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of Chung Heeseung 《Dancing Together in Sinking Ship》, Korea Artist Prize 2020 © MM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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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의 입구를 지나 몇 개의 계단과 복도를 건너 전시장에 들어가면, 나직이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우리를 맞이한다. 노래는 사각사각 가볍게 천정을 떠다니다가도 어느새 단자가 거꾸로 꽂힌 스피커 소리처럼 답답하게 웅얼거리며 바닥에 가라앉는다.

의자에 앉아 정해진 시간 동안 눈앞의 스크린을 견뎌야 하는 영화관과는 달리, 미술 전시장에는 대체로 몸을 피하거나 숨길 수 있는 작은 틈새나 샛길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작품을 바라보는 이들을 부드럽게 움켜쥐고 자신의 어두운 굴 속으로 함께 낙하하려는 작가들이 있다. 그러나 관객은 작품과 작품 사이를 무심하게 거닐며 작가의 손길을 가볍게 털어버리곤 한다. 그는 작가의 득의작 앞에서 스마트폰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작가가 숨기고 싶어했던 작은 흠결을 확인하기 위해 전시의 흐름을 거꾸로 되짚어 올라갈 수도 있다. 이 산만한 관객들이 서로 간섭하며 만들어내는 어지러운 동선으로 인해 작가의 의도는 대개 흐트러지고 만다.

즐겁게, 즐겁게, 즐겁게, 즐겁게
인생은 한낱 꿈에 불과하다네.

하지만 소리를 피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공간을 가득 채우고 물결처럼 찰랑거린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선우정아의 노랫소리는 마치 아주 느린 롤러코스터를 탄 것과 같은 기묘한 상승과 하강의 감각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며 눈을 돌리더라도 이 목소리에 휘감기지 않을 도리는 없다. 눈으로는 사진을 보고 귀로는 음악을 듣는다는 두 가지 감각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행복하게 결속되거나 불안하게 어긋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 인터뷰에서 정희승은 사진의 가장 큰 매력은 그 창작의 영역이 오직 시각만으로 제한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물론 시각이 단순히 눈으로 빛을 받아들이는 감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무언가를 보는 행위는 언제나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인식의 체계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정확하게 볼 수 있는가? 우리를 둘러싼 사물의 세계가 지닌 무한한 복잡성과 유동성에 비하면 우리의 시각이 처리하는 정보의 양은 대단히 적고 초라하다. 이것은 피와 살로 된 육체의 한계이며, 동시에 해석의 한계이기도 하다. 인간은 밤하늘의 별들이 그려내는 불가해한 형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상의 별자리와 그것에 얽힌 전설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존재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기호로 변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식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인간에 의해 굴절되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정보는 그저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지난 세기 초 사진에 쏟아졌던 기대감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더 늦기 전에 파국을 막아야만 한다고 절박하게 믿었던, 이를테면 발터 벤야민과 같은 이들이 있었다. 그는 자본과 상품, 생산과 소비의 공정이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현실의 구조가 점점 해독하기 어려운 것으로 변하고 있다고 느꼈다. 벤야민이 사진에게 걸었던 일말의 희망은 역설적으로 이 기계 이미지가 인간의 눈이 인지하지 못하는 디테일까지 무차별적으로 감광판에 담아버린다는 데 있었다. 그는 텅 빈 파리의 거리를 찍은 외젠 앗제의 사진을 ‘범죄 현장’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 사진에 기록된 미세한 디테일들이 불씨처럼 되살아나 사회의 구조와 허위를 간파하는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벤야민 자신이 전통적인 것들을 자본으로부터 탈환할 숨구멍을 찾기 위해 이전 세기의 자료들을 읽고 또 읽었듯이.

물론 사진이 기이하고 낯선 존재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카메라는 그 앞에 선 모든 현재를 무심히 과거로 변화시켰고, 인간이 ‘보고 있다고 믿었던’ 세계의 정돈된 모습이 아닌 기괴하고 부조리한 기계 이미지의 파편을 보여주었다. 사진은 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으며, 무엇보다도 벤야민이 믿었듯이 언젠가는 시간의 지층을 뚫고 눈 밝은 이들에게 도달할 잠재력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다시 말하지만, 오래전의 이야기다. 시간이 지나며 우리는 이 날것의 이미지들을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강력한 도구를 가지게 되었다. 기호학과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마르크시즘, 그리고 역사와 제도 같은 것들로 조립된 기계의 한쪽 구멍으로 사진을 넣으면 다른 한쪽으로는 꽤 그럴듯한 설명글이 출력될 수도 있다. 이제 사진은 친숙할 뿐 아니라 간단히 해석 가능한 대상이 되었다. 이미지에 함축된 의미와 그것의 디테일이 지시하는 바를 해부하듯 펼쳐 보여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담론의 언어는 과연 사진 한 장을 설명해낼 수 있는 해상력을 지닌 도구인가? 여전히 빛과 렌즈가 만들어내는 경이로움과 그 가능성을 믿는 작가가 있다면, 그는 어떻게 행동할까? 아마도 도망칠 것이다. 자신의 사진이 간단히 해석되어버리지 않도록 여러 함정을 설치하고, 자기 자신도 답을 알지 못하는 상태로 있으려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사진 이미지가 사고 실험의 결과물이 아니며, 담론이 한 장의 사진을 아무리 날카롭게 파헤치려 해도 결국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해골처럼 남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진이 오직 시각의 영역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에 흥미롭다는 정희승의 말은 그의 작업에 접근하는 일관적인 실마리를 제공한다. 즉 자신이 찍은 사진 이미지가 외부의 지식 체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저 작가는 사진을 통해 시각의 가능성을 더 해방할 수 있기를, 즉 더 명징하게,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마치 몸이 없는 존재처럼 모든 감각을 눈에 집중하며 대상을 향해 돌진하다 보면, 다른 감각은 물론이고 작가의 의도나 작업의 계기 같은 것들조차도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하얗게 말라붙어 떨어져 나가버릴 것이다.

이런 작업 방식은 실제로 포스트모던 비평 이론과 대결하던 지난 세기말의 문인들이 주장하던 ‘천천히 읽기’와 비슷한 면모가 있다. 글과 문장에는 분명 불가해한 속성이 있으므로 함부로 담론을 사용해서 해부하려 하지 말 것. 문학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까지 아주 천천히 대상에 집중할 것.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단어들 뿐이니, 그것을 조용히 바라볼 것. 이는 사진이 이미 낡아버렸으며, 우리가 사진에 대해 캐물을 수 있는 것이 ‘사진이란 과연 무엇이었는가’와 같은 고고학적 질문에 불과하다는 입장에 맞서 사진이 여전히 지닌 시각적 가능성을 옹호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작가는 사진 위로 흘러 다니는 노랫소리를 통해 과연 무엇을 얻으려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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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직사각형 모양의 전시장안에는 두 개의 기둥과 네 개의 가벽이 어슷하게 서 있다. 천정을 없애고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면 아마 핀볼 머신처럼 보일 것이다. 통상적인 사진 전시에서 가벽은 기존의 벽면과 함께 일시적으로 공간을 분할해서 작은 전시장들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맡는다. 그런 구조들은 대개 지루하지만 논리적으로는 명료한 편이다. 예를 들어 전시장을 네 개로 나누어 전시가 일종의 소설적 기승전결을 지니도록 할 수도 있고, 훨씬 더 촘촘하게 공간을 분할하여 개별 구역 각각을 특정한 주제나 작업에 할애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슷하게 선 정희승의 가벽들은 서로 맞물려 공간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자꾸만 보는 이가 길을 잃도록 유도한다. 일반적인 사진전을 관람하듯 전시장 벽면을 길잡이 삼아 걷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수시로 애매한 갈림길이 나타나는 셈이다. 작가는 유독 의미심장해 보이는 색을 골라 가벽에 칠하고 그 위에 크고 강렬한 사진들을 설치해 두었는데, 이는 관객들이 무심코 그쪽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하는 신호처럼 작동한다.

물론 걸어오던 방향대로 전시장 벽을 따라 직진하는 관객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다음, 또 그 다음의 갈림길이 등장해서 새로운 판단을 요구한다. 같은 지점에 맞닥뜨린 관객들은 마치 핀볼 머신 안의 구슬처럼 회전수와 속도에 따라 각각 다른 갈림길로 튕겨져 나아가게 된다. 하나의 모퉁이를 거듭 지나가기도 하고, 몇몇 사진을 놓쳐 흘려보내기도 하면서 그들의 동선은 어지럽게 산란된다. 가벽이 만드는 부정형의 공간에서 사진은 그저 관객들의 움직임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다.

책으로 비유하면 이 공간은 한쪽 끄트머리가 제본된 양장본이 아니라 상자에 담긴 카드 무더기와 같다. 대체로 사진 전시의 역사는 낱장의 사진을 어떻게 엮어서 작가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 노력의 집적체다. 산만한 관객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사진의 크기와 간격이 정교하게 조절되어 벽에 걸리며, 관객들이 시각적 클라이맥스를 경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전시는 나직하게 움츠렸다가 갑자기 질주하기를 반복한다.

반면 이 전시는 카드를 섞어 배치할 때마다 새로운 서사가 생성되기를 바라는 듯하다. 물론 길을 잃는 과정에서 생겨난 이야기들이 완전할 리 없으며, 그것들은 혼란스럽고 동어반복적일 것이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던가? 각자의 시간과 공간이 우연히 교차한 흔적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매끄럽게 봉합되어 있는 모습이야말로, 혹시 지나치게 작위적인 것은 아닌가?

작가가 관객에게 이야기의 재료로 제공하는 정보는 대단히 한정적이다. 이 사진들은 정희승이 자신의 동료 예술가들을 찍은 것으로, 그들은 한편으로 예술계 안에서 생존 투쟁을 벌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악전고투한다. 이는 괴롭지만 드문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적잖은 관객들 역시 자신을 비슷한 인물로 가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범박한 일상을 견디고 있는 잠재적 예술가들, 자신의 내면에 작가의 정체성이 숨겨져 있다고 믿는 이들은 사실 산업사회의 전형적인 인물형이기도 하다.

또한 그 믿음은 사진이 되어 벽에 걸려 있는 작가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공유하는 일종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세계는 자신의 논리를 바탕으로 마치 쳇바퀴처럼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쿤데라가 말한 ‘카프카적’ 상황과 같다. 즉 세계는 거대한 미로와 같고, 한가운데 던져진 인간은 그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다. 제도 안의 인간은 탈출할 방법을 찾기보다는 막연한 불안에 사로잡혀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끊임없이 자문자답하며 자신을 벌준다.1

이 전시는 우리가 속한 사회가 그렇듯 미술관 역시 꿈과 현실이 빈틈없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구성물이라는 점을 무심히 드러낸다. 벽에는 작가들이 사진의 형태로 결박되어 있고, 관객들은 벽과 벽 사이를 그저 돌아다닐 뿐이다. 인간을 제도에 복속시키는 것은 일종의 불안감과, 희망이다. 『변신』(1915) 에서 벌레로 변해 잠에서 깬 그레고르 잠자는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대신 이런 몸으로 과연 어떻게 출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불안해한다. 자신을 억압하는 제도에서 튕겨져 나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다소의 고통을 견디면 이 제도 안에 몸 붙일 곳을 지닐 수 있다는 희망은 정확히 동일한 감정의 다른 이름이다. 즉 한 명의 예술가로서 제도를 두려워하고 그것에 따라가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지만, 절대 그 밖으로 굴러떨어지고 싶지는 않다는 지친 마음이 만들어내는 뒤틀린 풍경이야말로 작은 미로를 헤매는 이 전시의 기본적인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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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면에 걸린 사진의 모습은 실로 다양하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인물들, 알약들, 가면을 쓰거나 손에 든 이들, 민물고기나 벌레, 고양이 같은 것들, 그럴듯한 비즈니스맨처럼 보이는 이들, 렌즈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이들과 시선을 피하는 이들, 기이한 허수아비처럼 보이는 인형들, 손, 날개, 구슬, 계단, 그림, 꽃의 사진들, 흑백 사진과 컬러 사진들, 태양 아래서 찍은 것들과 인공 조명으로 찍은 것들.

정희승 자신의 예술가 동료들에 대한 작업이라는 것만으로는 개별 사진들이 어떤 구체적인 맥락을 지니고 있는지 짐작하기는 어렵다. 프린트의 크기뿐 아니라 액자의 색깔과 간격, 높이까지 세심하게 조정된 이 사진들은 한편으로는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이야기의 재료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저 작가들의 사적인 공간과 연결된 밝은 구멍들처럼 느껴진다.

분명한 것은 이 사진들이 전통적인 ‘예술가의 초상’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정희승은 전시에 등장하는 모든 작가들의 인터뷰를 수집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사진을 찍는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인물 사진 작업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가 찍은 사진 속의 인물들은 딱히 전통적인 예술가들처럼 굴지 않는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예술적 야망은 얼마나 웅장한지, 내면에는 얼마나 깊은 상처가 있는지를 알 방법은 별로 없다.

사진의 발명이 인간의 몸에 가르친 것 중 하나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포즈’를 취하는 방법이었다. 사진은 처음부터 시간과 공간을 소멸시키는 매체로 알려져 왔다. 그것은 까마득하게 먼 곳의 모습을 부르주아의 가정에 전송하고, 과거가 되어버린 순간들을 현재의 공간에 소환한다. 즉 사진에 찍힌다는 것은 자신 한 장의 이미지가 되어 불특정 다수의 눈 앞에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술가들 역시 ‘예술가처럼’ 보여야만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주변의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 필요가 없었고, 렘브란트는 끊임없이 자화상을 고쳐 그리며 자신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예술가의 모습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진 발명 이후의 예술가는 속절없이 빠르게 작동하는 카메라와 사진가를 상대하게 되었다. 윌리엄 포크너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처럼 인쇄된 책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작가들도 있었지만, 거기에 성공하는 이는 실로 드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진 속의 예술가는 자기 자신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자기 자신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과연 사진으로 포착될 수 있는 것인가? 롤랑 바르트는 『밝은 방』(1980)에서 이런 혼란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이가 나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이’는 서로 다르며, ‘사진가가 나라고 생각하는 자’와 ‘사진가가 자신의 예술을 보여주기 위해 이용하는 피사체’ 역시 다르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나’는 분열하여 대립하기 시작한다. 바르트는 사진을 찍힐 때마다 자신이 진짜가 아니라는 느낌, 속이고 있다는 느낌이 스쳐간다고 썼다.2

가볍고 분열되고 분산된 것이 자아이며, 무겁고 움직이지 않으며 집요한 것은 이미지다. 이것 역시 바르트의 표현이다.3 우리는 『밝은 방』을 쓰기 한참 전에 ‘작가의 죽음’을 이야기했던 바르트조차도 카메라 앞에서는 어떤 강박에 시달린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럴듯한 예술가의 초상 사진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불안해하며 여기저기로 날뛰어 도망가는 여러 자아들을 주섬주섬 모아서 ‘예술가’라는 라벨이 붙은 통 안에 쑤셔 넣어야 하는 것이다. 대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어쩌면 우리는 그런 예술가의 이미지가 여전히 작동하는 미술관이라는 제도가 하나의 터무니없이 늙고 거대한 몸이라고 상상해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서 있는 전시장은 미술관의 눈이다. 제도는 이 전시장을 통해 우리를 바라본다. 혹은 이곳은 미술관의 입 속이다. 우리는 혓바닥처럼 축축하고 부드러운 곳을 걸어 다니며 그 뱃속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는다.

제도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의 일부가 되는 일이다. 이 전시장과 이어진 길고 긴 목을 통과해서 미술관의 내장 안에 들어가면, 반쯤 제도가 된 늙은 예술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예술적 실천을 통해 세상의 범속함에서 벗어난 개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작가들, 심지어는 세계 자체를 협소한 미로 같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를 펼쳐 보여줄 가능성의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거기에 있다. 미술관 수장고에 있는 예술가의 오래된 초상 사진들을 모아서 하나의 전시를 연다면, 그것들은 이 전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들은 정말로 ‘예술가처럼’ 보일 것이다. 사진에 찍힐 때마다 자신을 기꺼이 괴물 미노타우루스에 비유하던 피카소처럼. 물론 그가 피카소인지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저 눈빛이 좀 고약하고 머리숱이 적은 노인처럼 보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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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벽면에 걸린 가늘고 긴 흰색 선반들에는 엽서 크기의 종이가 채워져 있다. 이것은 사진 속 작가들의 말을 마치 하이쿠처럼 발췌하여 디자이너 박연주가 만든 서른세 종의 ‘타이포그래피 시’다. 내용은 주로 푸념에 가까운 반면 디자인은 한껏 섬세하고 정교한 탓에 기묘할 정도로 읽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제법 탐욕스러운 이들이라고 할지라도 서른세 장의 종이를 전시장에서 모두 읽고 챙겨가기는 어려울 것이고, 설령 가져간다고 해도 이것이 누구의 말인지 알 도리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진을 보고 “하루 종일 누워 있는/저 새끼/열심히 산다”라는 말을 한 이는 대충 짐작해볼 수 있지만 “밀고 당기면서/미니멀해지다가/이제는/없어지는 지경”이라는 말을 한 이를 알 방법은 없다.

사실 하이쿠의 특징 중 하나는 그 극단적으로 짧은 길이로 인해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자신과 타인의 경계가 대단히 모호하게 설정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아마도 가장 유명한 하이쿠일 마츠오 바쇼(松尾芭蕉)의 “오래된 연못(古池や)/개구리 뛰어드는(蛙飛び込む)/물보라 소리(水の音)”에서, 말하는 이와 듣는 이는 각각 어디에 있는가? 목소리는 잘 구분되지 않은 채 뭉쳐져 허공을 천천히 맴돈다.

전시장에 비치된 ‘타이포그래피 시’를 전부 펼쳐놓고 읽다 보면, 주어가 모두 의식적으로 제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령 하이쿠라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다. 이로 인해 관객은 자신의 손에 쥔 종이에 적힌 말이 벽에 걸려 있는 이들 중 누구의 것인지 잘 구별할 수 없으며, 이것이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 이 말들은 마치 종이로 만든 인형의 옷처럼 누구에게 걸치든 대충은 어울리고, 대체로는 어색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 종이들이 전시에 덧대는 의미가 그리 가벼운 것은 아니다. 전시장에 비치된 예술가의 말이 정작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좋든 싫든 한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원천처럼 생각되던 ‘예술가의 내면’을 정희승이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서른세조각의 말들 중 자신의 의지를 구속하는 운명에 대한 분노와 투쟁심을 지닌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내면적인 동기가 이렇게 한없이 가벼워져 버리게 된, 협소한 미로와 같은 세계에서 예술가에게 남아 있는 가능성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그저 이곳에서 자신으로 존재하는 일을 견디며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일일까.

알 수 없다. 나는 종이에 씌어진 말들이 하나같이 조금쯤 농담처럼 보인다는 데 주목하고 싶다. 가능한 결론은 두 가지다. 첫째, 비극보다는 희극이 훨씬 절망적이라는 점이다. 비극이 현실을 이겨내고 마침내 전진하는 인간을 보여준다면, 희극은 모순에서 파생되는 웃음의 공허함을 드러내는 데 멈추기 때문이다. 둘째, 그럼에도 이 글들은 꽤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지속되는 어떤 지점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예술가의 작업이 단지 작가의 내면을 토해내는 것이 아니라 탈출의 가능성이 없는 세계를 견디며 작업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어떤 탐사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시각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을 얇게 저며내듯 제거하고, ‘아직 의미가 도래하지 않은 상태’에 멈추려 노력해온 정희승은 전시장에 음악이 흘러다니게 하는 것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 했던 것일까. 혹시 그는 마음을 바꿔 시각과 청각으로 각각 흘러들어오는 정보가 서로를 자극하면서 우리를 어떤 절정의 고양감으로 이끌기를 바랐던 것일까. 마치 할리우드 영화의 한 시퀀스처럼.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선우정아의 사각사각한 목소리는 알 수 없는 연민의 감정을 함뿍 담은 채, 우리의 귓전에 계속 당신의 배를 저으라는 말을 끝없이 속삭인다. 영화관과 미술 전시장이 다른 점은 하나 더 있다. 영화는 끝난다. 크레딧이 올라가고 불이 켜진다. 그러면 모두가 이제 영화관에서 나가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원한다면 아주 오래 걸으며 이 전시장을 헤맬 수 있다. 세계를 걷는 미술가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어쩔 수 없이 즐겁게, 즐겁게, 즐겁게, 즐겁게.


 
1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권오룡 옮김 (서울: 민음사, 2013), 145–149.
2 롤랑 바르트, 『밝은 방』, 김웅권 옮김 (서울: 동문선, 2006), 27.
3 같은 책, 25.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