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작업의 제목 〈동동다리거리〉는 고려시대 민요 ‘동동 (다리)’에 민요 형식인 ‘달걸이’를 연결한 이슬기식 신조어다. 둥둥거리는 북소리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동동’은 고려시대 한 여인이 부른 노래로서 달마다 다른 내용을 다루는 ‘달걸이’ 민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작가는 이 ‘달걸이’라는 단어에서 달을 거는 동작이나 달을 걸기 위한 장치를 연상하는가 하면, “달거리”로 발음되는 ‘거리’를 걸어 다니는 바깥 세상과 연결하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 연상은 일견 아이들 놀이처럼 장난스럽고 무의미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30년 남짓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작가에게 프랑스어나 한국어 모두 ‘익숙하면서도 낯선’ 언어일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작가가 언어와 맺는 관계가 단순한 말장난을 넘어,익숙함 속에서 낯선 것을 찾고 낯선 것을 익숙하게 다룰 수 있는 새로운 문법을 가능하게 한다.
〈동동다리거리〉는 제목이 만들어진 방식처럼 익숙함에 기대지 않고 상상력을 자극하며 전시를 구성하는 문, 물, 놀이, 노래를 ‘생동하는 표상’으로 전환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유희와 연상작용으로 구현한 작품들을 설명하거나 이해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용이한 일은 아니다. 리처드 세넷은 그의 저서 『장인』(2009)에서 손동작과 생각의 관계를 설명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세넷은 세 명의 요리가가 요리법을 설명하는 방식을 사례로 들며 이들이 사용하는 공감적 예시, 장면서사, 그리고 은유하기의 효력을 강조하는데, 이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유가 곧 훌륭한 조리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방법이 비단 요리법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 컴퓨터 사용설명이나 음악 지도(指導)에서부터 철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적용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요리사가 은유를 통해서 요리법을 설명하는 것과 작가의 작업을 동일 선상에서 연결 짓는 일은 비약일 수도 있으나, “앞으로도 구르고 옆으로도 번지면서 새로운 의미를 쓸 수 있게 해 주는” 은유의 특징은 이슬기의 작업을 이해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슬기의 언어와 생각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익숙함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상상력을 자극하며 ‘살아있는 형태’로 거듭나게 된다. 즉,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유의 프로세스와 그것을 시각적 형태로 구현하는 것이 곧 이슬기의 작품인 것이다. 이슬기에게 은유는 작업의 동력이자 곧 작품의 형태가 되며, 이는 동시에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치가 되어 전시의 전망을 한층 더 풍요롭게 한다.
은유로 말하는 전시
〈동동다리거리〉라는 제목은 전시의 구체적 의미 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의 소리와 리듬과 움직임은 전시를 예고하는 팡파르처럼, 혹은 주술처럼 작동한다. 〈동동다리거리〉의 핵심 요소들인 ‘문, 물, 놀이, 노래’ 그 자체는 중성적이고 중립적이며 심지어는 추상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요소들은 한국전통 문살, 문양, 단청, 다리세기 노래, 17세기 프랑스의 놀이기구, 세계 각국의 강물과 지인들을 연루시키며 구전문화, 수공예, 놀이문화, 그리고 현대미술과의 관계를 탐구하게 된다.
이러한 다양하고 이질적이며 시대착오적인 요소들은 동일한 시공간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연결되며 전통, 공동체, 물질과 문화, 인공물과 생명체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안한다. ‘동동다리’라는 민요를 선택하게 된 배경은 작가가 최근 몇 년 전부터 진행해 온 구전문화 연구의 연장선에 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여성들이 불렀던 속칭 ‘야한 민요’ [프랑스에서는 ‘가벼운 노래’(chanson légère)라고 표현한다]를 조사하고 전수자들과 함께 협업하면서 현대적 요소들을 개입시킨다. 한국 민요에서도 이렇게 가볍고, 은밀한 노래를 조사했지만 원하는 민요를 찾지는 못한 작가는 이에 준하는 내용을 담은 ‘각설이타령’과 함께 ‘달’을 중심으로 이번 전시의 밑그림을 그린다.그는 예전에 만든 보름달 속 토끼를 닮은 커다란 북과 신문고를 연결하며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광장을 상상한다.
〈동동다리거리〉에서 ‘거리’는 광장의 표상이 되고, 전시는사람들과함께다양한서사가생성되고교환될수있는혹은노동요나혁명의노래가울려퍼지는 광장을 은유한다. 이제 이 광장(전시) 으로 들어가 보자. 광장은 거의 텅 비어있다. 아주 최소한의 장치들이 무심하게 여기저기 놓여있을 뿐이다. 작가는 이 텅 빈 공간을 두고 “공간을 벗긴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공간을 발가벗긴다는 의미겠다. 이런 의도는 ‘야한 민요’와 연관성이 있는 걸까. 아무튼 이 텅 빈 광장의 느낌은 나쁘지 않다. 이 ‘벗겨진’ 광장은 전혀 초라하거나 빈곤하지 않다. 항상 넘쳐나는 정보에 노출되어 있고 물질적 풍요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결핍과 상실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며, 의도적인 결핍과 절제된 상실의 광장에서 우리는 새롭고 이색적인 서사가 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 이슬기 특유의 화려한 색채나 형태는 없다.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키는 기하학적 벽화, 벤치처럼 사용할 수 있는 무채색 시멘트 기둥을 닮은 좌대와 나무로 제작된 구조물, 보일 듯 말 듯한 유리병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한 노래소리가 전부다. 하지만 이러한 최소한의 장치들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은 없어 보인다. 광장에는 벽화로 구현된 네 개의 문(〈북동문〉, 〈북서문〉, 〈남서문〉, 〈남동문〉)이 있다. 출구와 입구가 애매한 사방으로 활짝 열린 이 문들은 일반적인 문과는 사뭇 다른 모양새다. 달의 회전과 문살의 기하학적 구조가 합쳐서 ‘달-문’의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여기서 반원(잘린 달)이 서로 포개지면서 둥근 달이 되어 회전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고 권유한다. ‘달-문’의 이러한 움직임은 광장을 비추는 달을 은유하기도 하고 만삭의 여인을 닮아 있기도 하며 동시에 미니멀한 기하학적 벽화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의 유일한 색조 작업이기도 한 이 ‘달-문’(〈북동문〉, 〈북서문〉, 〈남서문〉, 〈남동문〉)은 단청 장인들이 조개 분말이 들어간 단청 안료를 섞어서 직접 그렸다. 전통 단청색에는 존재하지 않는, 보라색의 등장은 이질적 개입 그리고 인공과 자연의 공존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광장 한가운데 기둥 뒤에 살짝 가려지게 놓인 구조물인 〈13332244〉(2020)가 있는데, 벽에 그려진 ‘달- 문’ 벽화의 격자 배열이 이 문살 구조물의 격자무늬와 닮아있다.
이 구조는 우물 정자(井)를 참조했지만 네 겹의 살이 겹쳐지면서 한국전통 문살을 재해석한 기하학적 형태로 탄생되었다. 작가는 이 구조를 “달과 가락을 품은 문(살)”이라 표현하는데, ‘동동’과 같은 사랑가의 장단을 배열하며 여성들이 부르는 사랑가의 악보를 은유하고 동시에 문살의 연결방식과 배열 규칙은 남녀 혹은 음양의 관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아주 단순한 ‘달-moon [문]-문’의 언어유희를 통해서 작가는 달의 회전(원형)과 한국전통 문살(기하학적 구조)을 연결하고 회전시키며 “문틀이 사라지며 문‘살’이 ‘뼈’대가 되기도 하고 내용이 되고” 형태를 상상한다. ‘달-문’은 움직임과 유연성을 은유한다. 열고 닫고, 내부가 외부가 되고 외부가 내부가 되며, 익숙한 것이 낯설게 또 낯선 것이 익숙하게 보이는 이색적인 광장으로 향하는 문인 것이다.
호젓한 광장에는 기역(ᄀ)자형 길고 나지막한 회색 구조물이 있고 그 위는 이색적인 목재 놀이기구 (〈바가텔 1〉, 〈바가텔 2〉, 〈바가텔 3〉) 세 개가 비치되어 있다. 알듯 모를듯한 이 놀이기구는 17세기 루이 14세 때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바가텔 놀이에서 유래한 것으로 오늘날 당구, 핀볼, 파친코의 전신이라고 볼수있다. 바가텔 놀이는 막대로 공을 굴려서 작은 구멍에 넣는 놀이다.이기구는목재판에박힌작은 못들로 이루어진 경계선들과 그 사이사이에 지정된 작은 구멍들로 구성된다. 하찮은 물건이나 쓸데없는 일 또는 남녀의 정사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바가텔’에서 유래한 이 놀이는 고고학자 마리야 김부타스가 발견한 선사시대 여신의 몸을 입고 유니크하고 관능적인 ‘조각-놀이기구’로 재탄생한다. 〈바가텔〉 옆을 지나다 보면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노래가 들린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듯한 노래는 이목을 끌기에는 너무 소박하며 광장의 노래치고는 존재감이 떨어진다. 〈다리세기〉라는 이름의 이 소리들은 다리세기 놀이를 할 때, 세는 숫자 대신 아무 낱말이나 넣어서 부른 노래들이다. 통속적이고 투박한 낱말들이 연결된 무의미한 내용이지만 반복적 장단과 조화를 이루며 묘한 중독성을 유발한다. 할머니들이 직접 부른 노래들 다섯 곡이 1시간마다 5분, 10분, 15분, 30분, 45분에 흘러나온다. 〈동동다리거리〉의 광장에서 〈바가텔〉과 〈다리세기〉는 놀이문화와 구전문화의 소박한 기념비로 존재하며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노는 시간’, ‘비생산적인 노동’, ‘세속적 토속적 가치’를 재조명한다.
공간 한쪽 벽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아주 작은 다양한 형태의 유리병들이 설치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빛의 흔적들만 보인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들이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투명한 유리 용기 속에 물이 들어 있는 것이 드러난다. 이 물은 아주 멀리 유럽과 미국에서 건너온 물이다. 작가는 지인들에게 그들이 사는 지역에 ‘바다로 통하는 강’(河口)이 있다면 그 물을 채집해서 보내 달라고 요청한다. 이러한 행위는 코로나19 범유행으로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세계에서 이동, 자유, 교류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은유한다. 벽에 걸린 유리병들 전체의 제목은 〈강과 바다 사이〉이지만 각각의 유리병은 채집된 강의 이름과 작가의 지인 이름이 더해지고 유리병 모양은 그 물이 채집된 강의 모양을 닮아 있다. ‘바다로 통하는 강’은 세계로 연결되며 유리병 속의 물이 된 그 지인들은 팬데믹 위기 속에서도 그 누구보다 먼저 전시를 감상하기 위해 서울에 도착하게 된다.
바구니를 직조하다
이슬기는 그동안 ‘이불 프로젝트 U’, ‘나무 체 프로젝트 O’, ‘바구니 프로젝트 W’ 등 지역적 정체성, 토속문화, 전통을 탐구하고 수공예와 장인들을 관찰하며 거기서 발견한 특징들을 조형언어로 전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누비이불 수공예로 제작된 오색찬란한 기하학적 추상, 오래된 너도밤나무과의 나무로 만든 둥근 나무 체 조각,야자수 잎으로 짠 바구니 조각은 모두 이슬기가 지역 장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만든 작품들이다. ‘바구니 프로젝트 W’는 작가가 멕시코 오악사카 지역 원주민들과 협업으로 진행했던 프로젝트다. 이 마을 사람들은 세 살 때부터 야자수 잎으로 바구니를 짠다. 바구니 짜기는 이 작은 산골 마을을 지탱하는 일상이며 놀이이자 생업이기도 하다. 행위로 전수되는 바구니 짜기는 이 마을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반면 이들이 오래전부터 바구니 짜면서 사용해 왔던 익스카텍이라는 그들의 언어는 멕시코 국어인 스페인어에 밀려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 작가는 원주민들과 함께 직접 짠 바구니에 익스카텍 언어로 제목을 붙이고, 프랑스의 금속공예 장인들이 만든 기하학적 좌대(플라밍고의 긴 다리를 연상시키는) 위에 바구니를 살포시 얹어 놓는다. 바구니들의 모습은 인간 같기도 하고 동물 같기도 하다. ‘바구니 프로젝트 W’의 W는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페렉의 『W 혹은 유년의 기억』(1975)과 ‘오악사카 원주민의 바구니 짜기와 익스카텍 언어’가 만나는 상상의 장소 같은 것이다. 이슬기의 그 작업에서 우리는 (언어)소멸, 단절, 상처 그리고 공동체의 기억을 재구성한다. 여기에서 〈바구니 프로젝트 W〉를 중심으로 살펴본 수공예적 실천과 구전문화, 그리고 현대미술이 그것들과 어떻게 만나며, 어떤 새로운 전망을 가능하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이슬기의 작업세계의 근간을 이루며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바구니 프로젝트 W’, ‘이불 프로젝트 U’, ‘나무 체 프로젝트 O’는 ‘은유’의 옷을 입고 화려한 색조와 독특한 형태로 탄생하지만 단순히 관조의 대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또 장인의 숙련된 기술로 정교하게 제작된 바구니, 이불, 나무 체가 전통수공예의 재조명을 위한 것은 더욱 아니다. 즉, 이슬기의 작업은 수공예를 현대미술 형태로 전환한 조각이 아니다. 그의 작업에서 현대/조각과 전통/수공예의 관계는 서로 연결되고 움직이며 보다 풍요로운 전망을 품게 된다.
나는 이슬기의 이러한 작업방식에서 영국의 저명한 인류학자 팀 잉골드의 ‘바구니 직조’에 관한 아름다운 설득력 있는 사유를 보았다. 그는 “… 동작 (직조)은 선형적 역사처럼 모든 움직임이 이전의 움직임에 따라 리듬감 있게 전개되는 동시에 다음 움직임을 예상한다는 점에서 서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논의는 손동작과 언어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전망일 뿐만 아니라,역사,인공물,생명체,자연과 문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세계의 ‘형성’에도 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잉골드는 저서 『용과 함께 걷기』(2013)에서 ‘바구니 짜기’ 사례를 통해 인공물은 만들어지고 생명체는 성장한다는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바구니는 물론 생명체는 아니지만 다른 인공물 제작과는 전혀 다른 ‘직조 과정’을 통해 생산되는데, 이 직조의 본질을 가만히 살펴보면 생명체의 성장 과정과 유사하다는 것이 잉골드의 입장이다. 바구니 직조는 재료의 성질이 변형되지 않으면서 장인과 재료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없는 특이한 표면을 구축하며 성장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묘사는 인공물 제작보다는 생명체의 성장에 더 근접해 있다. 잉골드는 이러한 논리를 통해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직된 구분을 완화시키고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재설정하며 세계와 삶의 관계를 설명한다. 잉골드는 보다 구체적으로 제작과 직조의 차이에 대한 논의를 펼친다.
“제작개념은 주어진 오브제를 생산하기 위한 능력에 따른 활동을 규정한다. 반면, 직조는 오브제가 제작되는 과정의 본질에 집중한다. 제작에 초점을 맞추면 오브제를 생각의 표현으로 간주하게 된다. 직조에 초점을 맞추면 오브제를 리드미컬한 움직임의 구현 (화신)처럼 간주하게 된다.” 그리고 “제작을 직조로 대신하고 역시 생각을 움직임으로 대체하자”라고 잉골드는 권유한다.
잉골드의 이러한 직조 개념은 이슬기의 예술 실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수공예와 구전문화를 재료로 전통, 공동체, 지역적 정체성, 민속, 토속성에 새로운 전망을 제안하며 세계와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그의 예술 실천은 잉골드가 얘기하는 ‘제작’보다 ‘직조’에 더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이슬기 프로젝트들은 모두 관조를 요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기능을 환기시키며 주어진 요소들이 마치 생명체처럼 진화하며 ‘형태’를 만들어나간다. 누비이불/추상화, 바구니 조각, 나무 체 조각, 놀이 조각 (바가텔) 등은 모두 기능성을 전제하는 조각 실천이다.
여기서 조각의 기능성은 직접적 ‘사용’보다는 우리와 세계를 연결하고 역사와 현재를 엮으며,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즉, 지속가능한 기술과 사라져가는 언어, 기억,공동체의 관찰에서 비롯된 바구니 조각,나무 체 조각,이불 조각이 완성된 혹은 종결된 작품이 아니라 살아 있고 열려 있는 그래서 무언가가 도래할 ‘과정’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바구니 프로젝트 W’뿐만 아니라 ‘이불 프로젝트 U’, ‘나무 체 프로젝트 O’, 〈여인의 섬〉 그리고 이번 〈동동다리거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 실천은 고정된 개념의 단순한 표현이라고만 간주할 수 없다. 바구니 조각, 나무 체 조각, 누비이불 조각은 각각 모종의 움직임을 구현하며, 전통과 현대, 조각과 수공예, 구전문화와 텍스트, 개인과 공동체,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지역과 세계를 직조하며 한층 더 풍요로운 전망을 제안한다.
‘바구니 프로젝트 W’에서 조르주 페렉의 『W 또는 유년의 기억』 소설은 사라져가는 이스카텍 언어를 부활시키며, 〈여인의 섬〉에서는 구전문화의 전수를 통해 죽은 표상(장소)가 다시 살아나고, ‘이불 프로젝트 U’에서는 누비이불 기법으로 만들어진 기하학적 도형과 토속적인 속담이 연결되면서 꿈꾸고 말하며 상상하는 이불/조각으로 재탄생하며, ‘나무 체 프로젝트 O’에서 둥근 나무 체들의 이색적 형태는 언어유희를 작동시키는 장치들이 된다. 이번 〈동동다리거리〉 프로젝트에서 ‘은유’는 상상력을 자극하며 문, 물, 노래, 놀이가 서로 섞이고 움직이는 광장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동동다리거리〉 프로젝트는 대상들의 단순한 관조를 요하는 전시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작가가 던져 놓은 다양한 장치들과 함께 우리의 경험과 삶과 환경을 구성하는 모든 복합적 요소들을 호출하며 우리 스스로 세계를 직조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