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구, 〈Felis Animatus & Leiothrix Lutea Animatus〉, 2009 ©부산시립미술관

오랜 세월동안 작업해 온 이형구의 작품들은 다양하다. 그의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100 여개가 넘는 작품의 사진과 목록들을 시간을 들여 살펴본다. 나는 매끈하고 완성도 높은 그의 작품들이 좋다. 비례에 맞추어 흐르는 곡선의 아름다움과 흐트러진 구석이 없는 마무리는 만족스럽다. 완전히 추상적인 실체가 아니고 시간에 깎여 만들어진 자연물의 모사인 탓일까?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없다. 그 만족이 단순히 스투디움(studium)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푼크툼(punctum)이 존재하리라 기대한다. 그 기대가 현실화될 때까지 시간을 기다린다. 내가 단순히 매끄러움으로 덮은 긍정성에 반한 것은 아니다. 더럽고, 힘들고, 못생긴 것들을 제거한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이 아니다.

작품의 매끄러운 표면을 반복해서 만져보고 냄새 맡는다. 작품엔 직관적인 아름다움에 멈추기 보다는 시간을 가지고 음미해 보기를 권하는 힘이 있다. 이 매끈함 아래는 무엇이 있을까?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어떤 냄새를 풍기고 있을까? 역사와 구조 너머에서 서서히 익어가는 기억을 머릿속에 그린다. 이형구의 작업의 갈래를 여러 방향에서 잡을 수 있지만 대표적인 작업은 해부학적인 공부에 근거한 ‘ANIMATUS’ 연작과 신체의 한 부분을 강조한 ‘Helemet’ 연작으로 나눌 수 있다. 작업 내용이나 진행에서 커다란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들을 내 마음대로 골라보면, 아래와 같다.

〈Helmet〉, 2000  〈ANIMATUS〉, 2005-2006  〈Eye Gear〉, 2010  〈Instrument 01〉, 2014  〈Kiamkoysek〉, 2018

작가가 작업을 한 연대기로 보면 ‘Helmet’이 ‘ANIMATUS’보다 앞서 있다. 하지만 만약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먼 훗날, 인류학자가 발굴한 그의 작품들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한다면 ‘ANIMATUS’가 ‘Helmet’보다 앞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해부학적인 공부에 바탕해서 만화 캐릭터의 뼈대를 재구성한 ‘ANIMATUS’의 작업 내용들이 신체를 과장한 ‘Helmet’의 작업을 정교하게 만들 수 있는 뿌리라고 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미래의 인류학자가, 이방인으로 섞여 사는 사회에서 신체적인 왜소함을 극복하고 싶었던 것이 ‘Helmet’ 연작을 하게 된 동기였다는 작가 노트를 찾았다면 사이보그적 상상이 앞서고 그 상상에 따른 공부의 여정에서 해부학을 만났다고 순서를 바로잡을 수도 있겠다. 위의 분류에 들지 않는, 물고기나 말의 움직임에 천착한 공부와 작업들도 여전히 해부학과 운동물리학의 원리들과 연관이 깊다. 생명과 생명체의 작동 방식과 외부를 감각하고 반응하는 것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다. 스스로가 의식을 하고 있든 아니든, 이형구의 작업 전체를 사이보그에 대한 탐구와 상상력이 결과라고 불러도 큰 잘못은 아닐 것 같다.

사이보그(Cyborg). 사이보그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60 년이다.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생물(Organism)의 합성어이다. 생물은 모두 항상성을 가지고 조절되고 있기 때문에 두 단어만 결합해서 새로운 뜻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맨프레드 클라인즈(Manfred Clynes)와 네이선 클라인(Nathan Kline)이 ‘사이보그와 우주’라는 논문에서 이 단어를 만든 까닭은 생명체의 연장으로 인공물을 부착하되 그 인공물이 생명체 전체의 조절 기능과 연결되어 하나의 유기체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단순한 단어의 뜻 이상으로 사이보그라는 말에는 인공물을 부착했다는 의미가 더해졌다. 이것은 어떤 수준이 되었건, 생명체 사이의 결합을 의미하는 잡종이나 혼종과는 다르다. 이 논문이 실린 잡지의 제목은 〈우주 항해학(Astronautics)〉이었다.

우주는 인간이 원래 살던 곳이 아니므로 아무런 보조 장치 없이 살아남을 수 없다. 우주에서 생존하는데 필요한 부가장치를 한 몸처럼 가지고 있는 생명체를 상상하면서 고안한 단어란 점은 명백하다. 하지만, 같은 상상은 훨씬 오래된 것이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 그는 미로를 탈출하기 위해 아버지가 만들어 준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필요에 의해서, 혹은 새로운 가능성을 이루기 위해 몸이 연장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들 중 하나이다. 얼마나 많은 이카루스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땅에서 발을 떼었던가? 엄밀하게 정의하면 사이보그는 몸에 부착된 외부의 물체가 일체가 되어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조절되는 하나의 유기적 조절체여야 한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 외부의 자원 끌어다 쓰고 그것이 종의 번영에 결정적이었던 인간에게 사이보그라는 상상은 존재의 본질에 가깝다.

소행성의 충돌이든, 아니면, 다른 원인에 의해서든 공룡이 사라지고 난 지구에서 인류의 먼 조상이 지금까지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서 했어야 했던 분투는 실로 눈물겨웠을 것이다. 인간은 날지도 못하고 수영도 겨우 한다. 달리는 속도도 같은 크기의 동물들 중에서 하위권이고 힘이 세거나 가시가 돋거나, 뭐 특별한 장기가 없다. 타고난 장기에 기대어 먹이 경쟁을 하긴 애당초 어려웠을 터. 그냥 넋 놓고 있었던 조상은 멸종했을 것이고, 손에 도구를 쥐고 사이보그적 상상을 실천한 조상들만 살아남았을 것이다. 인간은 모두 신체와 정신을 연장하여 무언가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의 자손이다.

그리고 도구에 의존해 성세를 누려온 인간의 미래는 생존을 위해서 조상들과 같은 상상을 해야만 할 것이다. 상상과 본질과 같은 근본적인 성찰을 떠나서, 실제로, 주변에 등장하는 사이보그들은 급진적인 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30년 전, 도나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밝혔던 혁명적인 지점들 중, 대부분이 지금도 유효하다. 흔히 볼 수 있는 사이보그들은 의료적인 이유, 요구 때문에 등장했다. 팔다리가 상한 사람들을 위해서 모양만 대체하는 의수, 의족에서 기능을 더하고, 모터를 신경에 연결해 생각으로 제어하는 진정한 의미의 사이보그가 등장하고 있다. TV 에서나 보던 ‘600만불의 사나이’를 주변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연히 눈이나 귀와 같은 감각기관뿐 아니라 몸 속 장기들까지 대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의료 분야에서 이러한 사이보그의 등장은 삶의 질과 수명 연장의 측면에서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체적 능력이나 외모 등을 강화시켜 타고난 물리적인 조건들의 차이를 무화시킬 수 있는 기술로 사이보그가 만들어진다면 이것은 진정한 혁명 국면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형구 작가가 서양인들 사이에서 느꼈던 왜소함이나 허약함을 렌즈, 혹은 광학적 굴절을 통한 과장으로, 예술적으로 표현했다면 기술은 그런 상상을 현실화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해러웨이가 이야기한대로, 생식과 성차까지 필요에 따라 없앨 수 있다면 기존의 사회구조가 유지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성정치의 측면에서만 발생하는 문제는 아니고, 사회의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진행될 혁명이다. 모두의 능력이 선택에 의해서 조절되고 결정될 수 있다면 ‘빼어남’에 근거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큰 변화가 필요하다.

남는 문제는, 이전의 질서가 무너진 다음에 어떤 질서가 새로이 들어설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어떤 미래의 상상처럼, 결국은 사이보그가 되는 것도 비용의 문제가 되어 이전의 질서를 강화하는 것에 불과하거나 힘만 세진 사이보그들 사이의 불화만 심해져 전쟁으로 황폐해지는 것은 막아야 할텐데. 기술적 예측과 상상이 그리는 어두운 미래를 뛰어 넘을 구원은 예술적 상상으로부터 오지 않을까?

올해 발표된 신작, 〈Kiamkoysek〉을 보면, 작가의 예술적 항로는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를 논리적으로 깊게 파고 드는 길을 택한 것 같지는 않다. 그가 물고기나 말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재현하고 체험해 보려는 시도를 했던 것은, 생명의 생리적, 물리적 구조에 대한 연구의 연장선에 있지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제한된 시야가 주는 경험의 제한을 직접 경험해 보려고 만들었던 도구들, 그리고 그 도구들을 직접 착용하고 벌였던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무엇을 경험했을까? 흑백밖에 볼 수 없는, 곤충의 눈이 보는 세상을 찍은 사진처럼, 그는 제한된 감각이 그리는 경험의 새로움을 몸소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감각의 제한이 생명체의 해부학적 구조와 생명체의 운동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몸의 좌우측만을 바라볼 수 있는 물고기의 눈의 위치가 물고기가 몸을 틀면서 헤엄치도록 만들었을 것이라는 설명을 하면서 직접 시연해 보인 그의 몸짓은 인상적이었다.

감각의 제한이 주는 새로운 경험. 이것은 ‘기암괴석’을 영어로 ‘Kiamkoysek’으로 음차해서 쓰고, 그것을 다시 음차해서 한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기암코이섹’이라고 읽도록 만든 전시의 제목에서부터 전시를 통해 관객들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는지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번역과 재번역을 통해서 생기는 차이들이 만들어내는 생소함, 그리고 새로운 느낌. ‘기괴한 돌들’, ‘경치가 좋은 산수’를 의미하는 ‘기암괴석’이라는 단어를 ‘기암코이섹’이라는 의미가 불분명한 단어로 이끌어간 전략과 방식. 그것이 전시의 재료와 뼈대를 이룬다.

인간의 골격을왼쪽 넙다리뼈(Left Femur), 왼쪽 무릎뼈(Left Patella), 왼쪽 정강이뼈(Left Tibia), 왼쪽 종아리뼈(Left Fibula), 오른쪽 빗장뼈(Right Clavicle), 오른쪽 어깨뼈(Right Scapula), 오른쪽 위팔뼈(Right Humerus), 왼쪽 위팔뼈(Left Humerus), 왼쪽 자뼈(Left Ulna), 왼쪽 노뼈(Left Radius), 오른쪽 볼기뼈 (Right Coxal), 오른쪽 넙다리뼈(Right Femur)로 분리해서 10 배로 확대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뻥튀기는 했지만 변형은 가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확대’만으로도 충분한 관람객의 감각에는 충분한 왜곡이 주어지고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만든다. 공룡의 무덤이면서 인간의 무덤인 전시장을 가로지르면서 확장된 전시물 앞에서 축소된 자신을 만나는 경험. 그것은 스스로의 내면을 걷는 여행이면서 끝없이 확장하는 우주를 만나는 여행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조각가라고 할 수 있는 이형구의 작업들을 뒤늦게 들여다보면서 나는 그의 작업이 가진 겉모습에 반했고 문제 제기에 가슴이 설렜다. 그가 시작했던 지점에서 던졌던 문제제기가 젊은 사내의 치기나 허풍을 넘어 구원에 대한 상상에 이르기를 기대했다. 차별하는 놈들에게 화를 내기는 쉽지만,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하는 것은 드물다. 이형구가 신체를 과장해서 왜소함을 극복하는 과정은 단순한 예술적 농담이 아니고 적극적이고 직설적인 반격이었다. 그의 작업들은 아름다웠고 말하고자 하는 것도 분명했다. 팩션(faction)의 이야기들을 쌓아가듯, 물리학이나 생물학에서 얻은 지식, 혹은 사실들을 놓고 사이에 틈이 있으면 상상으로 메워 만든 조형물들은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나는 그가 감각의 문제에 천착하면서 물고기의 눈이나 말의 움직임을 기구를 통해 재현하거나 단순한 확대나 축소를 통해서, 미학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최근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작업을 만난 관객들의 감각을 깨우고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작업들을 좋아한다. 다만, 나는 그가 ‘차이’를 발견하고 극복하고자 시작한 작업들을 구원에 대한 질문들까지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지점을 아쉽게 생각한다. 그가 여기서 비켜 가고 있는 길에서 감각과 우주에 대한 미학적인 시도들을 하고 있다. 그의 작업의 결과물들은 미적 성취를 통해서 호응을 얻고 평가를 받을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아직까지 그의 작업에 대한 글들이 같은 지점에서 맴돌고 있는 이유는 그가 현실의 구원을 점프하고 도달한 미학적 세계에 대한 작업도 여전히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한참 남은 그의 작업의 여정에서 ‘우회’의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다. 물론, 그래서도 안 된다. 결국, 구원은 아름다움으로부터 올 것이다. 하지만, 이 아름다움은 눈으로 보기에 즐겁고 매끈한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시간을 견딘,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썪는다. 기억은 치열함의 기록이고 치열함이 부족하면 흔적은 흐리고 기억은 흩어진다. 이형구의 작업이 더 깊게 익기를 기대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