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 변화를 이끄는 촉매
구정아의
혁신적인 시선을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은 아마도 야광 스케이트 보드장일 것이다. 낮에는
평범한 콘크리트 구조물처럼 보이지만, 밤이 되면 빛을 내며 신비로운 풍경으로 바뀐다. 2008년 프랑스 외곽에 설치된 첫 번째 프로젝트 〈OTRO〉는
곡선형 콘크리트 구덩이와 경사로가 자연 지형에 일부 묻힌 형태로, 원래의 수평선을 보존하면서도 지역
주민들을 위한 실용적인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녀는 2015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이 작업은 망자를 빛으로 감싸는
일과 같다.” 고 설명했다. 한국의 장례 문화에서 빛은 ‘끝’이 아닌 ‘이행’을 상징함을 떠올리게 한다. 존재와 부재의 순환에 대한 전통적 지혜를
현대적으로 담아낸 시적인 해석을 통해, 새로운 여가 공간이 탄생하게 되었다.
리버풀의
에버튼 파크 설치 작업은 그녀의 작업이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
프로젝트는 지역 청소년들과 스케이트보더 커뮤니티와의 방대한 협업을 통해 진행되었으며, 약 3미터 깊이의 구덩이를 갖춘 영국 내 최대 규모 스케이트 보드장 중 하나가 완성되면서 한때 소외되었던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기억
구정아의
예술은 감각의 경계를 넘나든다. 특히 후각에 대한 탐구는 기억의 연결망을 탐색하는 데 완벽한 매개가
되었다. 뇌과학 연구에 의하면, 후각은 의식적인 사고를 거치지
않고 감정과 연결된 뇌 영역에 직접 작용한다. 냄새를 하나의 예술적 소재로 삼으려는 구정아의 관심은
이러한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2016년 작 〈오도라마(Odorama)〉는
동굴 같은 공간 안에 퍼지는 침향의 복합적인 향을 통해 잊힌 과거의 여행객들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폐쇄된
런던 지하철 플랫폼을 새로운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실험들은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을 위해 제작된 〈오도라마 시티(ODORAMA CITIES)〉에서 완성된다. 집단적 기억을 탐구한
구정아의 프로젝트 중 최대 규모이다. 한국적 정체성을 하나의 서사로 규정하기보다는 한국인, 이민자, 입양인, 외국
방문객, 탈북민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기억하는 향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600건 이상 담았다. 국내 향수 브랜드 논픽션(NONFICTION)과 협업하여 이 이야기들을 17가지 향으로 개발해
한국의 ‘향기 풍경’을 만들어 냈다.
미니멀한
전시관 공간 한가운데에는 뫼비우스의 띠 형태로 만든 나무 벤치가 놓였다. 관람객들은 그곳에 앉아 할머니의
집, 밤공기, 목욕탕의 냄새를 떠올리게 하는 향을 맡으며
작품에 빠져들었고, 비어 있는 듯했던 공간은 어느새 모두가 공유하는 문화적 기억이라는 보이지 않는 차원으로
바뀌었다.
경계를
넘어서
구정아는
국가 정체성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기보다는, 물질성과 인식에 대한 폭넓은 담론을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녀가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고유한 미학적
전통과의 연결성을 유지하면서도 특정 문화에 고정되지 않는 초월적인 경험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초상을 그리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에서 향기 풍경을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었어요.”
그녀는
『아트리뷰(ArtReview)』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작업을 통해 국가 간 분열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대’와 ‘함께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국가
분단이라는 가슴 아픈 현실 속에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 구정아의 방식은 경직된 정치적 경계를 넘어서는 강력한 대안을 제시한다. 그녀의 작업은 정체성과 소속이라는 복잡한 문제들을 예술적으로 탐색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2024년
말 〈오도라마 시티〉가 서울 아르코미술관에 소개되었을 때, 구정아는 전시장 곳곳에 아이보리 색 배너를
설치하고 개인적 서사에서 발췌한 문장들을 담았다. 집단적 기억을 시각적으로 구현함으로써, 향수를 자극하는 기억의 조각들을 지리적·정치적 분열을 넘어선 공동의
경험에 대한 깊은 사유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방식은 참여미술이 전통적인 작가성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현대 미술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또한
구정아의 접근법은 유럽과 미국 미술관들이 비(非)서구 작가를
바라보는 방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전 세대의 한국 작가들이 종종 국가 정체성이라는 틀 속에서
해석되었다면, 그녀의 작업은 개념적 깊이와 감각적 경험 자체에 기반해 평가받고 있다.
최근
프로젝트에서는 과학적·철학적 탐구에 대한 더욱 깊은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2023년 서울 PKM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공중부양(Levitation)》에서는 중력, 변성암, 물리 세계의 근원적인 힘 등을 주제로 삼았다. 88, 518, 625,
911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숫자를 제목으로 붙인 마그넷 조각 작품을 통해, 집단적 기억을
나타내는 이러한 숫자들이 물리적 배열에 따라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는지 관객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했다.
구정아는
이탈리아의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를 자주 인용한다. 로벨리는 양자중력 연구와 ‘시간’과 ‘실재’의 본질에 대한 대중적인 책들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로벨리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관계가 먼저입니다. 우주는 존재의 상태에서 관계의 구조로 변화했습니다.”
그녀는
현재 하우스 데어 쿤스트 뮌헨(2025), 아스펜 뮤지엄(2026),
리움 미술관(2026) 전시를 준비 중이며, 그녀의
작품에서는 여전히 에두아르 글리상(Édouard Glissant)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글리상이 말한 ‘관계의 시(poetry
of relations)’, 즉 투명성과 보편성을 지양하고 불투명성과 다양성을 지향하는 세계관을 담고 있다. 구정아의 작업은 미(美)가
명확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구성 속에서 역동적으로 맺어지는 관계 속에서 탄생하는
것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