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에서 조각은 오랫동안 대중적 인기를 끌지 못한 예술 장르였다. 하지만 다양한 조각 전시가 두드러졌던 2022년 한국 현대 미술계는 달랐다. 서울시립미술관 “조각충동”전, 하이트 컬렉션의 “각”전, 웨스의 “조각의 여정: 오늘이 있기까지”전, 일민미술관의 “나를 닮은 사람”전과 더불어 여러 갤러리와 미술 기관에서 조각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업을 새롭게 조명하는 전시가 펼쳐졌다.
그렇다면 회화는 어떨까? 조각과는 달리 회화는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전통적인 장르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회화에 대한 위상은 그만큼 자주 흔들린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동시대 미술은 영상 매체뿐만 아니라 AI를 활용한 작업까지 이어지고 장르 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회화는 이런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가장 대중적인 예술 장르로서의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장 치열한 실험들이 이뤄지는 장르이기도 하다.
성북동에 위치한 BB&M 갤러리는 국내를 기반으로 회화에 대한 실험을 펼치며 각자만의 시각 언어를 발전시킨 젊은 회화 작가 5명의 작업을 조명하고자 지난 2월 4일 “썬룸(SUNROOM)”전을 개최했다.
“썬룸”전에서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사이에 출생한 박정혜, 성시경, 오지은, 정윤영, 최수진 작가를 소개한다. 이번에 소개되는 5명은 모두 한국에서 태어나 현재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들로 한국 미술계를 바탕으로 현대 회화를 이해하고 이를 기준으로 각자만의 시각 언어를 발전시켜 왔다. BB&M은 촉망받는 젊은 작가들의 예술적 실험을 지지하고 이들의 잠재성을 모색하고자 이번 전시를 기획하였다.
추상 회화를 하는 박정혜 작가는 2017년부터 진행해 온 ‘빛’의 흔적과 물질성에 대한 탐구를 이어간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의 빛과 색상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자연광에서 다양한 인쇄물에서 방출되는 빛, 심지어 디지털 화면에 나타나는 빛에 이르기까지 수만 가지의 색상을 접한다. 하지만 박정혜 작가는 그가 경험했던 빛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눈으로 그리고 상상으로 채집한 빛의 형상을 모아 새로운 구성으로 빛을 표현한다.
빛에 대한 작가의 탐구는 종잇조각이나 리본과 같은 오브제로 강조된다. 작가는 선과 면과 같은 가벼운 사물에서 발견한 시각적 흔적을 모아 초현실적이고 기하학적이며 추상적인 평면으로 조합한다. 아무것도 없는 캔버스에 무언가를 그리면 공간감이 형성되듯, 작가는 캔버스를 두께가 존재하지 않은 무한히 확장되는 평면 세계로 상상한다.
박정혜(b. 1989) 작가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수학하였다. 그는 휘슬(서울, 2021), 온그라운드2(서울, 2017), 아카이브봄(서울, 2016)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서울시립미술관(서울, 2022), 두산갤러리(서울, 2021), 덕수궁(서울, 2020), 국립현대미술관(과천, 2017), 국제갤러리(서울, 2017), 하이트 컬렉션(서울, 2016), 부산비엔날레(부산, 2012) 등에서 개최된 단체전에 참여했다.
추상회화를 하는 성시경 작가는 반복적인 붓질이라는 규칙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조형성을 탐구한다. 작가는 이 작업을 빙판을 고르게 깎는 기계인 잠보니와 접목해 ‘잠보니 연작’으로 전개해 왔다. 잠보니가 빙면을 지나가면서 어떠한 흔적을 남기듯, 캔버스를 스쳐 지나가는 성시경 작가의 생각, 감각, 그리고 붓놀림이 작가만의 조형적 흔적으로 캔버스 화면에 남는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유리창이 가득한 썬룸에서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패턴을 표현한 작품을 선보인다. 작가에게 캔버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화면적 틀이자 형태이다. 이 때문에 이러한 패턴들은 캔버스라는 화면과 종속적 상호 관계를 이루며 조형성을 찾아 나간다. 성시경 작가는 회화라는 조건 속에서 규칙을 세워 일정한 패턴을 찾아 나간다. 이러한 조건 내에서 작가는 직관적으로 행하는 즉흥적 드로잉을 통해 추상적 회화를 펼친다.
성시경(b. 1991) 작가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였으며, 서울과학기술대학에서 조형예술과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는 쉬프트와 공간 형(서울, 2019)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P21와 휘슬(서울, 2022)에서 2인전을 가졌고 원엔제이 갤러리(서울, 2020)와 아트스페이스 3(서울, 2019) 등에서 단체전을 열었다.
오지은 작가는 자신이 일상에서 경험한 장면을 정물화처럼 세밀하게 그린다. 그러나 그가 그림으로 담아낸 장면은 실제 경험과 기억 사이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어떤 것을 직접 경험했다 하더라도 기억으로 남은 장면은 일부가 삭제되거나 새로운 정보와 합쳐져 왜곡된다. 따라서 오지은 작가는 구체적인 장면을 정확하게 묘사하기보다 작가가 당시 경험한 분위기와 정서를 색채와 사물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작가는 전통적인 정물화의 문법을 탈피하여 원근법이 사라진 대담한 구도로 회화 작업을 한다. 그의 작업은 특정 기억의 기록인 동시에 그 장면에 수반되는 감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기억 속 장면이 끊임없이 변화하듯 작가는 회화를 통해 이미지의 유동성을 포착하고자 한다.
오지은(b. 1990) 작가는 국민대학교에서 회화 전공으로 석사를 마쳤다. 그는 드로잉룸(서울, 2022), 갤러리 그리다(서울, 2020), 예술 공간 서:로(서울, 2020)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을지예술센터(서울, 2022), 아트사이드 갤러리(서울, 2021), 아트스페이스3(서울, 2021) 등 다수의 단체 전시에 참여했다.
불교미술과 서양회화를 수학한 정윤영 작가는 동서양의 회화적 기법과 재료를 사용하여 작가만의 방식으로 추상적 회화를 펼쳐나간다. 작가는 캔버스 틀에 실크를 덧대어 물감을 스며들게 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유기적 형태들을 그려 넣는다. 그러한 정윤영 작가의 그림 속에는 다양한 식물이 그려져 있으며, 그 안에는 신체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다.
생사를 오가는 경험을 했던 정윤영 작가는 소멸과 회복을 반복하는 생명성을 이국적인 식물의 이미지로 승화시킨다. 이를 통해 그는 삶 앞에 놓인 불안, 절망, 삶과 죽음을 향한 내면적 갈등을 표현한다. 작품 속 이미지들은 뭉개진 색과 자유로운 붓터치로 다소 모호하고 미완성된 상태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장면은 오히려 생동감 넘친다. 미완성된 듯한 형태들은 생명의 흔적이며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정윤영(b. 1987)은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미술을 전공하고, 국민대학교에서 회화전공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작가는 영은미술관(경기도 광주, 2021), 갤러리도올(서울, 2021), 박수근미술관(양구, 2021)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이외에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서울, 2016), 불일미술관(서울, 2016) 등에서 단체전에 참가한 바 있다.
최수진 작가는 여행이나 산책을 통해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현실, 기억 그리고 환영을 오가는 동화적 풍경을 그린다. 하지만 그의 작업의 진정한 주인공은 작품이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 아닌 빛의 존재이다. 햇살이 내리비치는 화면 속 공간은 식별 가능하지만 사물들의 형태는 다소 추상적이며 마치 점점 배경 속으로 흡수되어 가는 듯하다.
최수진 작가는 겪어 본 경험이나 상상한 장면을 표현함으로써 색채의 실험을 이어 나간다. 따라서 그의 회화 속 사물들은 다른 대상들과 명확한 구분을 지을 수 있는 점, 선, 면이 아니라 색의 덩어리로 이뤄져 있다. 작가는 어떠한 감각, 기억, 체험, 환상들을 색채의 덩어리와 혼합해 원하는 장면을 만든다.
최수진(b. 1986)은 중앙대학교에서 서양화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작가는 Artmia Space(하이난, 2022), AIT(서울, 2021), 합정지구(서울, 2017)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대구미술관(대구, 2021), 블루스퀘어네모(서울, 2020), 국립현대미술관(청주, 2020) 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BB&M은 2022년 “콜드피치(COLD PITCH)”전을 통해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국내 젊은 작가 4명을 소개한 바 있다. “콜드 피치”에는 회화 작업을 하는 우정수 작가, 영상, 설치, 조각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는 유신애 작가, 디지털 화면을 탐구하는 윤향로 작가, 조각을 하는 최고은 작가가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