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구의
〈아니마투스〉에 서구인들이 더욱 열광하는 것은 이 작업이 희미해져 가는 그들의 환상에 단단한 실재성을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무릇 모든 열망은 현실의 보충이다. 매춘부로 전락한 키프로스의 여인들에
탄식하며 자신만의 순결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만들고자 했던 피그말리온처럼, 미국인들도 자본에 타락한 자신들의
어두운 현실을 보충하고자 디즈니의 그처럼 순수하고 발랄한 캐릭터에 열광했는지 모른다. 이형구는 피그말리온이
자신의 환상에 뼈와 살을 붙였던 것처럼, 디즈니의 편평한 만화적 몸에 인간의 두개골과 갈비뼈를 선물함으로써
그들을 살아 숨 쉬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벅스 버니는 이형구의 〈Lepus
Animatus〉(2006)를 통해 골격과 내부를 갖는 진짜 친구가 된다. 뼈를 통해 구피(〈Ridicularis〉(2008))의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없는 동작들은 모두 합리적이고 납득 가능한 행동이 된다. 특히 이미 너무 자라버린 관객들에게 이 환상은 다시 동일한 만화적 형식으로 반복되지 않고 고고학적 유물처럼
전시됨으로써, 마치 멸종한 공룡의 화석처럼, 부재에 대한
‘지표적indexical’ 확신을 준다. 이형구는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으로 만들고자 했던 디즈니의 꿈, 그 아름답지만 불가능한 피그말리온적 환상을 시연함으로써
조각가로서 자신의 위상을 증명하고 멸종해 가는 미국 대중문화에 고고학적 구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실재가 아니라 환상이다. 그런데 이 환상의 유별난 특징은 그러한 동물들이 동물 본연의 태도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인간처럼 존재한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한 마리의 쥐(미키 마우스)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된 쥐, 인간의 골격을 가진 쥐, ‘타자(동물)의 몸 안에서 솟아나는 주체(인간)의
흔적’에 열광한다는 것이다. 이 열광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그 반대를 생각해 보라. 즉 쥐가된 인간, 혹은 인간의 몸을 하고 있지만, 자신이 쥐라고 믿으며 쥐처럼 행동하는 인간 말이다. 프로이트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인간은 치료를 요하는 미친 사람에 불과하다. ‘아버지의 질서’에 안착하지 못한 채 여전히
불안정한 외상 이미지에 구속된 불행한 ‘쥐인간’처럼 말이다.4
어쩌면
〈아니마투스〉의 진정한 가치는 인간-쥐와 쥐-인간 사이의
차이와 연관 속에서 파악될 수 있을지 모른다. 즉 타자의 낯선 몸 안에 안착된 주체의 익숙하고 정상적인
모습을 보는 쾌와 주체의 익숙한 행동을 구현하는 타자의 기괴하고 비정상적인 몸을 보는 불쾌 사이에 〈아니마투스〉의 미학적 본질이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쁘고 귀여운 미키마우스 인형이 살아서 우리에게 말을 걸었으면 하는 소망과 그러한 소망이
정말 실현되었을 때 발생하는 당혹스럽고 소름 끼치는 느낌, 프로이트가 ‘언캐니uncanny’라고 불렀던 친숙하면서 동시에 낯선 중복의 경험과 연관된다.5
스위스의
한 자연사 박물관에서 마치 새로 발굴된 원시 동물의 화석처럼 전시된 이형구의 작업을 보고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는 관객들의 일화는 바로 이러한 낯선
중복의 경험을 예시한다. 〈아니마투스〉의 기발한 상상과 숙련된 조각적 마감이 주는 즐거움 이면에는 타자에
의해 드러나는 주체의 모순적 열망에 대한 은밀한 암호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피그말리온
신화는 두 가지 상이한 효과를 남긴다. 하나는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긍정적인 신념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과 무관한 가상의 존재에 탐닉하는 도착적이고 부정적인 믿음이다. 〈아니마투스〉는 우리에게
어떤 효과로 다가올까? 어떤 이들에게 〈아니마투스〉는 캐릭터들이 갖는 인간적 매력에 대한 확증으로서, 다른 이들에게 그것은 캐릭터들의 동물적 순수성을 오염시키는 인간성의 불순한 침투로 여겨질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여겨지든, 〈아니마투스〉가 전하는 주체와 타자의 아스라한
중복의 경험은 조각과 실재, 인간과 비인간, 결핍과 보충
사이에 자리 잡은 이형구 작업의 열망을 잘 요약한다. 사람이 되고 싶지만, 결코 사람이 될 수 없는 조각의 단단한 열망, 오직 ‘환상을 가로질러’
충족될 뿐인 피그말리온적 열망, 이형구의 〈아니마투스〉는 결코 원할 수 없는 것을 원함으로써 조각의
모순적 열망에 대한 낯선 지표를 남긴다.6
1 Jean-Jacques
Rousseau, Pygmalion, London: printed for J. Kearby, No. 2, Stafford-Street, Old
Bond-Street; Fielding and Walker, Paternoster-Row; and Richardson and Urquhart,
Royal Exchange, 1779, pp. 31-33
2 이러한 관점은 이형구의 초기작인 〈오브젝츄얼스(The Objectuals)〉의 보철들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보다
자세한 논의는 다음의 글을 참조 – 최종철, “조각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형구 조각의 포스트휴먼적 신화,” 『한국현대미술작가조명 Ⅳ- 이형구』, 부산시립미술관,
2022
3 Jacques
Lacan, “In You More than You,”
in 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 -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Book XI, ed. Jacques-Alain Miller, trans. Alan Sheridan, New York:
Norton, 1998, pp. 273-274 참조령사들이기
4 지그문트 프로이트, 「쥐인간」, 『프로이트 전집 11』, 김명희
역, 서울: 열린책들,
1996 참조
5 지그문트 프로이트, 「낯선
친숙함(Uncanny)」, 『프로이트 전집 14』, 김명희 역, 서울: 열린책들, 1996 참조
6 본 에세이는 2022년
이형구 개인전(2022. 03.29 – 08.07, 부산시립미술관)의 도록에 실린 글의 일부를 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