서구 신화와 전설에서 공포와 매혹의 상징이 되어 온 늪에 사는 여성 괴물의 형상을 현재 한국에 이식하고 ‘소생’시키려는 의도로 기획된 바 있다. 컨셉에 맞춰 물색된 장소를 일종의 환경 삼아 작가 겸 ‘감독’은 여성 인물 겸 ‘배우’에게 역할과 상황 같은 느슨한 연출 사항을 주문한다.

이후 즉흥적으로 연출된 혹은 포착된 현장의 장면은 아이폰의 ‘라이브 포토’ 기능으로 촬영되어 캔버스 위에 시퀀스 단위로 옮겨지는데 이 과정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이 여성 인물만이 가진 고유한 인상을 강조해 줄 수 있는 ‘세부’다. 하지만 이 ‘세부’는 실은 작가에게만 중요한데 왜냐하면 관객은 그처럼 정확하게 포착된 ‘세부’를 통해 유사성을 연결 지을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원본’의 정보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남는 것은 그러므로 “캔버스 밖을 응시하는 여자들”을 매개로 한 작가의 부재하는 몸과 “이미지 너머”의 서사에 대한 상상 그리고 캔버스가 방출하는 현장성과 현존성 넘치는 “무드”에 대한 감각이다. 물론 윤미류의 회화가 주는 지극히 ‘회화적인’ 쾌감, 즉 캔버스를 후려친 듯 거의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거칠고 빠른 붓질과 금방이라도 늪의 검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강렬하고 진득한 색감은 기실 그 어떤 요소보다 관객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외모’이자 ‘트릭’이다. 또한 근래 인물 중심의 구상 회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작품의 큰 사이즈는 그 자체로 여성 인물의 괴물적인 “힘과 미스터리”를 표현하고 상징하며 관객을 압도한다.

다시 말해 당연하지만 그의 작업이 관객의 상상/감각이라는 목적을 위해 설계된 ‘인터페이스’적 매개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나는 “탐정”과 같이 관객의 능동성을 강조한 윤미류의 작업에 대한 보기/읽기 방식에 대체로 별다른 이견이 없이 동의한다. 이러한 결론은 그의 작업에 정해진 내러티브나 의미가 없고 각각의 작업 사이에 고정적 위계 또한 없다는 사실을 단서로 삼고 있다. 이를테면 관객의 상상과 감각의 가능성(들)에 무차별적으로 ‘열려’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의 ‘자유’는 한편으로 어떻게든 더듬거리며 작업의 의미와 ‘메시지’를 찾으려는 해석학적 충동에 시달리는 비평가적 관객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작업 전체를 허구적 공유지인 ‘세계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개방하며, 회화 속 여성 인물을 일종의 텅 빈 ‘스킨’으로, 전시장을 아직 제작 중인 영화나 게임의 티저가 캡처되어 투사되는 ‘스크린’으로 간주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적극적인 ‘플레이어’ 관객의 자리를 상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여기서 ‘세계관’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라 “현실 세계와는 다른 사건, 요소로 만들어진 ‘가상 세계fictional universe’ 그리고 이 세계를 구축하는 뼈대인 ‘세계 설정worldbuilding’”을 뜻하는데 본래 SF와 같은 서브컬처 내 장르에서 사용되었으나 최근 십 년 사이 케이팝 아이돌이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같은 대형 엔터테인먼트 산업 내에도 빠르게 적용된 용어다. ‘세계관’은 ‘세계 설정’을 토대로 한 특정 인물과 사건이라는 최소 필수 요소만으로도 작동하지만 관객(혹은 소비/관람/향유 ‘주체’?)이 ‘세계관’의 빈 공간을 채울 ‘나머지’를 주입할 때라야 비로소 ‘완성’될 유지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세계관’을 이루는 숨겨진 필수 요소는 ‘세계관’의 ‘플레이어’인 관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세계관’과 ‘플레이어’에 대한 설명은 윤미류의 작업에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을 것도 같다. 윤미류의 이번 개인전 《Do Wetlands Scare You?》은 카펫과 커튼 등의 소품으로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어둡고 습기 찬 분위기를 연출한 1층과 그에 반해 정석적인 화이트큐브에 가까웠던 2층, 그리고 라인 드로잉 벽화가 그려진 1층과 2층을 잇는 높은 층고의 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드시 선후/인과 관계로 이어지지는 않는 일련의 연속적 이미지들 사이에는 으레 회화 전시가 그러하듯이 각자의 독립적인 공간을 유지하기 위한 일정 간격의 틈이 있었다. 어느 시점부터 나는 이 틈을 중심에 두고 전시장 공간 전체를 다시 인식하기 시작했다.

영화의 ‘쇼트’도 그렇지만 만화에서는 ‘칸’ 혹은 ‘패널’로 불리는 최소 단위가 있다. ‘칸’과 ‘칸’ 사이, 나아가 수십 수백 개의 ‘칸’ 사이의 이미지적/서사적 논리를 채우는 것은 그들 사이에 일정 간격으로 비워진 여백, ‘틈’에서 발생하는 독자의 연상 과정이다. 명쾌한 서사도 의미도 부러 모두 비워낸 윤미류의 ‘과정’으로서의 회화가 향하는 방향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관객의 주관적 경험이 아닐까. 전시장 공간은 각 작품 간 ‘틈’이라는 촉매로부터 자극된 관객마다의 상상과 감각으로 꽉 채워진다. 그들 각자의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상연되는 ‘무엇’인가가 이미 있다. 이 ‘무엇’은 쉽사리 ‘회화성’과 같은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를테면 지극히 윤미류라는 장르의 이름 아래서 가능한 체험을 가리킬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