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호가
〈난장이의 공〉을 그리기 위해 올라섰던 세운상가는 단지 실패한 대도시의 암울한 디스토피아가 아니었다. 198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세운상가와 이를 축으로 늘어선 청계천 기계공구 상가에서는 상인들이 모이면 순식간에 인공위성도 쏘아 올릴 수 있다는 전설이 회자됐다. 4 1990년대 세운상가는 해금 (解禁) 이전에도 이미 일본의 최신판 애니메이션은 물론이고 지구상의 어떤 엔터테인먼트도 실시간으로 직수입해 해적판으로
유통하는 놀라운 신문물의 발산 근거지였다.
『요철발명왕』과 애니메이션 〈돌아온 아톰〉을 거쳐 사이버펑크에
눈을 뜬 정재호는 〈블레이드러너〉에 매료됐고, 일본 아니메의 전설 〈아키라〉에 빠져들었다.5 20세기 말에 등장한 사이버펑크에서 그리는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는 빈부격차를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동양풍의 도시 외관, 대표적으로 허름한 홍콩형 아파트 외관에 가득 붙은 녹슨 실외기로 묘사된다. 정재호의 오래된 도시는 압축적 경제개발시대 대한민국이라는 과거에서 온 근대의 유령과 사이버펑크의 묵시록적 미래에서
날아온 종말의 전령, 양자의 혼종이다.
〈발명왕〉은 2014년 개인전 《먼지의 날들》에서 대체로 같은 크기(80×120cm)의 액자로 표구된 여러 점의 회화와 함께 질서정연하게 벽에 걸려 전시됐다. ‘아카이브 회화’라고 불리는 이 연작은 정재호가 4· 19혁명이 일어난 1960년부터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졌던 1980년까지의 20년간 출판된 각종 사진과 영상을 수집해 이미지를
추출해 회화로 번안한 결과물이다. 여기엔 신문기사, 정부출판물, 한국영화의 장면들이 있고, 이렇게 수집된 ‘아카이브’에서 정재호는
“그가 알고 있는 스펙터클을 기준으로” 장면을 선택해 그림으로 그렸다.6
그러나
그가 선택한 이미지들—그레이하운드, 영화 속 여주인공의 스틸컷, 화재, 진열된 의수, 저울, 버려진
건물, 짓다 만 마천루, 불붙은 타자기, 나란히 놓인 다이얼식 전화기, 폐허가 된 아파트 놀이터 등—사이에서
한눈에 띄는 소재의 일관성은 없다. 이러한 서사의 불가능성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 일률적인 프레임, 질서정연한 배열이라는 디스플레이 형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먼지의 날들》은 지난 세기의 유토피아적 기획이 실패했음을 증명하는 이미지들일 뿐 아니라, 그 표면적 형식은 더 나아가 거대 서사의 가능성 또한 명운을 다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