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를 읽다 보면 삐딱하게 볼 만한 내용이 적지 않다. 꾀부리지 말고 매사에 성실할 것을 가르치는 교과서 같은 동화 「아기 돼지 삼형제」도 예외는 아니다.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무시한 채 지푸라기와 나무로 집을 지은 두 형은 여우에게 잡아먹히고 벽돌집을 지은 막내만 무사히 살아남는다. 벽돌을 한장 한장 쌓아 올린 성실함과 별개로 「아기 돼지 삼형제」는 초가집과 나무집을 나태함과 불안전함의 상징처럼 묘사하는 상당히 반환경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이만큼 우리 사회의 주거 정책과 딱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도 드물다. 특히 이 동화의 표면적 교훈인 튼튼한 벽돌집 판타지는 이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로 시작하는 새마을운동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실제로 시골에서는 초가지붕 대신 슬레이트 지붕을 얹었고, 도시에서는 판자촌을 밀어내고 양옥집이 들어섰다. 특히 성실함과 경제 발전에 대한 신화는 더 맹목적이어서 수도권에서는 1970년대 이후 벽돌보다도 튼튼한 콘크리트 아파트가 민들레 홀씨처럼 번식해 나갔다.’
동화가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벽돌보다 더 튼튼한 콘크리트 집마저도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단단한 건물도 여우가 뿜어내는 바람은 막아 낼지언정 재개발의 바람을 막아 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성실함은 곧 경제력을 의미하고 집은 경제력을 위한 중요한 재테크 수단인 사회에서, 거꾸로 집을 통해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성실하지 못함을 의미해 왔다. 결국 개발과 투자라는 명목이 수십 년은 끄떡없을 집들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다.
새마을운동의 농촌 근대화부터 88올림픽의 도시 정화, 2000년대의 뉴타운 건설에 이르기까지 현대사를 관통하는 주택 재개발의 역사는 의외로 쉴 틈 없이 일어났고, 재개발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일 수밖에 없어졌다. 전형적인 강남 아파트 키즈인 작가 정지현도 가족의 보금자리였던 5층짜리 잠실 아파트가 30층짜리 고층 아파트로 바뀌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스무 살이 된 때고, 아파트는 지은 지 채 30년이 되지 않은 때였다. 그 아파트는 완공 당시만 해도 단지 안에 병원이며 학교가 들어선 최초의 뉴타운이었다.
그에게 이 사건은 꽤 충격이었는데, 그간의 추억이 오롯이 깃든 공간들이 90퍼센트 넘게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친구들과 어울리던 놀이터며 학교와 집 사이에서 들락거리던 아지트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그의 집은 개발 논리로만 보자면 잠실 몇 단지로 구획된 아파트 상품에 불과했다. 그러나 작가에게는 생의 자궁으로서의 집이었다.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가 말하듯이 우리의 경험과 기억이 서린 모든 사물, 대상, 터전을 ‘기억의 장소’라고 부른다면, 정지현은 탄생과 성장 과정을 함께 한 집이라는 기억의 장소를 통째로 잃어버린 셈이다.
하지만 작가는 우리 시대 재개발의 허상과 파괴력을 둘러싼 심각한 고민을 던지지는 않는다. 주택과 집의 차이, 다시 말해 상품이 돼 버린 사물과 기억의 장소인 집의 차이를 찾기 위해 섬세한 감각을 열어 둘 뿐이다. 그렇기에 재개발이 예정된 버려진 단지에 눈길이 멈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오랫동안 방치된 그 침묵의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스탤지어 같은 것에 이끌렸다. 어쩌면 이제 곧 소멸할 공간이 머금은 과거의 기억과 흔적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