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인은 ‘동등성(equality)’이라는 개념이 질문될 수 있는 방식을 찾고
예술을 통해 실천하는 것이 자신의 작업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이 말에서 1980~90년대 성행한 사회정치적 행동주의 미술을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우선
소재 면에서 작업의 다수가 사회로부터 마이너리티로 규정지어지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고, 매체적으로도 보통
고급 미술로 취급되지 못하는 바느질이나 자수를 수단으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홍영인이
동등성에 접근하는 방식은 사회정치적 의제에 접근하는 익숙하고도 전형적인 양상과 상당히 다르다. 주변부를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많은 경우 이분법적 대립 구도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소수자라는 표식을 다는 순간
중심과 주변이라는 기존의 위계를 승인하게 되고, 주변부의 권리에 대한 주장이 중심을 주변으로 대체하려는
인정 투쟁이 되는 경우도 많다. 소외된 사람들에 주목하되 그들을 특정 범주로 집단화하지 않고, 주변부를 포용하되 이들을 구분하거나 대상화하지 않는 방식은 무엇일까. 홍영인의
실천은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해 이런 방식도 가능하지 않겠냐고 우리에게 넌지시 건네는 하나의 작은 제안이다.
동등성을 미술로 구현하고자 할 때 작가가 결정해야 하는 지점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작업의 소재로서, (동등성에 대한) 내용의 구현이요, 다른 하나는 제작이나 형식 면에서의 적용이다. 비교적 쉽고 일반화된
방식은 전자이나 이 경우 작업의 내용과 매체가 별개로 작용하는 한계를 피할 수 없다. 홍영인의 모색이
돋보이는 지점은 바로 여기인데, 그녀는 작업의 내용뿐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과정과 이를 담는 몸체(형식)의 속성에서도 기존의 위계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거스른다. 그 결과 동등성은 작업의 내용뿐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안팎으로 작동하며 실행된다.
그중
제일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바느질 혹은 재봉틀의 사용이다. 주로 아시아 지역 여성 직공들의 저임금
노동인 바느질은 젠더와 계급의 측면 모두에서 타자성을 가리키는 좋은 표식이다 (실제로 작가는 동대문
의류 상가의 봉제공들에게 이 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그녀는 바느질을 통해 여성성이나 아시아성을 강조하지
않으며, 하위문화적 정체성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홍영인이
바느질을 활용하는 것은 타자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던 경계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고급 미술이라는 범주를 가르는 기준이 일례다. 개념적이고
지적인 작업의 내용을 구현하는데 공예라는 이름으로 순수 미술에서 배제된 바느질을 도입함으로써 고급 미술이라는 장르 내부에 내재한 구분을 흐리고
다름을 공존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단지 미술 내부의 제도 비판뿐 아니라 작업의 내용과 필연적으로 조응하는
것이 홍영인의 작업이 지닌 밀도다. 일례로,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로 촉발된 촛불 집회의 장관(壯觀)을 자수로 수놓은 〈Burning Love〉(2014)는 공식 역사의 주인공이 아닌 평범한 시민들(특히 십대 소녀들)의 정동(affection)을 대상으로 한다.
한 땀 한 땀 정직한 노동을 요하는 자수라는 형식은 자발적으로 거리에 나온 한 명 한 명의 개인들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조명하기에 알맞은 방법이다. 여기서 시위에 참여한 군중은 민족이나 국민 같은 집단의 일원이
아니라 개성과 인격을 지닌 각기 다른 개개인들의 군집, 즉 다중(multitude)이다. 작지만 뜨거운 각자의 열망은 하나하나 정성스레 수놓아져 은하수를 이룬 별빛처럼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 된다.
한편
동등성이라는 키워드를 푸는 다른 한 축인 퍼포먼스는 사회적 주제와 순수 미술의 영역을 훨씬 적극적으로 교차시킨다.
우연적이고 비물질적인 퍼포먼스는 (바느질 같은 비정통적인 수단을 활용하더라도) 독창성과 유일무이성을 벗어나기 어려운 오브제 포맷의 작품의 한계를 쉽게 탈피할 수 있다. 더욱이 미리 정한 퍼포머가 아닌 일반 대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면 작품을 통제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광주비엔날레에서 처음 선보인 〈5100: Pentagon〉(2014/2017)은 자원한 관객들이 5.18 광주항쟁을 모티브로
한 안무를 수행하는 퍼포먼스다.
참가자들이 매번 달라지므로 퍼포먼스 또한 매번 달라진다. 미술 밖의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스스로 작업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되면서 퍼포먼스는 미술관이라는 닫힌 범주에
작은 틈을 낸다. 광주의 아픈 역사를 제각기 되새김하는 현재의 각기 다른 타자들은 일시적이고 느슨한
작은 연대를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파문은 미술과 비미술의 경계를 지우며 참여자 각자에게 긴 여운을
남긴다.
최근작인
〈Prayers〉(2017)에서 자수와 퍼포먼스는 하나로
만난다. 작가는 전후 한국의 풍경을 기록한 뉴스 사진의 일부를 자수로 옮기고 이를 ‘그림 악보(graphic score)’ 삼아 연주했다. ‘사진 악보(photo-score)’라고 불리는 이런 방식의 작업은
남한과 남성 중심의 주류 역사를 다시 쓰는 행위기도 하다. 보도 사진의 메시지 전달과 무관한 사소한
세부는 기록되지 못한 역사의 일부다. 작가는 중심을 지우고 세부를 살짝 건져 올림으로서 역사 서술의
무게중심을 가볍게 전치시킨다.
이렇듯 작가의 자수를 통해 일차적으로 재기술된 역사는 악보가 되면서 또
한 번 크게 뒤집힌다. 악보는 하나더라도 해석은 연주자의 수만큼 무수히 분화된다. 퍼포머에 따라 달라지는 연주는 개인이 쓰는 역사의 또 다른 버전이다. 나의
경험과 너의 경험이 다른 만큼 내가 기억하는 2019년과 네가 기억하는 2019년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 그 무수한 기억들을 뒤로 한 주류의
역사란 그 얼마나 일천한가.
퍼포머에 따라 달라지는 해석은 끊임없이 흩어지며, 갈라지는 파본들의 이어짐 속에 나와 너, 남자와 여자, 한국과 외국을 뒤섞는다. 이 가운데 작가와 관객, 예술과 사회의 경계도 어느새 지워진다. 내가 쓴 역사와 네가 쓴
역사가 사이좋게 공존하며 합주하는 유쾌한 혼성의 장, 이것이 차이를 바라보는 홍영인의 관점이요, 그녀가 품는 희망일 것이다.
《올해의
작가상 2019》 전시에서 홍영인은 동등성의 개념을 인간을 넘어 비인간 행위자로 확장한다. 세 개의 신작으로 구성된 〈사당 B〉는 새와 동물을 주체로 놓아
강자(인간) 본위의 시각을 재고하고자 한다. 관객이 새장 안에 갇혀 새장 밖의 새들의 공간을 바라보는 역설적 상황이나 무던히 동물이 되고자 애쓰는 음악가들의
즉흥 연주, 여성의 노동과 동물의 몸짓을 흉내내는 퍼포머들의 안무는 기묘한 낯섦과 조우하게 만든다. 이 같은 불편함은 실상 필요한 감정이다.
한편으로는 타자가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케 하고 다른 한편 결코 완수될 수는 없을지언정 약자의 입장이 되어보고자 애쓰는 시도 자체의 가치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지극히 특수한 동시에 보편적이고, 개별적이지만 집합적인 어떤 균형을
섬세하게 찾아가는 홍영인의 탐색이 보다 많은 이에게 공유되길 바란다.
여전히 이분법과 큰 목소리가 지배적인
한국에서 목적 없는 저항, 집단 아닌 주체, 구분이 아닌
공존은 너무나 드물고 희박한 가치다. 이번 전시가 그 진정한 급진성이 관객 각자의 마음속에 조용히 번지는
장관을 목격할 기회를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