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인환은
지난 2014년 여름, 플라토 갤러리에서의 전시를 위해 〈경비원과
나〉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이 작업은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규범 사이의 긴장관계를 드러내고,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질서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익명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일시적으로나마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지속적인 시도를 잘 드러내 주었다.
‘미술관의
경비원’이란 사실 늘 그곳에 있지만, 눈에 띄지 않는,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만 굳이 보려고 하지 않는 존재이다. 대부분
미술관의 관람객들은 전시된 작품만을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비원의 임무는 작품을 보는 관람객을 보는
일이다. 경비원에 의해 ‘보는 주체’인 관람객은 ‘보여지는 객체,’ 더
구체적으로는 ‘감시자’에게
‘감시당하는 자’가 된다.
대체로
관람객으로서 미술관에 들어서는 작가 오인환은 경비원을, 굳이 푸코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회가 개인을 감시하는 권력구조의 한 축으로 받아들였다. 플라토의
경우에는 특히, 단정한 양복을 갖춰 입고 귀에 리시버를 꽂은 채 대단히 정중하지만 단호하고도 절도있는
태도로 무장한 젊은 남자들이 ‘경비원’으로 상주한다. 그들의 ‘감시’ 하에서
관람객들은 미술관이 암묵적으로 부여하는 질서에 순응하게 된다.
그러나
작품을 전시하는 작가 본연의 입장에서 오인환이 같은 미술관에 들어설 때, 그 권력의 위계질서는 완전히
뒤집힌다. 미술관은 세 부류의 ‘노동’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미술가의 노동은 ‘창조’라는 고귀한 수준으로 격상되고, 큐레이터의 노동은 ‘학술’에
해당되는 전문 영역인데 반해, 경비원과 미화원 등의 노동은 부가가치가 전혀 없는 단순한 육체노동으로
여겨진다. 즉, 미술가로서의 오인환은 다만 미술관뿐 아니라
현대 사회 전체에 확연하게 존재하는 노동의 계급적 사다리에서 그 정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
오인환이 드러내고자 했던 것, 나아가 변화를 주고자 했던 체계는 이처럼 관람객이며 동시에
미술가인 그 자신과 경비원이 각자 맡고 있는 역할 사이의 복합적인 위계질서와 문화적 의미의 층이다. 그는
작업 기간 중에 플라토의 경비원과 함께할 수 있는 무언가를 구상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 대단히 일상적이고도
소박한 ‘만남’을 제시한다.
따라서
그 미술사적 맥락을 짚으라면 우선 1960년대 이후 네오-아방가르드의
제도비판이 될 것이다. 대표적인 선례로는 미술관 청소를 작업으로 내세웠던 퍼포먼스 아티스트(작가는 이를 ‘유지관리아트
Maintenance Art’라고 명명했다),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Mierle Laderman Ukeles, 1939년생)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독자적인 퍼포먼스를 펼쳤던 유켈리스에 비해 오인환은 실제 경비원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가 필수적인 만남과 관계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좀 더 현대적인 ‘관계성의 미학’ 혹은 ‘참여의 미술’과
연결된다.
관계, 참여, 소통이 현대 미술의 가장 대표적인 키워드이자 지배적인 작업
방식이 된 것도 이미 한참 전의 일이다. 지금은 심지어 진부하게 들리기도 하는 이 단어들이 오인환의
작업에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들이 거대한 사회적 담론을 거론하지 않으며, 또한
추상적인 구호나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경비원과
미술가가 미술관에서 만나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이든 하기 위해서 이 둘은 서로를 알고 조금이라도
친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오인환은 플라토의 경비원들에게 작업의 취지를 알리고 마침내 한 명의
지원자를 얻었다. 그들은 10번 만나기로 정하고, 매번의 만남이 끝난 후에는 다음에도 또 만날지 말지를 경비원에게 물었다. 첫
만남에서는 누구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친분을 쌓기 위해 하는 일상적 의례처럼 함께 차를 마셨다. 두
번째 만나서는 좀 더 편안하게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세 번째에 작가는 경비원을 자신의 스튜디오로 초대해서
그 간의 작업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열 번의 만남이 끝나면, 작가는 그와 미술관에서 함께 춤을 추기로 했다. 미술가와 경비원이 만남을 더해가며 서로를 이해하는 친밀한 사이가 되어 미술관에서 함께 춤을 추게 되었다면 아마도
한국 현대 미술사에 길이 남을 전설처럼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참여와 소통과
관계가 그 실제적인 내용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미학’을
등에 업고 감동과 찬탄의 대상이 된 현대 미술의 상황에서는 그토록 이상적인 결말이 오히려 상투적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인환의 작업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경비원은 세 번의 만남 이후, 더 이상의 만남을 거절했고, 프로젝트는 거기서 멈췄고, 오인환은 두 달 동안 개인 레슨을 받으며 속성으로나마 열심히 익힌 왈츠를 미술관에서 혼자 추었다. 경비원이 없을 때 그를 대신하는 폐쇄회로카메라 앞에서 말이다. 그렇게
오인환은 미술가로서 미술관에서 ‘감시당하는 자’가 되었지만, 동시에 감시의 수단이 미술의 도구로 변화했고, 그 과정에서 ‘감시’와 ‘감상’ 사이의 경계는 허물어졌다.
그러나
이 작업의 성과는 오히려 실패와 미완으로 남은 과정에 있다. 〈경비원과 나〉는 물론, 기존의 작업들 –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 곳〉, 〈우정의 물건〉, 〈유실물 보관소〉, 〈만남의 시간〉 등에서는 정체성의 문제, 즉 나와 타인과의 ‘차이’에서 오는 긴장, 사회적
규범이 개인에게 부여하는 갈등에 대한 질문들이 결코 ‘동성애’라는
작가의 어떤 한 면모에 집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과연 작업이 중단된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수많은 층위의 가정과 추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루어지지
않은 경비원과의 일곱 번의 만남을 기록하고자 했던 일곱 개의 부스는 텅 빈 채 전시되었다. 누구든지
자신이 속한 사회적인 위치와 직업적인 규범의 틀을 벗어나는 상황에 ‘참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관계’라는
것은 아무리 상대가 선한 의도와 정당한 대의를 갖고 있을지라도 단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완벽한 ‘소통’이라는 것은 몇 달이면 몸으로 익힐 수 있는 왈츠의 스텝 정도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인환의 텅 빈 공간은 이렇게 미술의 사회 비판적 역량에 대한 무거운 질문들을
던진다. 《올해의 작가상》 전시를 통해 비어있는 일곱 개의 부스가 어떻게든 채워지기를 기대해본다. 아니, 그 후로도 여전히 비어있더라도 작가는 그 안에 더 많은 문제와
생각들을 더해 놓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