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 In Hong, The White Mask, 2019, Three-channel video installation, 65-inch monitor, speaker, 31’50”, Collaborated with Club Inégales, London © Young In Hong

사당은 제례 공간이다. 그러나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사당B’는 사당이라는 절대적인 상징이 내포할 수 있는 의미를 대체한다. 홍영인은 자신의 전시가 어떤 주제나 주제의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의 끝으로 기능하기 보다는 주제를 둘러싼 질문들에 대한 참여가 되기를 바란다. 사당 B는 사당 A, C, 어쩌면 D도 존재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여기서 사당은 유일한 것이 아니며, B는 다양한 범주의 일부이다. 따라서 ‘사당 B’라는 제목은 평행, 질서, 과정, 근거 같은 다른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다. 삶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펼쳐지는듯 싶다.

홍영인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적합한 매체를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매우 노련한 작가이다. 세 작품으로 구성된 《사당 B》에서는 세 종류의 시점, 행위, 의식이 전시장의 세 섹션에서 전개되고, 작가 특유의 풍부한 레퍼토리는 즉흥 음악 연주, 바느질한 오브제, 녹음된 새소리, 안무된 동작이라는 다양한 형식을 통해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영속성의 개념은 일시성의 도전을 받는다. 자수, 콜라주, 걸개그림, 드로잉 작업의 주목성은 무심함으로 전환되어 마치 하늘이 스카이라인으로 보이는 상황을 모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물, 건축, 나무, 교차로 같은 것들이 2차원적 평면으로 전환되어 실루엣으로 그 실체를 담아내고 있다. 평면을 구성하는 선에 역할이 부여될 때 일상적인 것은 보다 장대한 연극 무대로 승격되거나 그 반대로의 격하도 될 수 있다. 최근 작업에서 홍영인은 옛 사진 속 사건과 인물의 실루엣을 추적하면서 격동과 분열로 점철된 지난 30년간의 한국사를 다루려 노력했다.

여기서 작가는 한국의 문화적, 민속적 도상을 활용해, 중요하지만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무언가를 마치 법의학적으로 파헤치려는듯 싶다. 작가의 고향인 서울에서 일어난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투쟁들은 압축된 공간 혹은 경험으로 시각화된다. 작가에게, 어떤 사건이 단순하게 드러날 때는, 국가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의 영향을 경계해야 할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홍영인이 발견된 이미지와 역사박물관 사진 아카이브를 분류하고 살피는 과정은 현재 본인이 거주하는 런던에서 거리를 두면서 유년시절, 청소년기, 학창시절의 기억들에 [그 이미지들이 합쳐져] 근본적이고 다층적인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된다.

한 쪽에서는 새가 불길하게 지저귀고, 다른 한쪽에는 음산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첫 번째 작품 〈새의 초상을 그리려면〉에서 작가는 자유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듯하다. 원하는 바를 무엇이든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새들이 높은 톤으로 지저귀는 이 거대한 새장은 당신이 여기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안에서 관객은 경이로운 전령 같은 자수 이미지들이 일련의 문장처럼 함께 모여있는 것을 마주하게 된다.

신념의 문제와 관련되는 이 작품은 종(種)의 위계, 예를 들어 동물 또는 새의 왕국에 존재하는 위계의 차이를 비교하고 궁극적으로 특정 인간을 다른 인간보다 우위에 두는 국가주의적 사고에 도달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자신들도 모르게 경계로부터 자유로운 새들처럼 평면적인 선으로 바느질된 새들과 실제 새의 그림자가 때로는 나란히 등장한다. 펭귄, 오리, 플라밍고 등 다양한 문화를 연상시키는 새들은 각 나라의 지역적 장소와 기후를 재현하는 듯하다. 단순하고 단정하고 섬세한 전통적 아이콘들에 붙여지거나 수 놓인 명확하고 은유적인 표현들은 새가 그 어느 권력 있는 사업가보다도 더 멀리, 더 오래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기존의 위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어디에도 무고함이란 없다는 듯 홍영인은 파괴, 보존, 취향, 역사, 정체성의 주제들을 그녀의 작업 안에서 추적하거나 흩뿌린다. 그러한 작업은 문화사의 가치, 역할, 흡수와 거부에 대한 질문들로 가득하다. 거대한 제국주의 풍경과 식민지 건물들에 대한 통제는 어떠했는가? 그것들은 붕괴되어야 했는가, 아니면 새로운 역사에 의해 덮여야만 했는가? 홍영인은 일제시대의 잔재로 완전히 파괴된 서울의 조선총독부 건물을 예로 들며 무척 불편해한다. 이 건물은 ‘아름다운’ 정원이 있어 어린 시절 작가에게 중요한 기억의 일부가 되었다. 정부는 조선총독부 건물이 ‘국가의 기의 흐름을 막는다’고 주장했고, 대중은 이에 동의했다. 외세의 지배를 상징하는 것에 대해 이견의 여지를 갖는 것은 불가능했고,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6년에 파괴되었다.

비록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사당은 여전히 구축된 구조물이다. 여기서 관객의 역할은 변화에 대해 적극적이며 입체적으로 질문하는 작가의 역할과 동일시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자체가 신념과 관련된, 종교적 유물로서의 중요성은 예술을 제작하고 영구화하는 전 과정에 수반한다. 나아가, 상당히 막연하기는 하지만, 가치라는 것이 물질의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다른 함축성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수반한다. 홍영인은 하나의 전체 구조물을 유희적으로 구축한다. 그리고 신념을 파기한다. [새장 안의] 그녀의 작업은 진실과 거짓을 동시에 말하는 예술을 동요시키면서 근대사가 드러나는 방식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홍영인은 역사가 변화의 필연성과 당대의 정황 때문에 돌진하는 역사적 구성 요소들을 고양시키는 것에 대해 다루고 있다. 누군가의 영웅이 궁극적으로 다른 이에게는 지옥의 화신일 수 있음에, 작가는 예술적 감각으로 의미를 구축해냄과 동시에 제사 의식의 의미성에 주목하면서 작업한다. 작가가 거리를 두고 그녀가 외부에서 관찰하는 한국은 엄격한 집안의 가장이 가족의 최상의 인상을 과시하고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는 곳이다.

전시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관람객의 적극적인 개입은 시작된다. 홍영인은 복합적이고 밀도 높은 공간인 사당을 만들어, 여성이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한 가정의 아들들이 집례했던 유교의 조상숭배 의식을 추상적으로 제시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기반이 되는 주제의 일부인 여성 행동 방식에 관대한 사회적 기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관람객은 비록 자발적으로 전시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지만, 새장 안에 갇혀 관람을 시작하게 된다.

관람객은 불가항적으로 작품 속으로 들어가고, 작품에 둘러싸이며, 개입된다. 그다음 공간으로 진입했을 때 동일 관람객은 헤드폰과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듣는 관중으로 변화하도록 이끌린다. 두 번째로 만나는 작품 〈하얀 가면〉은 [음악이라는 점에서] 전달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직접적이지만, 작품과 작가의 관계는 복잡해진다. 런던의 ‘노트 이네갈’(Notes Inégales)이라는 유명 그룹과의 협업 과정에서 연주자들에게 작가의 설명 내용을 따르도록 요청 혹은 지시하는 과정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홍영인은 음악가들에게 각자의 클래식 악기 연주를 통해 동물되기를 재체현하거나 그들 머릿속에서 동물되기를 온전히 실현하기를 부탁했다. 연주자들은 음악을 통해 동물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거나 동물이 되었고, 명료한 결과를 보여준다. 이들은 가장 진지하고, 솔직하며, 창의적인 협업과 즉흥 연주를 통해 음악을 만들어 내었고, ‘사실 우리 인간은 이미 동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홍영인은 재능 있는 음악가이기도 하다. 〈기도〉(2017), 〈하늘에서 내려다보면〉(2017)과 같은 최근 작품들에서 서울의 역사 사진 속 실루엣을 추출해 악보를 만들고 연주했다.

〈비-분열증〉을 전시하는 공간은 벽면에 투사되는 퍼포먼스 영상과 로비 및 전시장 밖의 불특정한 장소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 스케줄을 알리는 자수로 된 안내판으로 구성된다. 퍼포먼스는 옛 사진 속에 등장하는 여성 공장 노동자들의 반복적 동작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다. 퍼포머들은 근대사에서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복종하고 따라야 했던 지시를 실연해 보이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발견한 이미지 분석에 기반해 홍영인은 퍼포머들 및 안무가와 협업해 동작들을 구성하는데 여기에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몸짓은 물론 더 ‘가치 없다고’ 여겨지는 동물과 새의 움직임을 차용한 안무이다.

작가는 자신들의 노동이 남성의 노동보다 저급하다는 인식을 극복하려는 여성들의 투쟁을 실제로 인지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안무 움직임은 모든 시도들을 총괄하여 아래를 보고, 위를 올려다보고, 심지어 종(種)의 차이를 넘어 여기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자 노력한다, 거기에는 보다 나은 소통 방식이 있고, 존재 방식이 있지 않을까. 홍영인은 온라인 프로젝트 홍보와 모집 광고를 통해 현대무용가, 연극배우, 일반 대중, 대학생, 고등학생 등을 모집했다.

이렇게 구성된 전문가와 혹은 비전문가로 구성된 자발적 참여자 그룹의 집단적인 동작은 강력하고 감동적이다. 퍼포머들은 6~7명으로 구성된 두 그룹으로 나뉘어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로 ‘우리는 항상 웃어야 했음’을 역설한다. 근대사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이름이 아닌 숫자로 불리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들은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는지 모른다.

[이 전시에서] 각각의 작업은 서로 다르면서도 연결되어 있다. 퍼포머들의 어조는 동등성을 지향하지만, 그것을 보고 있는 혹은 거기에 있는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한다. 퍼포먼스 프로그램은 전시장 내부가 아닌 외부 공간 어딘가에서 진행되고 그것은 나아가 홍영인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 그리고 그녀가 현재 작가로서 개입하는 장소로 작품을 불러온다.

홍영인의 작업은 실제의 재현뿐 아니라 그것의 작용 방식을 협상하면서 다소 복잡하지만 분명하게 명백히 신뢰할 만한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상당 부분 과거와의 불안정한 관계에 기반하며, 그러한 관계가 회화적인 혹은 감성적인 언어로 바라보고, 보존되고, 재고되거나 관찰되는 다양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작가는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갈구하면서 그것이 추적 가능하고 식별되는 것이라면 주변에서 기능할 수 있는 무엇이든 취해서 변환시킨다. 예를 들어 사진 속 수평선의 윤곽은 작곡에 응용되고, 재봉틀은 악기로 변하며, 수를 놓거나 투사되고, 그려지거나 콜라주 된 새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전하는 조짐이 되며, 동시에 가두어진 열망의 재현이 된다. 그 열망은 자신감 있고, 발랄하게 고무적이며, 정치적 의지를 기획하는, 열린 응시를 동반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