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일상은 일일이 포착하기 어려운 현실 이면의 복잡다단한 구조 위에 펼쳐진다. 일상이라는 눈가리개를 쓰고
무심하게 살다가도 문득 그 너머의 세계에 의혹을 품어 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함경아는 지난 15년 간 꾸준히 바로 그 이면의 세계를 탐색해온 작가다. 미술 안팎을
가로지르며 제도비평적 작업을 선보이는 많은 동시대 작가들 가운데에서도 그의 저돌적인 실천력과 집요함은 단연 돋보인다. 그 근성은 이미 작업 초기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2001년 작 〈노란색을
좇아서〉에서 그는 노란색에 대한 호기심 하나로 수년간 아시아 각국을 돌며 노란 옷을 입은 사람들을 취재하며 국가와 인종, 계층과 사회를 가로지르는 노란색의 문화적, 제도적, 종교적 함의를 추적했다.
2006년의 〈허니 바나나〉는 과거 우리
사회에서 부와 풍요로움의 상징일 만큼 비쌌던 바나나의 급작스러운 가격 폭락 배경에 다국적 기업의 횡포, 환경
파괴 등으로 얼룩진 신자유주의 경제 하의 동아시아 바나나 시장의 비정한 현실이 있었음을 드러낸, 시사고발
다큐멘터리에 가까웠던 작품이다. 함경아의 이러한 저돌적 실천은 사소한 삶의 단편에서조차 그 이면을 꿰뚫어보는
빠른 직관에서 출발한다. 예민한 통찰력과 분명한 주제의식으로 그는 권력과 자본의 바깥세계가 느끼는 상실감, 제도와 공권력 아래의 무력감, 부조리한 현실, 역사의 아이러니 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맥락을
짚어 불가항력적인 현실의 이면과 생리를 풍부한 서사로 펼쳐 왔다.
권력의
가려진 얼굴들
무엇보다도
함경아의 주제 의식이 선명하게 읽히는 작품은 낡은 합판과 버려진 문짝들로 계단을 쌓아 올린 〈오데사의 계단〉(2006)이다. 차라리 제단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계단 위에는 비데와 의자, 골프화, 카펫, 확성기, 타일, 쇼핑 카트 등이 널려 있다. 이 잡동사니들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 진압의 핵심 인물이자 군부 정권의 마지막 수장인 한 전직 대통령의 집수리 때
그의 집 앞에 버려진 폐기물들이다. 노골적인 제목이 아니더라도 마지막 계단에 위태롭게 걸쳐진 쇼핑 카트는
〈전함 포템킨〉의 핵심 장면을 강력하게 연상시키면서 러시아 혁명기에 자행된 학살과 광주의 비극을 유비한다. 잡동사니
오브제들의 아상블라주는 원작 영화 속 절묘한 몽타주의 번역본인 셈일터인데, 사실 이 물건들은 주인의 ‘명성’에 비해 너무 평범하다. 권력의
위세를 뽐낼만한 물건들이 골목에 버려질 리가 만무하니, 작가가 주워온 여느 집 살림살이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이 물건들은 막강했던 권력자의 은밀한 이면은커녕 권불십년의 알레고리로 더 쉽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계단의 위압적인 규모는 이런 뻔한 감상주의의 작동을 통제하며 〈오데사의 계단〉를 더욱 다층적으로 만든다.
이
작품에 대해 박찬경은 ‘한때의 권력에 대한 최종 승자는 폭로나 과장된 선전이 아니라 시간’이라 적시하며 역사의 씁쓸한 일면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이는
함경아가 박물관의 전시 형식을 그대로 차용한 작품 〈뮤지엄 디스플레이〉(2000-2010)에서 더 유효한
듯하다. 대체로 세계의 유서깊은 박물관들의 방대한 소장품은(적어도
그 출발은) 시간을 되돌려보면 제국주의 시대에 노획된 문화 유산들로,
이 범국가적 약탈은 암묵적 묵인과 은폐 속에 세월의 면죄부를 얻고 예술의 이름으로 합리화되어 오늘에 이른다. 〈뮤지엄 디스플레이〉는 이 사실을 인지한 함경아의 개인적인 응징 프로젝트였고,
그 전술은 일종의 패러디, 즉 모방범죄였다. 그는
실제로 박물관 카페나 상점 등에서 찻잔이나 접시, 숟가락 등의 소품들을 (역시 예술의 이름으로) 훔쳤고, 그렇게 10년 가까이 모은 대규모 절도 장물 컬렉션을 마치 박물관에서 전시하듯 유리 진열장에 진열하고 물건마다 라벨을
달았다. 절도의 일시와 장소를 기록한 라벨들은 일종의 출처 확인이며 절도에 대한 작가의 용감한 자백(박물관들은 하지 않는)인 셈이다. 결국
〈뮤지엄 디스플레이〉는 공소시효가 일찌감치 만료한 제국주의 시대의 약탈을 현재로 소환하여 또다른 비윤리적 범죄로 재연함으로써 문화 제국주의의 민낯과
이면을 드러내는 전략적 작업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이들과의 들리지 않는 대화
권력과
제도의 이면을 용감무쌍하게 들추는 함경아의 활동은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그의 자수작업에서 절정에 달하고 있는 것 같다. 2008년 어느 날 자신의 집 앞으로 날아든 북한의 체제 선전용 삐라를 본 작가는 민간교류가 금지된 북한 주민과의
소통을 꿈꾸며 자기만의 삐라를 보낼 계획을 세운다. 작가는 인터넷에서 모은 전쟁과 테러에 대한 텍스트와
이미지들, 통속적인 대중가요의 가사 일부 또는 짧은 인사말로 자수 도안을 만들어 중국의 중개인을 통해
북한에 있는 자수 공예가에게 보냈다. 그가 보낸 것은 바깥 세상 정보가 차단된 북한에 전하는 세상 소식이고
작가의 마음이고 인사다. 흰 천을 받아 든 북한의 작업자는 도안대로 한땀 한땀 색실로 수를 놓는 동안
작가가 아로새긴 글귀들을 곱씹듯이 읽었을 것이다. 이렇게 함경아의 자수는 일종의 스테가노그래피가 되어
노동집약적이고 아날로그적이고 촉각적인 행위를 통해 작가와 북한 주민 간의 무언의 대화를 성사시킨다.
이데올로기와
법망을 거스르며 북한 공예가에게 예술적 노동을 맡긴 대가는 속절없는 기다림과 속타는 불안감이다. 불안정한
남북한 정세에 따라 작품의 완성은 기약 없이 유예되기 일쑤고, 그 사이에 작품 일부는 당국의 검열을
피하려는 작업자들에 의해 도안이 변경되거나 훼손되기도 했고, 아예 완성된 작품이 압수되어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난관을 뚫고 1~2년 걸려 작가의 수중에 성공적으로 돌아온
완성작은 이념의 장벽으로 인한 예기치 않은(아니 충분히 예상할만한) 굴곡이
가미된 지정학적 서사로 가득하다. 몇 점이 돌아올 지 알 수 없는 불안한 확률 게임이 된 대신, 살아남은 작품은 결국 더 큰 보상으로 돌아온 셈이다.
이런
지난한 작업 과정은 작가를 좌절시키기보다 되려 새로운 자극이 되었던 듯, 북한 주민에게 말걸기로 시작된
자수작업은 금세 이데올로기 대립과 분단 현실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된다. 자본주의적인 낌새만 있어도 작품을
압류를 당한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경아가 다음 작업을 위해 북한에 보낸 것은 대담하게도 미국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모리스 루이스의 추상화를
차용한 도안이었다. 내러티브가 모두 제거된 루이스의 순수한 색띠들 속에 작가는 남북한의 사회 정치적
이슈같은 무거운 텍스트들을 촘촘히 집어넣었다. 아름다운 색실로 채워져서 돌아온 완성작은 작가가 보낸
모든 텍스트들이 북한 주민들에 의해 요행히 모두 읽혀졌고, 작가의 예술적 모험이 성공했음을 말없이 전한다.
사실
막상 일반 북한 주민들은 그 도안이 유명 미국 화가의 추상화인지도 모를 터이니, 이데올로기 대립을 참조하는
‘모리스 루이스’ 시리즈는 작가 혼자만의 나이브한 첩보 어드벤처물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분단 상황에서 남한의 작가와 북한
자수 노동자 사이의 비밀 협업은 그들과의 지속적인 대화라는 점에서 그의 자수 작업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의 하나다. 자수를 매체로 구상과 제작을 분리해 타자와 협업하는 방식은 알리기에로 보에티와 동일하지만, 함경아 작업의 방점은 이렇게 단절을 극복하고 그들과 대화를 시도함으로써 장막 뒤의 유령같은 그들과의 공존을
확인시켜주는 데 있다.
2015년의
개인전 《유령 발자국》에서 발표한 ‘샹들리에’ 시리즈에서
작가는 자수의 뒷면을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정말 그들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샹들리에’ 시리즈 역시 한반도 분단을 둘러싼 영욕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일체의
텍스트 없이 암흑을 배경으로 제시된 화려하고 거대한 샹들리에는 1945년, 국토 분단의 운명이 결정된 포츠담 선언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열강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욕망을 표상한다. 이 샹들리에들은 무너진 냉전 이데올로기 혹은 퇴락한 권력 등을 표상하듯이 흔들리거나 바닥에 떨어져 있지만, 바닥에 떨어져도 휘황한 빛은 변함이 없다.
마찬가지로, 열강들의 패권다툼의 영욕은 여전히 국토 분단이라는 현실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수천 수만 가닥의 실로 앞면과 똑같이 수놓아진 뒷면의 샹들리에는 수 천 시간에 걸쳐 그것을 수놓았을 북한 작업자들의
노동과 행위를 상기시키며 우리의 엄연한 정치적 현실을 실감케 한다. 헤아릴 수 없이 촘촘하고 세밀한
스티치들은 작가와 들리지 않는 무언의 대화를 나눈, 우리와 단절되어 있는 저들 존재의 흔적이고, 그 흔적을 통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그들을 바라본다. 〈당신이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라는 작품의 또다른 제목처럼.
함경아는
실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이자 예술가의 역할이라 말한다. 작가의 표현을 그대로
빌자면 그것은 ‘유령 발자국’을 따라가는 도정이다. 존재의 물리적 인덱스인 발자국은 유령이 결코 남길 수 없는 흔적이지만, 현실의
이면에서 우리는 다양한 유령들의 실재를 결국 마주하곤 한다. 보이지 않는 발자국을 따라 이면의 유령들을
찾아내는 함경아의 작업은 바로 그런 점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긍정과 공감을 이끌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