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 In Hong, A Colourful Waterfall and the Stars, 2021 © Young In Hong

1. 사물과 흔적

사물이 예술 작품으로 보이는 순간 혹은 조건은 무엇일까? ‘무리 생활을 하는 코끼리 조손(祖孫)을 전시장으로 불러들이는 사운드 설치’라는 갤러리의 설명에서 나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근원〉을 떠올리게 된다. ‘사물과 작품’이라는 섹션에서 “사물이 하나의 사물인 한, 사물이란 진실로 무엇인가? 이와 같이 우리가 물을 때, 우리는 사물의 사물존재(사물성)에 대하여 배우기를 원하는 것이다.

문제는 사물의 사물적 차원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오랫동안 사물이라는 명칭을 갖고서 거론해 오고 있는 그런 존재자 모두가 속한 범위를 알아야 한다.” 부재하는 코끼리와 소리로 제공되는 풍경 그리고 짚으로 꼬아 만들어진 인공물이 제공되는 사건 속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 미적 구성물 혹은 대상은 참될 수 있을까? 하이데거가 비행기와 라디오가 가장 친근한 사물이라고 하던 시절에 쓰여진 논문으로 예술과 예술 작품을 사유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럼에도 사물과 예술 작품이 예술을 드러내며 그 혼란 속에서 진리를 찾는 방식이 여전히 유효성을 지닌다고 주장하면 이상할까? 하이젠베르크가 말한 대로, “객관적인 실세계를 이루는 가장 작은 구성 요소들이, 돌이나 나무가 관측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불가능하다.” 사물과 작품 그리고 예술이 속한 세계에 대한 고찰은 홍영인이 수행하는 관계성의 정치미학이다. 예술의 죽음과 몰락에 대한 현대미술의 대응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2. 사운드 아트

풍경은 하나의 인식소라고 할 수 있다. 푸코 식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은 시대에 따른 질서의 틀, 곧 담론이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 담론 속에서 어떤 것을 인식하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에피스테메(Episteme)’라고 명명하였다. 푸코의 이 논리에 따르면 우리가 뭔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그것의 에피스테메를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고 아우르는 질서의 틀을 어떻게 찾아내고 또 그것을 어떤 식으로 규정하고 활용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예술의 인식을 에피스테메의 틀 안에서 들여다보되 그것을 성급하게 구조화하지 않고, 작가 홍영인의 의식이 투영된 사상, 실존, 작업의 차원에서 그것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에서 소리와 풍경이 함께 이루어내는 감각적 융합은 컨템포러리 아트가 예술의 망각에서 구제한 것이다. 한때 공감각은 근대적 특성으로 여겨지다가 그와 거의 동시에 근대 미술에서 순수 미술의 회화와 조각에서 배제되었다. 이 지점들, 분기점에서 홍영인은 개입하고 어느 정도는 지정학적 성찰을 한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 때, 청각은 매우 예민해진다. 릴케가 〈두이노의 비가〉에서 ‘침묵으로부터 전해오는 끊임없는 소식’이라고 표현했던 것도 역시 이와 같은 생각이다.

투청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침묵이라는 것은 오히려 ‘소식’인 것이다. 세계의 사운드스케이프 디자인을 개량하길 바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침묵이 우리들 생활 속에서 적극적인 상태로 회복된 후에야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잡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것이 우리들 최초의 작업이다.” 사운드스케이프라는 용어를 창안한 머레이 쉐퍼(R. Murray Schaffer)와 관련하여 토리고에 게이코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한다. “소리 풍경이라는 사고방식은 단지 현대의 작곡가나 사운드 아티스트들에게만 호소하는 새로운 음악 예술 사상이 아니다.

거기에는 시각적 디자인과 사물 만들기에만 관심을 관심을 기울여 온 건축가나 도시 계획가나 환경 연구자들 등 음악 영역 너머의 전문가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소리와 소리 환경을 자기 영역의 문제로 의식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소리 풍경 사상은 전문가뿐만 아니라 보통 시민들 역시 날마다 삶 속에서 소리를 듣고 맛보는 기쁨을 누리기 바란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귀를 통해 주변 환경에 숨은 문제를 발굴하는 힘을, 그 환경의 매력을 체험하는 힘을 키움으로써 풍부하고 넉넉한 생활을 하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다.” 홍영인의 사운드 인스톨레이션과 관련해서도 이러한 안목이 요청되고 있다.

Young In Hong, Ishmael_Even the Gorilla Needs a Flower, 2021 © Young In Hong

3. 오브제의 정치적/사회적 선택

한국 근대(화)기의 사진들에서 추출한 선 드로잉과 바느질 작업, 펠트 조각, 음악 퍼포먼스는 이중적인 물음을 던져준다. 작가가 어떤 기준으로 그 데이터들을 수집했으며, 이른바 예술적 작업과 현실의 조응 관계에 대한 물음이다. ‘한국의 민중 보도사진에서 추출한 실루엣이 드로잉과 자수를 거쳐 악보가 된 일종의 사진-악보 작업’인 〈Looking Down from the Sky〉는 다양한 예술적 프로세스를 보여준다.

비슷하게 〈Prayers〉는 ‘전후 한반도의 도시 풍경과 근대화 시기의 투쟁 역사를 기록한 사진 아카이브에서 출발한 연작’이다. 양자에서 보여주는 미학적 원리는 좀 특이한 미메시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관계를 예술적이지 않은 행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춤, 제스처, 의례, 말배우는 아이들과 스포츠 선수들의 놀이에서처럼 행동 모델이 다른 적절한 행동으로 재현되는 곳 어디에서나 미메시스적 관계가 존재한다. 연기된 행동은 마치 그것이 원래 현실의 자리에 들어선 것처럼 관찰자들에게 나타난다. 미메시스적 세계는 ‘마치 ~처럼’의 세계다.

켄달 월튼은 주장한다. “그림, 연극, 영화, 그리고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인형, 목마, 장난감 트럭, 그리고 테디 베어를 살펴보아야 한다. 재현적인 예술 작품이 뿌리내리고 있고 또 그러한 작품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들은 아이들의 믿는 체하기(make-believe) 게임과의 연속선상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사실, 나는 이러한 활동들을 믿는 체하기 게임 그 자체로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며, 인형과 테디 베어가 아이들의 게임에서 소도구(prop)의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현적인 예술 작품들은 그러한 게임 -에서 소도구로서 기능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아이들은 믿는 체하기 활동들에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바친다. 그리고 이러한 몰두는 어떤 특정 문화나 사회적 집단에 한정되지 않고 거의 보편적인 것처럼 보인다. 믿는 체하기 활동에 참여하려는 충동과 그러한 활동이 해결해주는 요구는 매우 근본적인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아이들이 성장하는 순간 단순히 거기서 벗어나게 된다고 예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믿는 체하기가 성인의 출발점에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다면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모델이 되는 이전의 일차 세계, 그것이 관계하는 그 세계와 닮았다. 그러나 이는 전혀 다른 세계다. 이처럼 주어진 현실과 닮은, 스스로 생성된 세계를 만들어내는 일이 인간에게 더 깊은 의미를 띠는 것은 분명하다.” 작가가 세계를 이해했고 나는 그의 세계를 이해한다.

Young In Hong, Colourful Land (An Homage to Robert Morris), 2021 © Young In Hong

4. 불교적 세계관?

초기 불교의 이콘은 부처를 보이지 않으면서 그 존재를 드러낸다. “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살아 있었을 때부터 사원을 장식하는 벽화로 불화가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기원정사에 그려진 벽화 어디에도 부처의 모습, 즉 존상을 그렸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당시에는 요즘처럼 불전 중앙에 모셔 놓고 예배하는 존상화가 그려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석가모니가 살아 있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입멸한 뒤 약 500년 뒤 까지도 석가모니를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 예배하는 전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처를 인간으로 표현한다는 관념이 형성되기 이전인 ‘무불상시대’에는, 열반에 든 부처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므로 인간으로 형상화할 수 없다고 믿어 예배 대상으로서의 부처 그림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시대에는 본생도와 불전도처럼 석가모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림이나 조각에서도 석가모니를 직접 그리거나 조각하지 않고 보리수, 법륜, 불족적, 연꽃 등의 상징으로 대신하는 상징미술이 발전하였다.” 영국의 체스터 동물원에서 관찰한 것을 마치 코끼리들이 ‘신을 막 벗어 놓은 듯한 장면’으로 전시장에 연출했다. 다른 작업은 ‘감모여재도’에서 모티브를 얻은 자수 작업이 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드러내는 것 같다.
 


5. 관계(성)에 대하여

새끼를 꼰다. 짚신으로 코끼리 혈연을 보여준다. 공예적인 것과 상황 혹은 사건을 사운드로 묘사, 연출된 장면은 ‘짚풀로 엮은 이 신은 짚풀 공예 명인 이충경과 박연화와의 협업을 통하여 완성되었다. 전시 공간을 에워싸며 아프리카의 삼림, 물 웅덩이, 인디언 결혼식, 동물원 등 인간과 코끼리가 마주칠 수 있는 다양한 장소들을 연상하게 하는 사운드트랙은 일렉트로닉 뮤지션 마일즈 오토, 색소폰 연주자 앤드류 닐헤이스와 협동 제작한 것이다.’

에드먼드 버크는 ‘쾌와 고통에 대한 미학적 탐구’라는 부제가 붙은 〈숭고와 미의 근원을 찾아서〉에서 24절에서 ‘촉각의 미’를 그리고 이어서 25절에서 ‘청각의 미’를 다룬다. “우리의 모든 감각은 서로 연쇄관계에 있다. 감각들은 저마다 다르고, 다양한 종류의 사물들에 의해 감응하게 되어 있지만, 감각들이 자극을 받는 방식은 모두 동일하다.” 시각 예술로서 전시에서 촉각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사물인 공예적인 것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약간의 저항력에 의해서도” 동시대성의 미학적 감각을 드러낸다.

우리는 표면이 계속해서 변하는 사물들을 가장 즐겁게 또는 가장 아름답게 느낀다. 일반적으로 음악의 아름다움은 맑고, 고르고, 매끄럽고, 부드러운 소리와 가장 잘 부합된다. 그래서 미학적 우울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미에 의해 환기되는 정념은 실제로 환희나 명랑보다는 일종의 우울에 가깝다.”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 홍영인은 미와 숭고의 일방성에서 해방된다. 우리는 달콤함의 관념을 은유적으로 시각과 청각에 적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서 벗어난 다른 체험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Young In Hong, Thi and Anjan, 2021 © Young In Hong

6. (탈)역사성과 아나토미

현실을 다루는 역사학과 밀접하다고 여겨지는 미술사학은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의 구분을 맞춰가는 습성이 있다. 그런데 미술사학이 역사학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미술과 현실이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하더라도 분류의 방식까지 따를 필요는 없다. 객체가 의미를 획득하는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술사성? 미술의 역사성, 혹은 역사를 미술화? 홍영인의 작업에 부제에 부제를 붙인다면 ‘동시대 미술에서 역사성과 아나크로니(연대기적 순서를 무시한 줄거리 배열)’이다. 이때 잔니 바티모의 해석은 의미심장하다.

“현대세계에서 목격되는 예술의 죽음은 헤겔이 의미하는 것과 딱히 같은 의미를 갖지 않으며, 아도르노가 반복해서 보여주듯이 이상하게 비틀려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다른 많은 개념들처럼 예술의 죽음이라는 개념도 선진 산업사회의 발전에 따라 예언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정보의 지배가 보편화되는 현상이 절대정신의 승리가 변형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진리가 아닐까? 어떻게 보면 정신이 그 자체로 복귀하는 유토피아의 풍경-그러니까 존재와 완전히 투명한 자기의식의 일치-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소통수단 영역의 일반화, 그리고 그 수단에 의해 확산된 재현의 우주로 나타난다. 그 우주는 더 이상 현실과 구별되지 않는다. 물론 매스미디어의 영역은 헤겔의 절대정신이 아니다. 그보다는 아마 그 정신의 풍자만화일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매스미디어는 단순히 그 절대정신이 변질되고 왜곡되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왜곡의 경우가 종종 그러하듯이, 탐사되어야 할 인식적, 실천적 가능성을 함유하고, 또 아마도 도래할 것들의 모양을 묘사하는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7. 어쩌면, 공예와 미술이 아닌

지금 현대미술은 시장에서 솟구치고 있다. 지난 몇 년간의 또 다른 호황 덕분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순수미술이 가진 특권적 위상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다. 순수미술이 특권적 위상을 갖는데에는 현대미술에 관한 비평담론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다. 그 바탕에 깔린 미학이론은 미메시스에서 18세기에 알렉산더 바움가르텐, 에드먼드 버크, 임마누엘 칸트 등에 의해 갱신되었다. 이론적/비평적 담론은 순수미술을 단순한 상품이나 수공품이 아닌 개념적이고 지성적인 행위로 변모시키기 위한 지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공예 분야는 순수미술이 거친 ‘지성화’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고, 순수미술에 개념적 속성을 부여한 비평적/이론적 뒷받침을 받지 못했다고 한탄한다. 정당할까? 홍영인은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답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직하고 있는 전공을 가로지르는 방식은 역사적이면서도 탈역사적이다. 미학의 역사성에 대한 반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대성에 관한 감각을 통해 그 경계를 무(력)화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