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강, 알트키르쉬, 2020년 6월 19일 / 라인강, 바젤, 2020년 6월 19일 © 엘피 튀르팽

2020년 6월, 이슬기는 내가 매일 지나다니는 두 개의 강에서 물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고, 이 글은 그 요청에 답하며 시작되었다. 그중 하나는 내가 예술감독으로 있는 CRAC 알자스(Centre Rhénan d’Art Contemporain Alsace)가 위치한 프랑스 마을 알트키르쉬에 흐르는 일강이고, 두 번째는 이웃 도시인 스위스 바젤을 가로지르는 대하인 라인강이다.

CRAC의 ‘R’(Rhénan)은 라인강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하다. 알자스 평야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통과하는 긴 하천인 일강은 라인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라인강은 독일과 프랑스의 경계를 나누며 북극해로 흘러 들어간다. 이 두 강에서 채집해 이슬기에게 우편으로 보내진 물은, 그것이 흐르던 곳의 모양을 연상시키는 작은 유리 용기에 담겨 기다란 체인 펜던트가 되었다.

이 물은 이슬기가 세계 각지에서 함께 일했던 여러 명의 큐레이터들이 각자 주변의 강과 바다에서 채집한 물들과 함께 나란히 벽에 걸렸다.팬데믹이 우리의 몸을 먼 거리,만남의 부재,검역, 그리고 격리로 속박하는 지금, 이슬기는 이러한 방식으로 서울에서 연구하고 전시 만드는 과정을 통해, 단지 은유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으로, 그와 동행하는 예술 공동체를 구성하고, 나아가 부재하는 상대방의 몸들을 전시장에 집결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그 물의 표본을 구성하는 물질들은 그것을 발송한 사람의 주변 환경과 광물, 박테리아, 미생물, 심지어 이를 둘러싼 독성 입자들뿐 아니라, 그들이 활동하는 정서적, 정치적, 예술적 영토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이슬기, 〈뱀장어〉, 2012 © 이슬기

강물을 채집한 장소를 기록하기 위해 촬영한 두 사진을 다시 보니, 이슬기가 CRAC 알자스에서 열렸던 두 그룹전에 출품했던 작업들이 떠올랐다. 그 중 앞선 그룹전에서는 뱀장어 형상을 한 낚시 도구를 조각 작품으로 선보였다. 그것은 아마도 강가에서 주워 온 것으로 보이는 긴 나뭇가지였다. 그는 나뭇가지의 껍질을 벗겨 광택을 내고 작은 칼로 파낸 뒤 흑연으로 전체를 칠해 생선 껍질과 같이 빛나게 하였고, 삼지창으로 그 동물의 머리를 완성했다. 조작할 수 있는 이 작업은 《안티-나르시스》 전에서 미술관 입구에 놓여 전시 주제를 암시했다.

전시는 관객과 작품 및 작가와의 관계, 그리고 주체와 객체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스스로를 인식하기 위한 대상으로서 작품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을 지닌 작가들이 생산한 사유의 한 형태로서 바라본 것이다. 이 전시에서 작가들은 어떠한 오브제를 생산하는 대신, 작품이 어떤 형식을 취하고 발언하게 된 환경으로부터 그 장치와 개념적 체제를 빌려와 발상의 틀을 구축했다. 이는 마치 다른 사람이 그것들을 구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전시에서 서로의 관점을 교환하고 타자의 시점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은색 뱀장어 형태의 이슬기의 〈뱀장어〉(2012)는 뱀장어를 잡기 위해 만들어진 작살처럼 생겼다. 그것은 관객이 보이는 사물의 시점에서 그 사물을 관찰하도록 하고, 발상의 전환을 유도하여 예술을 변화하는 주체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면서 이 전시의 실천을 활성화한다. 조작할 수 있는 이슬기의 작업들은 이렇듯 매우 수행적으로, 관객의 시점을 사유의 모티브가 된 대상의 입장으로 바꾸어 놓는다. 또 다른 전시실에서 이슬기는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된 한국 전통 이불인 누비이불을 선보였다. 


이슬기, 〈U: 수박 겉핥기〉, 2014 © 이슬기

2014년부터 통영의 뛰어난 누빔 장인과 협업하고 있는 이슬기의 기하학적 색채 구성들은 ‘누워서 떡 먹기,’ ‘수박 겉핥기,’ ‘오리발 내밀기’와 같이 이미지가 매우 풍부한 한국 속담을 시각적으로 치환한 것들이다. 우리가 잠을 자고, 꿈을 꾸는 이불이 우리에게 말을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몸을 감싸고, 따뜻하게 덥혀주고, 보호하는 이 작업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우리의 몸뚱이를 꿈이라는 현실로 옮겨 놓는다. 그러다 어느 날 영적인 것들과 불길한 말들이 깃드는 흑백의 자리를 남기고 색채들은 이불을 떠나갈 것이다. 악몽들의 연속으로.


이슬기, 〈U: 칼로 물베기〉, 2017 © 이슬기

2020년 6월의 어느 날 해 질 녘 라인강변에서 촬영된 두 번째 사진은 어스름한 보랏빛을 내뿜으며 CRAC 알자스에서 열린 또 다른 그룹전 《지그재그 절개》에서 이슬기와 함께했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이 전시에서 이슬기는 작품과의 관계가 함축하는 변환의 과정을 더욱 깊이 탐색했다. 알트키르쉬의 황혼 녘 보랏빛으로 채색된 전시장 안에서 이슬기는 전시장 벽과 같은 색의 보랏빛 수프를 관객들에게 대접했다. 알트키르쉬에서 나는 제철 채소(자주색 당근과 보라색 버섯)로 요리해 만든 수프는 지역 도예가가 빚은 그릇에 담겨 제공되었다.

이슬기는 우리가 먹는 것과 보는 것의 색이 같고,그로 인해 몸의 안과 밖의 색이 같아진다면 우리는 투명인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그런 환경에서 주체가 사라지고 녹아버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색을 인지한다는 것은 그 색이 지니는 관점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것을 흡수해 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색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슬기, 〈수프〉, 2017 © 이슬기

이 기나긴 도입부를 거쳐 이제 이번 전시 〈동동다리거리〉의 문에 다다랐다.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이긴 하지만,이 프로젝트를 특징짓는 네 개의 문 역시 천천히 변형을 거치게 되었기에,원래 색칠된 긴 각목을 복잡하게 쌓고 엮어 전시장의 크기에 맞춰 만들 계획이었던 기념비적인 문들은 점차 비물질화되었고,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전통의 장식적인 색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그렇게 원래 거대한 나무 조형물이었던 문들은 열린 문의 문살을 의미하는 네 개의 대형 벽화로 바뀌었다. 나무의 기하학적 얽힘은 색선들의 얽힘으로 대체되었다.

그것은 한국의 전통 건축이나 절의 외부를 단장하는 단청 전문가들과 협업으로 만들어낸 색채의 얽힘이다. 오브제가 사라진 회화는 장식적 기능을 버리고 순수한 행위 (agency)가 되었다. 안료들은 활기차고 강하다. 네 개의 문은 네 방위에 해당하는 네 가지 톤, 또는 음영으로 구성된다. 살갗의 색에서 (한국에서 악한 기운을 떨치기 위해 먹는 팥죽의 색과 비슷한) 진갈색으로 변해가는 문, 노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변해가는 문, 연보라색에서 진보라색으로 변해가는 문, 파란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해가는 문이 그곳에 있다.


경복궁 집옥재, 서울 © 엘피 튀르팽

네 개의 문은 각각 두 개의 문틀로 구성되고, 각 문틀에는 반달 또는 달의 일부 형태가 있어서, 집안에 있는 방의 덧문을 통해 보는 밤하늘의 별을 떠올리게 한다.이슬기의 이불들이 우리 몸을 잠과 꿈으로 빠져들게 한다면, 여기 색칠된 문들은 기이하게도 우리 몸을 비유적으로 방의 공간에 빠져들게 한다. 그것은 밤의 내밀함 속에서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달토끼를 찾는’ 것이다. 몸의 내밀함, 특히 여성의 몸의 내밀함은 그것이 얼마나 비물질적인지와 상관없이 이 장치 안에서 집결되고, 그들의 존재는 지연된다. 1990년대에 녹음된 노년의 여성들이 부르는 ‘다리세기’ 민요는 공간에 리듬감을 부여하며 박자에 맞추어 관람하게 한다.아이들이 마주 앉아 서로의 다리를 번갈아 끼우는 놀이를 하며 부르던 이 노래는,다섯 개의 목소리로 반복되며 일종의 주문이 된다.

전시장의 벤치 구조물 위에는 유럽에서 번성한 실내 테이블 게임 ‘바가텔’의 형태와 체계를 차용한 나무 오브제들이 놓여있다. 바가텔은 당구로 전승된 일종의 아날로그 핀볼 게임으로 오늘날 일본 파친코의 옛형태라고도 할 수 있다. 핀이 박히고 구멍 뚫린 경사진 나무판 위에서 구슬과 채를 이용해 게임을 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바가텔’이라는 단어는 프랑스어에서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중요하지 않거나 쓸모없는 것, 또는 값어치가 없는 것을 의미하는 한편, 육체적 사랑이나 성을 뜻하기도 하고, 단순하고 가벼운 음악을 가리키기도 한다.

요즘은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바가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많은 표현들은 ‘바가텔을 좋아한다,’ ‘바가텔만 생각한다,’ ‘더 이상 바가텔에 관심이 없다’ 등에서 볼 수 있듯 성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슬기가 만든 조작하기 쉬운 바가텔은 사물의 용도와 그 다양한 의미를 종합한다. 구멍과 못들의 구성은 여성의 몸 전체, 또는 그 성을 연상시키거나 동시에 숨기면서 성적 행위를 게임을 통한 의례로 치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슬기가 전시에서 만들어낸 형태와 대상들은 매우 강한 성적인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강물 또는 바닷물이 담긴 펜던트의 긴 체인을 목에 걸면 다리 사이로 내려온다. 여인들이 부르는 다리세기 노래에서처럼 다리 사이로. 프랑스 속어에서 ‘달’은 ‘엉덩이’를 의미하는데, 이슬기와 함께 달토끼를 찾아 문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은,대중적인 이야기에 담겨 있는 숨겨진 모티브를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는 이렇게 장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지역의 전통적 실천들을 탐구하고 실험한다. 그것들을 응축하는 인식론, 대안론을 모색한다. 마냥 수수께끼 같은 이런 실천들을 대중적 움직임, 세계에 맞서 반응하고 저항하는 힘들로 추적해 나간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