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구, 〈X variation〉, 2021 ©두산아트센터

작품을 본다는 것은 한 사람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물론 작가가 지나가고 있는 그 시간은 나의 시간과는 다르기에 나는 그저 잠시 그가 통과하는 어느 지점을 목격할 뿐이다.

작품을 보는 것은 입체적인 행위인데 그것은 단순히 대상을 보는 눈의 물리적 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행위는 인간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만나는 것에 더 가까운데 종종 ‘눈’이라는 신체기관이 그 행위를 전담하고 있다고 믿곤 한다. 어쩌면 몸 전체가 눈이 되는 여정을 거쳐야 작품을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가만히 내가 작품을 보는 과정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전시 공간에서 만나는 작품 중 눈에 밟히는 무언가를 만나게 되면 한동안은 그것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정체가 조금이라도 드러날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작가의 의도와 행위, 움직임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그 안에서 숨어 있는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해 작가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작업실을 가보기도 한다. 작품 또한 대부분의 시간을 작업실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아마 작가와 작품은 작업실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전시 공간에서 드러나지 않은 조각의 퍼즐이 때로는 작업실에서 맞춰지기도 한다. 나는 작품에 대한 실마리는 결국 작가와 작업과정이 생생히 담겨있는 작업실에 있다고 믿는 편이다.

작가 이형구의 작업실을 처음 방문한 것은 아마 10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그의 몸에 대한 관심과 탐구는 신체의 일부를 만화처럼 왜곡해서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착용 가능한 기구를(‘The Objectuals’ 시리즈) 만들거나 그것에서 더 나아가 만화 캐릭터에 변형된 인체의 골격을 정교하게 결합시켜 마치 과거 언젠가 존재했었던 생명체의 뼈대로 착각하게 만들기도 했고(‘Animatus’ 시리즈), 혹은 다른 동물의 감각기관을 통해 실험하기도 했다(‘Eye Trace’, ‘Measure’시리즈). 내가 그의 작업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한 시점은 2014년 전시 《Measure》의 작품들이 나올 무렵이었는데, 작업실에서 본 작가는 여전히 집요하게 자신의 관심에 대한 실험을 지속하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자신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었고, 당시에도 일종의 훈련과도 같은 외부에서의 걷기와 작업실 내부에서의 만들기 사이에서 균형과 불균형,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의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2020년 현재, 작가의 일상은 변함없이 그 실험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새벽부터 이른 저녁까지 쉴 틈 없이 분주한 몸의 움직임은 공간을 점유하는 작업의 일부가 되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최근에는 2019년 작품 〈X〉, 〈Psyche Up Panorama〉의 연장선상에 있는 새로운 작업이 진행 중에 있는데, 나는 작가와의 인터뷰를 위해 지난 몇 달에 걸쳐 수차례 작업실을 방문하면서 그 과정의 일부를 지켜볼 수 있었다. 매번 조금씩 변화하는 작업의 모습을 보면서 작가의 말은 서서히 작품 안으로 사라지고 어느새 내 목소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작가에게 향했던 질문은 나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점점 바뀌어 갔다. 처음에 의도했던 작가와의 대화록은 어느새 작가와 작품에 대한 나의 목격담으로 바뀌어 갔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본인 성향과 경험 그리고 작업의 의도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재료를 찾아 나간다. 그리고 재료가 익숙해지면서 작가의 생각은 손에 의해 실현될 가능성을 조금씩 확보하게 된다. 이형구도 레진, 플라스틱, 페이퍼마쉐, 브론즈, 납 등과 같은 재료나 필요에 따라 사진과 영상, 퍼포먼스를 통해 그의 탐구 과정을 시각화해왔다. 현재 그의 손에 있는 재료는 과거로부터 다시 등장한 것도 있지만 변형되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재조합되고 누락되기도 한다. 그리고 작업의 과정 중에 맞닥뜨리는 막힘이나 정체는 그가 과거 사용했던 재료의 재등장이나 다른 방식의 조합, 혹은 새로운 재료의 실험을 우연처럼 대면하게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 1999년 작품 〈A Device (Gauntlet 1) that Makes My Hand Bigger〉에서 투명한 페트병과 유리잔을 결합시켜서 장갑처럼 생긴 장치를 만들었는데, 지금 그의 진행 중인 작업에서 여러 다른 재료들과 더불어 한동안 보지 못했던 페트병이 다른 형태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이런 경우는 과거 재료에 대한 감각과 기억이 잠재되어 있다가 필요한 어느 순간에 발현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진행 중인 작업에서 과거의 작품들이 파편처럼 소환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재료의 실험은 전시와 때로는 무관하게 진행되기도 해서 그로부터 살아남은 결과물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작품의 일부가 되어 남기도 한다. 지금 해결되지 않는 부분은 묵혀두었다가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시점이 왔을 때 다시 소환하여 해결하곤 한다는 작가의 말은 내가 작품을 보는 태도와 닮아 있어 보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이 생기는 작품은 만나게 되면 길게는 몇 년을 두고 작가의 작업을 보기도 한다.

이형구는 작업에 있어 지루함을 잘 참지 못하고 늘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그 새로움을 구현하는 데 있어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지난한 과정은 기꺼이 감수하면서 집요하게 본인만이 볼 수 있는 그 이미지가 이끄는 대로 주저 없이 나아간다. 그는 매번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때마다 일종의 좌표를 설정하고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실현시키고자 부지런히 만들기를 멈추지 않는다. 설정하는 좌표는 때로는 매우 구체적인 형태에서 시작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화살표와 같은 방향성이나 속도감의 기호가 될 수도 있다. 그가 상상하는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선택하는 재료나 기법, 형태적 구성에 대한 판단은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구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강력한 동력으로 작동하여 치밀하고 집요하게 매달린다. 오늘 해결하지 못한 난제가 내일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나는 그렇게 보낸 하루하루가 쌓여서 언젠가는 그의 의도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믿는다.

이형구는 작업의 시작부터 그것이 놓일 공간을 생각하고 움직인다. 그것은 독립적인 개체로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놓일 공간 안에서 작가의 큰 그림 안의 부분이기도 하다. ‘The Objectuals’ 시리즈에서도 개별의 기구들은 실재하지만 전시 공간 안에서는 기구를 장착한 인물의 스틸이미지와 실험실의 도구처럼 보이는 기구들과 함께 전시되기도 했다. ‘Animatus’ 시리즈의 경우에도 각각의 캐릭터는 마치 퍼펫극에 등장하는 인형들처럼 작가가 그려 놓은 동선에 맞춰 전시되었다. 전시 《Measure》의 경우도 마장마술을 하는 말처럼 자신의 몸을 통해 재연하면서 말의 뒷다리 골격처럼 생긴 기구 〈Instrument 01〉(2014)와 드로잉들, 조각, 그리고 그의 움직임의 흔적을 담은 〈Ritual〉(2014)은 같이 전시하고, 〈Instrument 01〉를 장착하고 움직이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 〈Measure〉(2014)는 같은 연작에서 나온 작품이지만 상황과 공간에 따라 분리하여 다른 공간에서 보이기도 했다.

한 시리즈가 전시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나오는 드로잉, 조각, 퍼포먼스와 그것을 담은 영상은 자연스럽게 모두 선보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그리는 공간에 따라 그 중 일부만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해당 전시에서 누락된 작업은 사라지는 것이 아닌 보류된 상태로 다음 등장 시기를 기다린다. 작가 작업의 한 시리즈가 만들어지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을 옆에서 보다 보면 작업의 생애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해 보게 된다. 태어나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며 학교를 마치고 직장을 들어가거나 자기 사업을 하면서 장년기와 노년기를 맞이하는 인간의 삶처럼, 작업도 작가의 삶 안에서 비슷한 주기를 거친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의문으로 시작된 질문은 이런저런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살아남아 작품이라는 결과물을 만들고, 전시를 하면서 존재를 알린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한 시리즈가 나왔다 사라지기도 하고, 작가에게 여전히 흥미로운 질문이 남아 있다면 거기서 끝나지 않고 다음으로 연결되어 계속 나아갈 힘을 얻는다. 신체와 그 감각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는 이형구의 작업 세계 안에서 구상과 추상의 형태적 경계를 넘나들며 구현되고 있고 더 이상 두 영역을 구분해서 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제까지 그의 전시들은 공간 안에서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동선 안에서 작품을 보도록 만들었고 다른 선택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X〉(2019)와 〈Psyche up panorama〉(2019)의 연장선상에 있는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은 마치 진공 상태인 공간 안에 물감을 뿌려 놓은 듯 확장된 풍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섬세하게 조율하면서 공간을 점유하고 그의 의도가 담긴 동선을 유도하면서도 관객에게 예전보다 더 열린 경험을 제시하며 온전히 나만의 풍경으로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몸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공간 자체가 몸이 되어 내외부를 공기처럼 드나드는 상상을 해볼 수 있게 되었다.

이형구와 대화를 나누면서 어쩌면 작가는 이미 시작부터 본인이 보고 싶었던 이미지를 머리속에 가지고 출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신이 구현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만들어 감에 있어서 적확한 시각언어를 찾아 나가는 과정은 내가 그의 작업을 보면서 언어로 포획하고자 하는 고통스러운 시도의 과정과 맞물린다. 그가 구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나는 볼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작품들과 그간 나눈 대화들로 작가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추측하고 그것을 토대로 나만의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다. 어느 순간 어떻게 겹쳐지거나 어긋날지 예측할 수 없는 그 불확실함이 동력이 되어 나의 목격담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