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명제: 사라지고도 존재하는
미술관
건물 담벼락에 세 점의 비너스 두상이 설치됐다. 무더위와 장마로 고온다습한 날씨가 연일 계속되는 중에
신미경의 개인전에 맞춰 미술관 실외에 설치된 “비누조각”이다. 〈풍화프로젝트〉(2010)라고 이름 붙인 이 작업은 미술관 실내로
이어지는 통로에 네번째 비너스 두상을 설치해 놓은으로써 미술관 건축외부의 장소성을 크게 환기시킨다. 대량
생산된 모형 석고상을 똑같이 비누로 캐스팅한 네 점의 비너스 두상은 잘 알려진 익숙한 도상으로서 미술관 밖 광장
– 아르코 미술관이 위치한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광장 – 의 대중들과 미술관을 찾은 관객들
사이에서 호기심 어린 시선뿐 아니라 의미심장한 물음들을 유도한다. 누가 비너스 모각을 광장에 갖다 놓았을까, 왜? 무엇으로 만들었길래 당장이라도 형태가 녹아내릴 것처럼 조각
표면에 물기가 가득한 것인지? 여기, 이토록 불확실한 상황에
한없이 연약해 보이는 이 조각상들을 왜 갖다 놓았을까? 이 조각의 최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신미경은
미술관 바깥에서부터 시작된 전시의 동선을 전시장 안으로 끌어오면서, “사라지고도 존재하는”이라는 전시 타이틀을 제시했다. 두개의 동사 “사라지다” 와 “존재하다”를 나란히 대비시킨 이 역설적인 표현은, 〈풍화프로젝트〉에 이어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와 〈폐허풍경〉의 맥락을 아우르는 “시간” 개념에
대해 함축하고 있다. 특히 〈폐허풍경〉은 신미경의 전반적인 작업에서 근간을 이루고 있는 “시간의 여러 층위들”과 그렇게 탈중심화된 다수의 시간성에 의해 “되어가는(becoming)” 불확실한 존재들의 실체를 사유한다.
또한 〈폐허풍경〉은 안과 밖 혹은 과거와 현재가 뚜렷한 경계 없이 느슨하게 열려 있고 동시에 끊임없이 분절되어
있는 탈구조적 시공간을 드러내면서, 이러한 혼돈스러운 현재의 “중간적
장소”에 축적되어 있는 시간의 여러 층위들을 발굴해내고 있다. 이렇듯
그가 말하는 “사라지고도 존재하는” 것은 일련의 장소성과
시간성을 함의하면서 그 둘의 교차하여 접속하는 우연한 순간에 맞닥뜨릴 다수의 “중간 형태들”에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들뢰즈(Gilles Deleuze) 와 가타리(Felix Guattari) 가
사유했던 다수성(multiplicity)의 고원(plateau)처럼
수많은 접속에 의해 시작도 끝도 없이 탈영토화되어가는 혼돈스런 “중간”에
대해 환기시킨다.
사실
신미경은 몇 해 전부터 〈풍화프로젝트〉를 좀 더 확장시켜 건축 프로젝트에 대한 실험으로 옮겨가 거대한 건축적 스케일과 그것이 놓인 시공간의 맥락에
지속적인 관심을 쏟아왔고, 영국 국립공예디자인센터 (The
National Centre for Craft & Design)에서 열린 전시 《진기한 장식장》(2014)을 통해서는 “멈춘 시간들의 나열” 혹은 “화석화된 시간들의 진열”로
표상되는 박물관에 내재된 시간성을 탐구해왔다. 〈폐허풍경〉은 그 두 가지 관점이 지속되어 오는 과정에서
생성된 작업의 결과물로서, 다수의 시간과 다수의 형상들이 응축되어 한 시점에서 만나는 수평의 넓은 “고원”처럼 탈중식적이고 비위계적인 시공간의 체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비누를 끓여서 캐스팅한 비누 블록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건축적 공간의 윤곽을 구축한 〈폐허풍경〉을 구성하는
건축적 구조들과 그 주변에 흩어져있는 〈폐허풍경: 벽〉(2018),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 거울〉(2013),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 회화〉(2013),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 천사〉(2013) 등에 같이 주목해 보면, 신미경이 “폐허”의 시공간에
끌어들인 형상들은 대개 “영원한 현재성” 속에 자족할 수
있던 존재들을 참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를테면, 또
다른 의미에서 현실의 시공간으로부터 초월해 정의되어 왔던 “영원한 현재”의 존재들이 폐허라는 종말을 맞이했을 때, 그 때 비로소 드러나는
존재의 물성은 방금 온기가 빠져나간 피부처럼 그것과 대면한 신체의 촉각을 계속해서 자극한다. 신미경은
견고한 건축물의 뼈대나 액자 프레임 안에 고정된 채 변하지 않는 영원한 현재를 살아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벽”, “회화”, “거울” 등을
비누로 재현하여 느리게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서사적인 시간들을 압축해 그 시간의 물성을 가시화함으로써, 사라진
것들과 존재하는 것들의 경계가 사라진 일련의 중간 형태로서의 “폐허”에
집중했다.
벅
모스 (Susan Buck-Morss)가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The Dialectics of Seeing: Walter Benjamin and The
Arcades Project)] (1991)에서 벤야민 (Walter Benjamin)의
사유를 빌어 “폐허”에 대해 서술했던 것처럼, 무너진 성지같이 쇠퇴한 폐허로 남겨진 건축물은 생명이 빠져나간 형상들이 스스럼 없이 드러내는 질료 (matter)의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미경의 폐허는 무너지고 쇠퇴한 형상들이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스스로의 시간(역사)과 단절되어 폐허로 남겨진 잔재들의 물성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정황은 그의 신작 두 점 〈육체가 없는 영혼 1〉(2018)과
〈육체가 없는 영혼 2〉(2018)에서 또다시 확인된다. 그런데 이때 흰색 캐스팅 테이프로 제작된 “누워있는” 인체의 형상들은 영혼이 빠져나간 육체가 아니라 “육체가 없는 영혼”으로 설명됐다. 신미경은 〈폐허풍경〉에서 줄곧 역사의 시간 속에 위치해
온 초시간적 존재들 (영혼)을 불러와 다시 폐허하는 멈춰버린
시간에 화석처럼 남겨진 물리적인 흔적들의 실체로 전복시켜 놓았다. 다시 말해, 육체가 없는 영혼은 폐허의 풍경에 “사라지고도 존재하는” 일종의 중간 형태로서의 질료와 그것들의 흔적을 표상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2.
시간의 논리: 번역과 유물화의 과정
〈폐허풍경〉은
실제의 시간이 영원히 멈춰버려 비로소 현전할 수 있는 역설적인 장소다. 신미경은 끊는 액체를 굳혀 고체화시킨
비누로 폐허의 풍경을 견고하게 구축하듯, 흐르는 시간을 동결시켜 눈앞에 현전케 한 일련의 시간에 대한
논리를 생각했던 모양이다. 예컨대, 그는 작업의 초기부터 “번역”과 “유물화”의 과정을 통해 시간의 개념을 작업의 맥락 안에 끌어들여 일련의 변형을 거치며
“되어가는” 형태들에 몰두해 왔다. 여기서 유물화
과정을 참조해 실제의 시간을 여러 속도로 변형하고 압축하여 다룬 그의 작업 과정을 살펴보자. 신미경은
〈화장실 프로젝트〉에서 비누 캐스팅을 통해 고전적인 조각상이나 불상의 복제품을 만들어, 그것이 본래
지니고 있는 심미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와 전혀 상관없이 단지 비누라는 재료에 충실한 사물로 기능하도록 공중화장실 세면대에 설치해 두었다.
익명의 공공 등에 의해 같은 용도로 사용되면서 차츰 형태가 닳고 마모되면서 가시적인 변형이 빠르게 진행되자, 신미경은 어떤 임의의 순간에 시간을 정지시켜 비누로 기능했던 복제된 생산품을 다시 유일무이한 조각적 형태도
재규정할 수 있는 조건을 찾게 됐다. 그렇게 한 사람에 의해 발굴되어 새롭게 정의된 사물은 전시장 좌대
위에 공적으로 위치하게 됨으로써, 더 이상의 변형이 허용될 수 없는
“작품”으로서의 가치와 위상을 획득하게 된다. 언제든
흐르는 시간 속에서 변형될 수 있는 여지를 여전히 함의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요컨대, 신미경은 일련의 유물화 과정에서 본래의 형태 안에 내재되어 있는 단일한 시간을 무효화하고 다수의 시간들이 중첩되는
복잡한 층위에서 변형과 그에 따른 새로운 형태의 정의를 모색해왔다.
조금
더 초기 작업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의 대표작품으로 알려진 가 있다. 〈화장실 프로젝트〉나 〈풍화
프로젝트〉는 실재하는 시간 속에서 형태의 변형과 소멸을 실험하고, 그 과정에서 시간을 임의로 동결시켰을
때 획득되는 유일무의하고 기념비적인 가치에 대한 논의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그것보다 앞선 〈번역 시리즈〉는 시간을 초월한 고전과 전통의 견고한 상징성이 불완전하게 번역되는 문화적 시차에
대한 논의를 포괄하고 있다. 이번 전시 《사라지고도 존재하는》에는 〈화장실 프로젝트〉와 〈번역 시리즈〉가
같은 공간에 서로 마주 보며 설치되어 있다.
〈번역 시리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번역의 과정에서 파생되는
일종의 시차로서의 피할 수 없는 오역인데, 이 필연적인 상황은 원본 형태 안에 축적된 “시간의 감각”을 결코 공유하지 못했을 때 직면하게 되는 시간의 어긋남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말하자면, 〈화장실 프로젝트〉나
〈풍화 프로젝트〉에서는 오랜 시간 다수의 경험에 의해 축적된 시간성을 공통의 역사(시간) 안에 동결시켰다면, 〈번역 시리즈〉의 경우는 그렇게 동결된 시간
안에 축적된 감각을 과연 번역할 수 있는가 하는 번역의 불완전성에 직결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에서 새로운 버전으로 확장된 일군의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2018)는
〈번역 시리즈〉로 시작되어 〈화장실 프로젝트〉와 〈풍화 프로젝트〉로 이어져 온 시간의 감각에 대한 흩어져 있던 논의를 다시 모아 구체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오래전에 만들어서 작업실 한 편에 내내 두었다가 자연스럽게 표면이 변형된 〈화석화된
시간〉(2006) 과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 드로잉〉(2009) 은 “화석화된 시간” 이라는
명제가 함의하는 시간의 감각을 미리 예시하고 있다. 새로운 작업을 앞두고, 신미경은 〈번역 시리즈〉로 한창 도자기를 제작할 때 비누로 만든 도자의 표면에 철 가루로 그림을 그려 넣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공기 중에 산화되어 표면이 와전하게 변형된 과거의 작업에 주목했다. 그는
마치 금속으로 만든 오래된 과거의 유물처럼 본인의 작업실에서 발굴한 그 도자 형태에 내재되어 있을 법한 시간성에 더욱 집중했고, 그러한 시간의 논리를 체계화하여 금속 가루를 이용한 〈화석화된 시간〉의 새로운 버전을 제작했다.
〈폐허풍경〉에서
건축적인 구조 곳곳에 흩어 있던 불완전한 형태들을 떠올려 볼 때, 신미경은 폐허의 풍경이 제시하는 화석화된
시간 안에서 이미 과거의 한 시점에 완료되었던 작업이 여러 시간의 층위들과 접속하여 새로운 형태로 “발굴되고” 혹은 “되어가는” 시간의
감각을 익히고 있다. 그는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에서 실패하여 방치되었던 비누 도자기들에 은박이나
동박을 입혀 빠르게 표면을 산화시킴으로써, 실제의 시간으로부터 방치되어 왔던 과거의 실패한 형태마저
빠르게 압축한 시간의 축적을 힘입어 “화석화된 시간”의 유일무이한
상징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한 셈이다.
마치 “사라지고도
존재하는”이라는 타이틀로 전시장 안팎의 동선을 연결시켰던 시도에서, 실외라는
조건으로 물기가 축축하게 흐르고 있는 네 점의 비너스 두상보다 실내의 건축적 풍경이 더욱 견고한 “조각적인
형태”처럼 보였던 것도 어쩌면 “화석화된 시간” 이라는 감각이 두 개의 형태를 서로 다른 무엇이 “되어가도록” 이끌었을 게 분명하다. 요컨대, 신미경은
과거 〈번역 시리즈〉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일련의 형태들이 시간 속에 존재하는 방식을 탐구해 온 것처럼 보인다. 특히
그의 작업은 대부분 어떤 한순간에 고정된 형태로 전시장에 진입하기까지 그 과정에서 축적된 다수의 시간에 의해 “되어감”의 단계들을 경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