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ng Heeseung, Untitled, 2013, 131x170cm, Archival pigment print © Chung Heeseung

한 장의 사진을 감상하는 일과 한 점의 그림을 감상하는 일은 매우 흡사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행위이다. 둘 사이의 공통점이라곤 삼차원의 세계를 이차원의 평면으로 재현한다는 정도일 뿐 재현의 메커니즘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회화가 인간의 손으로 세계를 재현한 매체라면 사진은 카메라라는 장치의 도움으로 세계를 재현하는데, 이러한 차이는 결국 이미지를 보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정희승은 줄곧 작업을 통해 이러한 사진의 특수성을 밝히는 데 집중해 왔다. 특정 대상을 그릇 삼아 어떠한 개념을 전달하고자 하는 다수의 작업들과 달리 정희승의 작업은 그리하여 메타비평적이라 할 수 있다.


 
배우들의 내면 감정 표현한 ‘페르소나’ 연작

사진에 대한 그의 탐구는 인물사진 작업으로 첫 테이프를 끊었다. 배우들의 연기에서 발산되는 비탄의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나는 순간을 재현한, 그리고 대본을 읽으며 배역에 동화되어가는 과정을 재현한 〈페르소나〉는 사진이라는 기술적 이미지가 과연 인간의 내면을 포착할 수 있는지 묻는 작업이었다.

실제로 ‘사진’이라는 말 자체에는 단순히 대상을 객관적으로 재현한다는 뜻 이외에도 대상의 내면, 즉 ‘진짜 모습’을 ‘복제’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즉, 정희승은 배우들의 인물사진을 통해 그것의 가능성을 탐구해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사진 속 인물들이 배우이며, 특정한 대상을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관객은 알 수 없다. 작가의 원래 의도와 관계없이 관객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는 사진 속 인물들의 표정을 최대한 유심히 관찰하고 거기에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작가의 의도를 유추해내는 일뿐이다. 여기에서 작가가 설정한 의도는 관객의 해석과 무한히 어긋난다.

Chung Heeseung, ‘Amy’_from the series Persona, 2007, Archival Pigment Print, 120x84cm © Chung Heeseung

《부적절한 은유들》 작품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의미의 가능성’을 제시해

이후 정희승은 곧장 정물사진으로 그 범주를 넓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물사진과 달리 결과물을 예측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는 점차 우연적이고 충동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무엇이 사진 찍는 이의 관심을 끌게 하고, 그것을 배치하게 하며, 결국 사각의 프레임이 영구히 고정시키게 만드는 것일까? 그렇게 재현된 사물의 이미지는 과연 작가의 의도를 온전히 기록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의도는 명명백백하게 감상자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일까? 로부터 《부적절한 은유들》에 이르기까지 정희승의 사진은 이러한 질문들을 빼곡하게 담아내고 있다.

실제로 그는 작가의 의도 자체를 사진의 의미와 등가로 놓는 행위에 반대한다. 보는 사람에 따라 사진 속 대상을 관찰하는 밀도와 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의미가 고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오래된 조명등, 계단 손잡이나 세면대 따위의 일상적 사물들. 게다가 위아래가 뒤바뀐 채 걸린 몇몇 사진들은 순식간에 사물들의 원래 용도를 폐기시키고 다른 해석을 요구한다. 미리 정해진 정답지를 관객에게 제공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부적절한 은유들》 당시 전시장에 함께 전시한 속이 비어 있는 황동 튜브 오브제를 통해 ‘아무 의미가 없는 의미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요컨대 그는 의미를 고정시키고 붙잡아두지 않는 것이야 말로 사진의 본질적 특성이라 생각했다.
 


사진을 본다는 것은 관객 스스로 만들어낸 의미를 읽는다는 것

그가 생각한 이러한 사진의 본질적 특성은 서두에 언급했던 회화의 경우와 비교할 때 보다 확실해진다. 이를 위해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의 몇몇 개념들을 조금 빌려보자. 그의 말처럼 사진은 회화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이다. 회화는 인간이 세계와 직접 대면하여 얻은 사유의 결과를 재현하는 것이며, 이는 텍스트가 개입되기 이전의 상태를 가리킨다. 

회화를 전공한 경험이 있는 정희승 또한 그것이 육체적이며 물질적이라는 말로 회화의 이러한 특성을 잘 지적한 바 있다. 반면 사진은 회화와는 완전히 다르다. 사진은 카메라라는 장치를 통해 만들어 지며, 카메라는 붓과 달리 손이라는 인간 신체의 확장 수단이 아니다. 붓이 작가의 사유를 곧장 캔버스로 매개하는 것과 달리, 사진가는 오로지 카메라라는 장치가 지닌 프로그램 내에서만 이미지를 생산해야 하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사진가의 의도는 조리개와 셔터 스피드의 조합이라는 프로그램 언어의 제약에 갇히고 만다. 세계에 대한 사진가의 사유 결과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지와는 상관없이,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그저 카메라라는 장치의 프로그램이 생산한 기술적 영상일 뿐이다. 사진에는 작가의 붓질이 지나간 흔적이 없으며, 그것의 부재는 곧 작가의 의도로 향하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재현된 대상의 형태 및 구성을 통해 그것의 상징적 의미를 추적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관찰자에 따라 늘 서로 다른 답을 내놓고 만다.

정희승의 최근 전시명은 《장미는 장미가 장미인 것(ROSE IS A ROSE IS A ROSE)》 이었다. 서로 다른 7장의 장미 사진을 나열한 그가 이런 제목을 붙인 이유는 이제 명백해진다. ‘사진은 사진이 사진인 것’이라고, 즉 사진은 그저 프로그램에 따라 생산된 기술적 영상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작가가 사진을 통해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 해도 관객이 보는 것은 작가의 의도가 아닌 사진이 재현하고 있는 대상의 흔적일 뿐이다. 고로 사진을 본다는 것은 관객 스스로 만들어낸 의미를 읽는다는 것, 그 뿐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