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식화된
시간 속에서는 진정으로 새로운 그 어떤 것도 출현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언제나-이미 거기에 있으며 그것의 내속적 잠재성만을 전개한다. (…)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시간성을, 자유의 시간성을, (자연적이고/거나 사회적인) 인과관계 사슬의 근본적 파열의 시간성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1949-)2
1. 도입
눈이 없는 미니마우스 인형을 껴안고, 정작 자신의 감은 눈꺼풀에 그 인형의 눈동자와
비슷한 화장을 한 채 변기에 앉아있는 여자의 사진이 미술일까? 만약 그것을 미술로 인정한다면, 감상자인 우리가 그 사진에서 찾아야 할 미학은 무엇인가? 서울 삼각지의
장식용 그림을 판매하는 가게에서 산 키치 풍경화를 액자 째 두 쪽으로 자르고 그 사이에 가로 줄무늬가 그려진 기다란 패널을 끼워 넣은 작품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사물의 재활용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스테레오타입의
미술에 대한 도전으로 읽어야 할까? 길을 가던 소년이 늑대에 잡아 먹히고, 옛날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 그 소년의 할머니가 늑대의 뱃속에 들어갔다 다시 소녀로 태어난 후 왕자님을 만나고
등등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난센스 이야기. 우리가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이야기들의 짜깁기이자 재창조 같은
그런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는 작품은 미술관 관객에게서 어떤 감상을 기대하는 것일까? 예수, 성모마리아, 석가모니, 공자, 노자, 마호메트 등등의 신 또는 성인(聖人) 도상을 눈, 코, 입, 얼굴형, 왼쪽․오른쪽 상반신, 하반신 등으로 나누고, 사람들에게 그 중 가장 선호하는 부분들을
여론조사 해서 최고점을 받은 부위들로만 조합해 만든 조각상은 어떤 절대성을 표상할까? 그것은 특정 종교나
위대한 정신을 뒤범벅 시킨 괴물일까? 아니, 혹시 그 조각상은
어떤 교리나 철학도 표상하지 못하는 가장 인간적인 동시에 이상적인 현실의 아이콘(icon)이 아닐까?
글을 읽는 독자들은 위의 여러 질문이 뜬금없고 혼란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또는 무언가 매우
잡다하고, 복잡하며, 이질적인 것들이 혼합돼 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정작 던져진 질문보다, 그
질문을 위해 제시된 사례들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지도 모른다. 맞다. 분명히 위에서 내가 수다스럽게 묘사한 예시들이, 문장의 끝머리에서
내가 던지는 몇 마디 질문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런데 그 예시들이 간단명료한 말로는, 세련된 미술비평의 잘 재단된 판단으로는 쉽게 정리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번잡한 용어들로 그것들을 기술하면서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것들은 이수경의 미술이다. 즉 작가 이수경이 199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초반인 현재까지 선보인 작품들 중 일부인데, 나는
이 글에서 그 미술의 세계를 미학과 미술비평으로 조명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니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벌써 나와 있다. 말하자면 미니마우스 풍으로 눈 화장을 한 여인의 스냅사진을 비롯해 위의
모든 것들이 이미 ‘미술’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같은 이미지가 어떤 미적 가치를 지니는지, 그런
작품을 어떻게 감상하고, 어떤 비평적 독해가 가능한지에 대한 ‘인정된
답’이 충분히 주어져 있지 않다. 또한 앞서 예시한 이수경의
작품들처럼 미술이 행해지고 작품이 만들어질 때, 우리는 어떤 독창성의 원천 및 메커니즘을 말할 수 있는지,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향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정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마도 이 글은 그러한 미학적∙비평적 불충분함, 또는
불확정성을 상쇄시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이 글에서 이수경의 미술이 유발하는 예술에
관한 물음과 그에 답할 수 있는 여러 논점들을 작가의 개별 작품들을 중심으로 펼쳐볼 수는 있다. 그녀가
이십여 년의 짧지 않은 작업 이력을 쌓으며 매우 다양하고 다질(多質)의
미술을 선보여 왔다는 점에서 그 스펙트럼은 넓고 다채롭다.
2. 미니마우스, ‘하지
않는 쪽으로(prefer not to)’를 넘어3
이수경은 1990년대 초부터 당대의 주류 미술 경향과는 ‘다른∙그런 경향에 따르지 않는’ 시각언어를
구사하고, 이를 다양한 매체를 통해 물리적으로 구현한 작품을 제시해왔다. 즉 이 작가는 기존의 미술 틀에 편입되기보다는, 각각의 작품에 조응하는
새로운 형식, 표현방법론, 기교, 매체 활용법을 통해 매번 실험적이고 낯선 미술을 실현시켜 왔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수경의 미술을 ‘실험적’이라고 평가할 경우, 그 의미는 미술사적으로든 미학적으로든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하거나 관례화되지 않은 무엇이 ‘미술’이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실험적인 작품은 이미 어떤 것도 미술로 인정할 태세를 갖춘 현대 미술계의 전문가를 제외하고, 감상자 일반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혹은
감상자의 인식과 감각에 기입된 미술에 대한 정의, 미의식, 미적
경험과는 차이가 나기 때문에 혼란을 야기하거나, 심지어는 미술작품으로서의 그 존재 자체가 전혀 인지되지
못한 채 사라질 수 있다. 사실 일반 대중의 미술에 대한 이러한 보수적 수용 가능성이 수많은 작가들에게
심리적으로든 제도적으로든 창작의 압력으로 작용한다. 예컨대 자신의 작품이 평범한 미술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외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작용하는 것이고, 관람객의 수와 대중적 반응을 중시하는 미술기관들의 전시나
프로젝트에서 제외되지 않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내면적 규율로 작동하는 것이다. 다수의 작가들이 반미학적이거나
전위적인 미술과는 거리가 있는 미술, 즉 어느 정도는 상투적이고 어느 정도는 유형화된 미술을 반복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지만 현대미술의 역사는 흥미롭게도 반미학과 전위적 예술 실천을 통해서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레디메이드 아트(ready-made art)’를 통해 미술은 작가의 수공업적 노동만이 아니라 예술적 개념을 제시하는 일까지 자신의
영토로 확장시킬 수 있었다. 또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의 ‘실크스크린 회화(silk
screen painting)’와 더불어 현대미술은 노골적으로 대중문화와 유착하는 ‘팝아트(pop art)’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뒤샹이 “미술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 사이의 게임”4 이라고
말한 맥락의 미술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 미술계의 전문가들은 작가의 실험적인 예술 시도를
언제나 환영하고, 사실 그로부터 아직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미술의 언어를 배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현재 내가 알고 있고 긍정하는
다종다양한 미술의 형식 및 속성, 또 언제나 그러한 것들을 기꺼이 미술로 받아들이는 열린 태도의 중요성을
나는 기존 미술에 도전하는 작가들의 작품과 더불어 깨우쳤다. 그 가운데 특히 이수경의 미술이 있다.
현대미술이 하나의 사건, 말하자면 아주 잠깐의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이미지의 제시 같은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나는 1999년 초, 이수경의 미니마우스
사진(1998)을 보며 했다. 감은 눈두덩에 아메리칸 대중문화의
최대 아이콘 중 하나인 미키마우스의 짝 미니마우스의 플라스틱 눈과 비슷한 눈동자를 그린 젊은 여자의 사진. 그것은
그저 어린아이처럼 우연히 자기 옆에 있던 물건을 가지고 장난을 친 누군가의 대수롭지 않은 흔적처럼 보인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그러듯이, 그 순간이 재미있어 대충 사진으로 찍어놓은 이미지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 사진에서 한국현대미술이 ‘극히 작고, 극히 가볍고, 극히 일시적인 것’이
될 가능성을 발견했다. 동시에 그러한 사소함, 심각하지 않음, 순간성이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미술을 벗어나 미술의 폭을 확대하고, 미적
다양성에 하나의 층을 더하며, 미적 경험의 시간을 세분하는 감각이라고 판단했다. 우선 나 자신이 그 미니마우스 여인의 사진으로부터 인간의 얼굴과 그 위에 덮인 이미지의 아주 얇은 막이 섬세하게
붙거나 떨어져나가는 어떤 감각의 예민한 순간을 경험한 듯 했으며, 그 경험이 아주 즐겁고 경쾌하면서도
생경한 미적 지각을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해서 그런 찰나적 지각, 즉
기존의 둔감한 사고와 감각으로부터 낯선 것․상태를
예리하게 저며 내는 미학이 한국현대미술의 새로운 속성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수경의 얼굴 위에서
미니마우스의 이미지는 화장을 지우는 순간 사라진다. 또 아무리 현대미술에서 사진이 대세라고 해도, 이수경의 그 사진은 우리가 기꺼이 예술사진으로 인정하는 스펙터클하거나 초 정밀한 이미지에 견주면 한참 초라하다. 하지만 그 덧없음, 소박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기묘한 가장(假裝) 행위와 사진이
노출하는 일상적 맥락이, 조형예술의 추상적 이미지 및 불투명한 의미 따위에 길들여진 이들에게는 신선한
청량제 구실을 할 수 있다. 가령 기존의 미술작품에서 진지함, 절대성, 무시간성에 대한 감각만을 단련한 감상자에게 이수경의 사진은 그러한 감각의 모서리를 깎아내 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미감을 느끼도록 자극한다는 말이다.
덧없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물리적 시간 속에서 흔적만 남기고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
그 생각이 감각적 표현 형식을 얻어 오늘 우리에게는 해프닝, 퍼포먼스, 장소 특정적 예술 등으로 일반화됐다. 또 창작의 비가시적 주체로서
작가가 아니라 자신의 작품 속에서 유희하는 작가상, 그 유희의 배경이 미적 이념세계가 아니라 일상의
사물과 행위가 되는 미술. 이 또한 우리가 현재 주변에서 쉽게 마주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 경향이다. 여기서 나는 이수경의 1998년 사진 한 장이 그 같은 미술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주장은 1960년대 이후
서구 미술이 다변화된 양상을 고려할 때, 또 1970-80년대
행위미술과 같은 한국미술의 몇몇 실험적 시도들을 고려할 때도 오류 가능성이 너무 크다. 다만 나는 이수경의
미술이 가진 특수한 속성과 메커니즘을 정의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1990년대 말 한국미술의 주류 경향과
그녀의 작업 방향이 배치됐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그것은 요컨대 전자에 대해 후자가 ‘하지 않는 쪽으로(prefer not to)’ 나아가는 방식이다. 추상화처럼 관념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는 쪽으로, 민중미술처럼 교조적인
메시지에 묶이지 않는 쪽으로, 모더니즘 미술의 가장된 고급함과 순수성을 따르지 않는 쪽으로. 이 같은 방식은 완곡하고 소극적인 저항이다. 그러나 그런 방식에
미술가의 ‘무엇인가를 하는’ 속성, 즉 세상의 질료들로 형태가 있는 것들을 제작하고 산출하는 속성이 결합되면 그것은 더 이상 소극적인 저항이 아니다. 이를테면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의 1853년 소설 『바틀비 Bartleby, the Scrivener』속
주인공 필경사 바틀비가 ‘하지 않는’ 식의 저항 모델이라면, 이수경의 미술은 ‘하지 않는 식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창작의 모델이다. 그런 방식이 지속될 경우 미술은 내밀하면서도 선
굵은 개성을 갖게 된다.
3. 먼길 이야기, 부채의
상상력
이수경의 미술 전체를 조망할 경우, 각 작품들의 세계는 불연속 하지만, 그 저변을 받치고 있는 작가의 예술적 태도와 실험적 창작 행위는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수경 미술의 핵심으로 ‘불연속성’과 ‘연속성’, ‘실험성’과 ‘실현능력’을 꼽는다. 불연속성은 연속성과 상반된다. 실험성과 실현능력 또한 전자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성향이라면, 후자는 시도에 그치지 않고 현실화시키는 힘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른 성격을
갖는다. 해서 한 작가의 미술에 그 상반되거나 다른 요소들이 내재한다고 말하면 일견 그 자체로 모순이고, 논리의 비약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비단 이수경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한∙하고 있는 ‘현대’ 미술가들 안에서 이 같은 내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현대미술이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기 때문이고, 그 새로움이 단발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축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미술의 실험성은 공허한 말의 잔치가 아니라,
언제나 이미 지각 가능한 물리적 작품으로의 실현을 통해서만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수경은 매 작품마다 새로움을 실현하고, 그 새로움의 실현을 지금까지 지속해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나는 이수경의 상상력이 그 힘의 원천이고, 그것을
통해서 매번 새로운 작품이 산출될 수 있었다고 말하겠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여기서 ‘이수경의 상상력’은 기성 사물들,
이야기들, 형상들, 감각과 인식의 내용들이 가진
질서를 바꾸고, 이미 상투화된 형태로 덩어리진 존재들의 내부에서 새로운 단면들을 분할해내며, 주어진 공간과 시간을 이질적인 이미지 차원으로 전이시키는 역량이다. 그것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부채에 빗대 상상력을 정의했던바,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 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5이다. 말하자면 그런 상상력이란 펼쳐지고 접히면서 공간을 재창출하고, 사태를
감추거나 드러내며 상황을 연출하는 부채의 메커니즘과 유사한 것이다.
이수경의 작품 중에서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먼길 이야기 Story of MunKil (long
journey), 1999〉라는 ‘텍스트-구술’ 형태의 작품이 그 같은 상상력의 양상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서두에 ‘이야기의 짜깁기이자 재창조’라는 말로 언급했던 작품이 바로 이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화들의 아주 작은 에피소드 내부로 파고드는 이수경의 상상력을 본다. 또 단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식으로 완결되는 옛 동화들의 일반성에서 아이러니, 폭력, 미결정성, 쾌락 같은 다양한 주제를 거미처럼 뽑아내 또 다른 텍스트로
그물을 짜는 작가의 상상력과 실행력을 보는 것이다. 이 작품만이 아니다. 〈번식 드로잉 Breeding Drawing, 2005〉, 〈매일 드로잉 Daily Drawing, 2005-현재〉에서
우리는 이수경의 상상력이 얼마나 다채로우면서 끈질긴 연속성을 갖고 있는지, 그 상상력이 어떤 이미지
퍼레이드를 시연할 수 있는지 체감하게 된다.
〈번식 드로잉〉은 한국 등 아시아 문화에서 부적이나 불화를 그릴 때 사용하는 석재인 경면주사(cinnabar)를
써서 한지 위에 여인의 형상을 그린 12개 드로잉 연작이다. 여기서 12개는 단지 작품의 수량이 아니라, 작품 제목이 지시하는 ‘번식’의 결과다. 요컨대
이 연작은 어떤 드로잉이 자체적으로 번식하는 메커니즘 자체가 주제인 것이다. 이수경은 그 번식의 역학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이 첫 번째로 그린 이미지를 뒤집어 다음 그림에 전사하는 방식을 11번 반복하고, 그 각 단계의 그림을 또한 좌우 대칭으로 복사하는 방식을 썼다. 그렇게
해서 애초 중국 서커스 소녀처럼 기묘한 곡예를 펼치는 한 소녀의 형상이 다음 그림에서는 좌우 똑같은 얼굴을 한 두 형상으로 번식하고, 그 다음 그림에서는 넷으로, 여섯으로 이어지며, 급기야 화면을 중심으로 완벽히 대칭을 이루는 V자 형태의 얼굴 대열로
증식하는 〈번식 드로잉〉이 실현되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수경은 2004년경 심리치료 상담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매일 하나의 원 안에 이미지를 그려 넣는 활동으로 심리적 문제를 완화시키는 일명 ‘만다라 미술 치료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치료법을 자신의 생활∙작업에 적용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매일 드로잉〉이다. 전제 조건은 단 둘, 즉 ‘매일 그리기’ 그리고 ‘원(圓)’. 꽤나 사소해
보이지만 실제로 해보면 상당한 압박이 되는 그 조건을 따르며 이수경은 약 7년에 걸쳐 가로 세로 30cm 크기의 종이에 색연필로 수천 장의 드로잉을 했다. 그리고
그 중 176개 작품만을 뽑아 지난 2011년 아르코미술관
개인전에서 성모마리아를 찬미하는 송가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와 더불어 ‘드로잉-사운드 설치미술’의 형태로 처음 선보였다. 사람들은 그 전시에서 작가의 풍부한 표현능력과
함께 종잡을 수 없는, 그래서 정말 무한해 보이는 이미지 상상력을 경험했다. 동시에 아주 단순하고 작은 규칙이 인간의 상상력과 연속적인 창작 행위를 변수로 만나서, 자연의 창발(emergence)처럼 예측불가능하고 환원 불가능한
꿈 세계(Dream-world)를 구축해내는 생생한 사례를 발견했다.
천일야화(千一夜話)의 세헤라자데가 ‘천일하고도 하루’라는 무한한 밤들로 이어지는 끝없는 이야기를 풀어내듯이, 귀에 익지만 분명 처음 듣는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읊는 1999년의
〈먼길 이야기〉. 자연의 식물들, 특히 쌍떡잎 식물들이 그러듯이
대칭을 이루며 자기 증식하는 2005년의 〈번식 드로잉〉. 그리고 ‘아침, 점심, 저녁’ 또는 ‘24시간’, 이렇게
인과적 시간체계에 매인 똑같은 날(日)들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느 하루도 결코 완전히 똑같을 수 없는 매일의 생리처럼, 동일한
크기의 원 속에 어느 것 하나도 같지 않은 이미지로 폭발하는 현재의 〈매일 드로잉〉까지. 우리는 이들에서
이수경의 미술이 어떻게 불연속하면서 연속하는지, 어떤 상상력이 이미지의 드림월드를 축성해내는지를 실감한다. 아니, 그 범위, 강도, 끈질김, 변화무쌍에 기가 질릴 것 같다.
4. 순간이동 연습용 그림, 주관성의
예술적 이행 구조
이수경은 1990년대 작업 이력 초반 주로 문화비판적 관점에서 작품을 창작했다. 가령 모더니즘 미술의 순수성과 독창성, 그리고 자기 지시성(self-reference)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의도적으로 키치, 레디메이드, 차용(appropriation), 혼성모방(pastiche)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방법론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설치작품들을 내놓았다. 또한 그녀는 대량생산된 상품 및 매스미디어 이미지를 주요 요소로 차용하거나 변조한 작품들을 제작하여, 대중매체 및 정치 사회 제도가 만들어내고 상투화시키는 여성이미지를 작가 자신의 구체적 경험 및 사회학이나 문화연구
이론에 바탕을 두고 비판적으로 분석한 미술을 전개했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 이수경은 한쪽으로는 1950년대 앵포르멜, 60년-70년대
추상미술, 80년대 민중미술이 대표하며 이어진 한국 미술계에 반미학적이고 비(非)미술적인 미술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으로는, 남성작가 위주의 한국 주류 미술계에 페미니즘
미술을 실천적으로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수경은 이 같이 개념과 논쟁의 생산성은 좋으나 심미적 가치 또는 감상자의 미적 경험 면에서는 호혜적인 반응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은 미술에서 멈추지 않았다. 달리 말해 그러한 개념주의와 비판성의 현대미술에 스스로를 한정시키거나, 비슷한 유의 작업을 자기 복제하지 않고, 지적인 내용 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서와 지각의 내용 면에서도 충족될 수 있는 미술을 새롭게 실행하는 쪽으로 이행해온 것이다.
나는 이 작가의 〈순간 이동 연습용 그림 Painting For Out of Body Travel,
2000〉이 그 이행의 특수성을 상징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2000년 독일 카셀의 프리데리치아눔(Fridericianum)에서 열린 《대지의 노래 Song of the
Land, 2000》전에 선보이기도 했던 그 작품은 외형상 기성품과 창작물이 결합한 구조를 하고 있다. 즉 익명의 화가가 그린 키치 풍경화와 그 풍경화에 대한 이수경의 개입 ―기성품
그림을 두 쪽으로 나누기, 그림에 사용된 색채를 추출해서 가로 줄무늬 패턴 그림 그리기, 그 줄무늬 그림을 쪼개진 키치 그림 사이에 삽입하기 등― 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물리적 형식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 작품이 미술작품을 향한 감상자의 미적 경험을
긍정하고, 그 경험의 환영적인 측면을 극대화하는 데 적극적인 ‘도구’를 자처한다는 사실이다. 〈순간 이동 연습용 그림〉은 키치를 조롱하거나
혹은 모더니즘 회화를 냉소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작품은 도자기에 그려진 아름다운 풍경에 감동한
노인이 그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 갔다는 중국의 설화처럼, 그림의 환영 작용에 기꺼이 몸을 맡기기를
권하는 가상현실적인 미술이다. 작품의 영문 명 ‘Painting
For Out of Body Travel’이 이미 알려주는바, 우리 감상자가 ‘육체를 이탈해 여행을 떠나기에 좋은 그림’인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가 쓴 다음과 같은 말처럼. “현기증이 날 때까지 그림
한 가운데를 응시하며 힘을 빼세요. (…) 당신은 마침내 그림의 장면 속으로 착륙하는 ‘육체 이탈 여행’을 경험할 것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연습하면 그림 속의 호수나 폭포 속으로 떨어지는 것도 가능합니다.”6
다른 한편, 이수경의 이행은 문화적 차이들의 그물 뜨기 방식을 통해 작품으로 구체화됐다. 〈부모의 접시 Parental Plates, 2003〉와 〈번역된
도자기 Translated Vase, 2000/2006-현재〉시리즈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2003년 작가는 이탈리아의 도자산지로 유명한 알비솔라(Albisola)와
사보나(Savona) 지방을 찾아 ―사보나의 가보티(Gavotti) 미술관에서 열린 제 2회 《현대미술도자전 Ceramics in Contemporary Art, 2003》에 참여하면서―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 12명을 인터뷰했다. 그들은
부모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도자기 접시를 하나 또는 둘 직접 골라서 그 그릇에 얽힌 기억을 작가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작가는 어쩌면 다른 이들에게는 단순한 물건으로만 비칠 그 접시들을 매개로 ―마치
타임머신처럼, 또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자신들이 일하고
살아가는 현실의 생활공간에 앉아서 상상적으로는 추억의 시공간, 상념의 미시세계(micro-world)를 여행하는 그 이탈리아 지역민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카메라에 담았다. 영상을 보면 그들 모두는 낯선 나라 한국에서 온 아티스트 앞에서 매우 진지하고 솔직한 모습으로 자신과 부모
세대의 삶을 회고한다. 그렇게 소박한 사물을 통해서 축적한 자신만의 경험 및 기억을 타인과 공유하는데, 비디오아트의 특성상 그 공유는 12명 각자와 이수경의 1:1 관계를 넘어 〈부모의 접시〉를 감상하는 누구에게든 산포돼 나눠가질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헌데 작가는 아마도 이러한 방식의 공유, 이 같은 나눔의 향유를
영상이미지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형태로 실현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수경은 인터뷰 이후 그 이탈리아인들의 소장품과 빼닮은 접시를 알비솔라 지역 공방(Ernan Design)에서 20개 만들고, 거기에 한국 음식을 담아 전시 개막일에 사람들에게 대접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누군가는 미술관 방문자에게 자신이 요리한 음식을 나눠주는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 1961-)의 퍼포먼스아트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 1965-)가 “사람들이 흥에 겨움(conviviality)과 나눔의 의미를 다시 배우는 곳”이라고 의미
부여하며 “관계적 미학의 가능성”을 타진했던 그 미술 말이다.7 정황상 이수경의 경우도 그러한 미학적 판단 범주에 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작가의 작업에서, 일반적인 차원의 문화 공유 및
향유의 공간을 넘어 개인들이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in-divided) 자신의 내면 ―더 이론적 용어를 쓰자면 ‘주관적 경험(subjective experience)’― 을 이방인 앞에 꺼내고, 그
이방인은 기꺼이 그것을 자신의 미술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구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구조가 미술작품이라는 문화적 형식 속에서만 가능한 ‘개인성(individuality)의
나눔(dividing)∙공유(sharing)’, ‘정서들의
이행’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5. 번역된 도자기, 번역자의
과제
앞서 〈부모의 접시〉는 전사(前史)를
가지고 있다. 〈번역된 도자기 알비솔라 Translated Vase
Albisola, 2001〉가 그것이다. 이수경은
2001년 알비솔라의 세라믹 비엔날레에 출품할 작품으로 18세기 조선시대 백자를 안나 마리아(Anna Maria)라는 현대 이탈리아인 도예가가 ‘번역’하는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이때 번역은 조선 백자를 현대 도공이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차원에서 그대로 본떠 만드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재현’이지 ‘번역’이라 할 수 없다. 이수경은 마리아에게 백자를 모티브로 한 한국 현대시조, 예컨대 김상옥(金相沃,
1920-2004)이 1947년 지은 〈백자부(白磁賦)〉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해 들려주고8, 떠오르는 심상을 도자기로 표현해 볼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권 사이의 언어 번역, 상상과 물질적 형상의 번역이 바로 이수경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통해 시도한 ‘번역’이다. 번역의 결과물은
일견 동양의 여느 도자기와 유사한 외양을 하고 있지만,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동양과 서양의 도자 문화에서
산출된 기존의 어떤 도자기 범주에도 들지 않는 이질적인 백자 화병 12개였다. 그 12개 화병은 감상자로 하여금,
자신이 속해 있어 그만큼 익숙한 문화의 경계를 넘나들게(trans-cultural) 한다. 또 특정 민족, 영토, 역사, 취미(taste)에 고정되지 않는 독특한 정서와 이미저리를 유발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독특성이 뿌리 없는 것,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조선의 백자문화와 이탈리아 도자 공예의 교섭을
통해 발현한 것들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아주 깊은 뿌리에서 양분을 받아 성장한 오늘의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문화적 이행과 협업을 통해서 실험적인 현대미술작품으로 탄생한 지금 여기의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번역된 도자기 알비솔라〉는 조선과 이탈리아, 과거와 현재가
고유하게 형성한 민족 문화적 배경을 기반으로 탄생한 현대미술작품이다. 그리고 이수경이 그 작품 이후 2년이 지난 시점에 실행한 〈부모의 접시〉는 거대서사에서 벗어난 가족사(史)와 개인들의 기억이라는 원천을 통해서 현재화된 현대미술작품인 셈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번역자의 과제는 원작의 메아리를 깨워 번역어 속에서 울려 퍼지게 하는
의도, 번역어를 향한 바로 그 의도를 찾아내는”9일이다. 달리 말해, 원작의 역사를 현재 시간에 번역하는 일, 원작의 잠재성을 지금 여기서 현실화하는 일인 것이다. 나는 이수경의
작품들이 그에 비견할만한 미술이라 생각한다. 문화적 다원성이나 예술 취미의 유목주의를 부르짖으며 기원∙원천을 부정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크든 작든 역사, 공동체, 개인사 같은 내러티브로부터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 조응하는 핵심 요소들, 그
잠재성의 상태에 있는 것들을 발현시키는 과제를 수행하는 미술 말이다.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이수경의 2011년 작 〈휘황찬란 교방춤 Dazzling Kyobangchoom, 2011〉 또한 조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 작품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서 특수한 측면을 ‘조각-장소 특정적 설치-공연(춤과
음악)’이 한데 어우러진 형태로 구현한다. 〈휘황찬란 교방춤〉의
큰 주제는 조선시대 기생의 기예(技藝) 중 하나였던 ‘교방춤’의 원형을 보존하면서, 그것이
지금 여기의 문화 및 예술로 새롭게 탄생하는 모습을 가시화하는 것이었다. 우선 작가는 교방춤이 일제강점기
동안 성적 유희의 춤으로 변질된 역사적 사실에 착안했다. 그리고
2011년 3년간의 원형복원공사를 마치고 국립 복합문화공간으로 새롭게 개관한 ‘문화역서울 284(舊 서울역)’의
장소 특정적 조건을 직간접적으로 활용한 무대를 만들고 5회에 걸쳐 퍼포먼스를 펼쳤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수경이 한편으로 작가 자신의 사회 역사적 의식을 작품으로 구체화하는 메커니즘, 추상적인 미술의 공간이 아니라 실제 장소의 문맥을 탐사하는 접근법, 그리고
매체 및 표현 방법론을 다층적이고 다원적인 방향에서 모색하는 열린 태도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작가는
자기 미술에 ‘동시대성’을 수렴시킨다. 다른 한편, 이수경은 한국의 근현대사와 지금 여기 문화 예술의 구체적
상황들을 작품의 기초 서사이자 독자적 개념으로 설정함으로써 글로벌 미술계의 여타 미술가들 및 그들의 작품과 차별성을 확보한다.
6. 가장 멋진 조각상, 미의
보편성과 개별성
도예문화가 융성했던 고려와 조선시대, 명장들은 일정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도자기는
과감히 깨뜨려 버렸다. ‘최고’의 기준에 견줘 실패작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남들 눈에는 모두 비슷비슷한 것 같고, 그
정도면 충분히 좋아 보이는 것들이 대가의 눈에는 세상에 내놓아서는 안 되는 잘못된 것이었다. 이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지는데, 명쾌한 논리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그만큼 도예가들 내부에는 엄격한 미적 기준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흥미롭게도 이수경은 그렇게 명장들이 깨뜨려버린 도자기 파편들을 2002년부터 금박으로 이어
붙여 조각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 일명 〈번역된 도자기〉를 계속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번역된 도자기 알비솔라〉의 발전된 형태라고도 할 수 있고, 아니면
완전히 별개의 시리즈라고도 볼 수 있는 작품인데, 작가는 〈번역된 도자기〉라는 제목을 통해 둘 사이에
어떤 연속성을 내포해두었다. 그렇다면 이 후자의 작품에서 ‘번역’은 무엇일까?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파편’과 ‘전체’ 사이의 번역이다. 또는 ‘버려진
것’과 ‘예술품’ 사이의
번역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의 해석을 넘어선 지점이 〈번역된 도자기〉에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 지점이란 모든 예술가의 궁극적 목표로서 ‘절대적인 미의 실현’과 그것을 위한 ‘매순간의 실천’ 사이에
만들어지는 역동성이다. 도예 명장이 수준 미달의 작품을 깨뜨려버릴 수밖에 없는 것은 명장의 정신과 감각
안에 절대적인 미의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지금 자기 앞에 놓인 도자기를
파편 내는 고통을 감수한다. 하지만 이수경은 의미심장하게도 그 버려진 파편들로부터 자신의 정신과 감각이
정의한 현대미술, 그에 부합하는 절대적인 미의 작품을 실현시키려 한다.
뒤집어진 역동성이다. 전적으로 그 뒤집어진 역동성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래서 그런지 〈번역된 도자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정하는 아름다움과는 완전히 다른 미를 뿜어낸다. 한편으로 그것들은 마치 매끈한 피부 아래로부터 분출되면서 일그러지고, 기괴하게
해체∙재결합되는 신체기관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깨진 도자기의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질감, 도편(陶片)을 잇고 있는 금박 선(線)의
화려하면서도 단정한 모양새로 인해 아름다운 존재로 느껴진다. 이 상반되는 미적 성질들의 결합이 이수경의
〈번역된 도자기〉를 유일무이한 미적 아우라의 세계로 이끌고, 감상자에게 이전에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는
경험하지 못한 기이한 미의 순간을 제공한다.
나는 작가가 2006년 일본 《에츠코 츠마리 트리엔날레
Echigo-Tsumari Art Triennale, 2006》, 2007년 《안양공공미술
프로젝트 Anyang Public Art Project, 2007》,
2008년 《리버풀 비엔날레 Liverpool Biennale, 2008》, 그리고 2012년 《우크라이나 비엔날레 Kyiv international Biennale, 2012》에 참여하면서 시행한 〈가장 멋진 조각상 The Very Best Statue, 2006-현재〉 프로젝트 또한 〈번역된 도자기〉와 같은 미적 역학을 갖고
있다고 본다. 〈가장 멋진 조각상〉은 서두에 잠깐 언급한 프로젝트로,
작가가 작업을 수행하는 지역의 사람들에게 신 또는 성상의 이미지 중 특히 선호하는 부위를 물어, 그
여론조사의 통계 값에 의거해 ‘최고의 조각’을 만드는 방식의
미술이다. 그렇게 해서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처럼 보이지만 눈매는 동양인의 것이고, 오른쪽 상반신은 공자처럼 보이며, 왼쪽은 불교의 수행자의 그것을
한 입상(立像)이 탄생했다.
또 성모마리아의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 전면에 머금은 채 십자가에 매달린 ―양쪽으로 펼친
팔이 그런 상황을 연상시키는― 헐벗은 예수상이 세상에 나왔다. 놀라운
점은 이렇게 사실관계를 따지고, 말로 설명하면 그로테스하고 심지어 괴물이 유추되는 그 조각상들이 실제로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감상자가 그 앞에서 어떤 왜곡이나 변질, 기이함도 느끼기 어려울 만큼, 그 아이콘들은 친근하며, 조화롭고 영적(靈的)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이유는 제각각의 기준에서 최고를 표상하는
형상의 부분들이 이수경의 손에서 ‘이질성으로 구성된 하나’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번역된 도자기〉가 도자 명인이 고수하는 미의 기준에서 낙오된 도자 파편들로
이뤄진 생경한 미의 화신인 것과 유사한 역학이다. 이를테면 〈가장 멋진 조각상〉은 각 문화권의 사람들이
가진 미의 관념이나 종교와 정신의 표상에 근거해 ‘최고’로
선택된 부분들이 하나의 형상으로 조직되면서, 가장 보편적인 동시에 특수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동시에 생경한
아이콘으로 재창조된 것이다.
이상 〈번역된 도자기〉와 〈가장 멋진 조각상〉를 보며 나는 미의 보편성과 개별성 관계를 생각했다. 우리는
흔히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미가 있다고 상정한다. 또 그것이 시공을 초월해서 유지되고 사람들 안에서 전달되면서
보편성을 획득한다고 말한다. 그때 미는 순수한 하나이고 전체이다. 하지만
이수경의 작품들은 그러한 미의 보편성, 하나이자 전체로서의 아름다움이 개별들의 조합이자 이질적인 것들의
네트워크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서로 멀리 떨어진 것들, 서로
원천이 다른 것들 간의 번역을 통해서 어떤 새로운 보편성이 실현될 가능성을 제시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도식화된
시간 속에서는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 출현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기존의 시간 체계, 관계, 연결망을 파열시키고 출현하는 것들, 기존의 인과관계들을 참조해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라는 취지로 말하면서 “숭고”가 그 계기를 표시한다고 썼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더 나은 판단에 거슬러서’ 손익 대차대조표를 무시하면서 ‘자유를 감행할’ 때 (…) 숭고의 감정은 상징적 인과성의 연결망을 순간적으로 중지시키는
어떤 사건에 의해 일깨워진다.”10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징적 인과성의 연결망을 중지시키고 자유를 감행하는 일이다. 듣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것을 미학의 영역에서 풀이해보면,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전제된 미의 속성, 형태, 양식, 조건들의 망을 끊어내고 창작의 개별적 자유를 감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제까지
내가 이수경의 미술을 두루 살피면서, 그 작품의 외관과 속성, 메커니즘과
결과, 제시와 향유의 차원을 조명하면서 여러 차례 ‘실험성’을 강조했던 점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또한 그 실험성이 기존의 미술
경향을 따르지 않는 쪽으로, 하지만 단지 반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실천과 쌍을 이루고
있다고 했던 주장을 기억해줬으면 한다. 그것이 다름 아니라 지젝이 말하는 상징적 인과성의 연결망을 중지시키고
자유를 감행해 “진정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출현시킨 현대미술의
한 사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미학자이자 미술비평가로서 나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해야겠다. 나는 당신에게 현대미술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말해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대미술의 근본
범위라고 말해줄 수는 없다. 또 나는 현대미술을 하는 어떤 작가가 실험적인 작품을 내놓았을 때, 그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거나 분석함으로써 그 작품에 비평적 차원을 부가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작가의 다음 행보가 어떻게 될 것인지, 다음 작품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나아가 어떤 미학을 추구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단언할 수 없다. 이유는 내 무능함 탓도 있겠지만, 현대미술 자체가 지극히 개별적인
미학들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개별적인 미학은 예술적으로 성공한 경우에만 그 이름을 부가 받을
수 있는데, 여태까지 우리가 이 긴 글에서 다룬 개별 미학의 이름은
‘이수경적인 것’이었다.
1.
강수미, 『비평의 이미지』, 글항아리, 2013 수록
2.
Žižek, Slavoj, The Ticklish Subject, 이성민 역, 『까다로운 주체』(b,
2005), p. 76
3.
이하의 소제목에서 나는 먼저 이수경의 작품 제목을, 다음에는 그에 대한 내 비평의
핵심 개념 또는 주장을 하나로 구성했다.
4.
“Art is a game between all people of all periods” : Bourriaud, Nicolas,
Esthétique relationnelle, Simon Pleasance & Fronza (trans.), Relational
Aesthetics, (Dijon: Les presses du réel, 2002), p. 19 에서
재인용.
5.
Benjamin, Walter, “Einbahnstraße”, Gesammelte Schriften Bd. Ⅳ/1, Unter
Mitwirkung von Theodor W. Adorno und Gershom Scholem hrsg. von Rolf Tiedemann
und Hermann Schweppenhäuser, (Frankfurt a. M.: Suhrkamp Verlag, 1981), p. 117
6.
이수경 홈페이지 www.yeesookyung.com
7.
Bourriaud, Nicolas, Esthétique relationnelle, Simon Pleasance & Fronza
(trans.), Relational Aesthetics, (Dijon: Les presses du réel, 2002), p. 70
8.
이 시조의 전문은 이렇다. “ 찬 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 이제 막 백학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 드높은 부연 끝에 풍경 소리 들리던 날, /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 갸우숙 바위 틈에 불로초 돋아나고, / 채운(彩雲)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
/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 드노다. // 불 속에 구워 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 흙 속에 잃은 그 날은
이리 순박하도다.”
9.
Benjamin, Walter, “Die Aufgabe des Übersetzers”, Gesammelte Schriften Bd. Ⅳ/1,
p. 16
10.
Žižek, Slavoj, Ibid., pp. 77-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