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민규의 작업은 현실에서
쉽게 해결되지 않는 불안과 위기를, 어린 시절 익숙했던 애니메이션과
SF의 세계관을 빌려 다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한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어린
시절 동경했던 로봇과 영웅의 이미지가 현실의 재난 앞에서는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는 ‘플라스틱 덩어리’처럼 느껴졌던 경험은 작업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2015 odyssey〉(2015)에서 그는 프라모델을 실제로 녹인
뒤 영상 속에서 다시 부활시키며 현실과 가상의 간극을 드러냈고, 〈나는 너를 지킨다〉(2015)와 〈나를 지켜줘〉(2017)에서는 세계를 구할 영웅을 기다리는
익숙한 서사를 가져오면서도 끝내 그 영웅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개인전 《これは愛ですか。 이것은 사랑인가요?》(out_sight, 서울, 2018)에서 영웅은 목소리로만 남고, 재난은 계속되며, 세계를 구원할 것처럼 보였던 존재의 자리에 작고
가벼운 플라스틱 덩어리가 남는다. 황민규에게 영웅은 구원의 상징이라기보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구원에
대한 인간의 기대와 의존을 드러내는 장치에 가깝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점차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세계에서 개인은 어떻게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야생 속으로〉(2020)는 영웅의 부재를 인정한
뒤 스스로 삶을 개척하려는 개인을 내세우지만, 팬데믹이 가져온 통제와 고립 속에서 그 의지마저 흔들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같은 해 제작한 〈터전의 끝〉(2020)은
정부 지원 전세자금의 서류 문제로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인 친구의 실제 사건과 힙합 오디션이라는 대중문화적 설정을 결합한다.
개인전 《기적을 노래하다》(더레퍼런스, 서울, 2020)에서 드러나듯, 이
시기의 황민규는 주거 불안, 경제적 격차, 사회 시스템의
모순처럼 개인이 쉽게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을 세기말 애니메이션의 정서와 겹쳐 놓는다. 거대한 위기가
멀리 있는 재난이 아니라 주거, 생계, 노동과 같은 일상적인
조건 속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작업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는다.
팬데믹 이후에는 과거 SF와 디스토피아가 예견했던 장면들이 실제 현실과 겹쳐지면서 작업의 세계관도 달라진다. 〈정월〉(2023)은 코로나19로
고향 부산에 머물게 된 작가가 어머니와 배우자의 일상을 기록하면서, 해운대의 고층 아파트와 텅 빈 도시
풍경, 해수면 상승, 후쿠시마 오염수 등 환경적 위기를 교차시킨다. 《Out of the Blue》(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3)에서 황민규는 이전까지
강하게 드러났던 1990년대 일본 서브컬처의 색채를 조금 걷어내고
SF 문학과 인문학, 환경 문제로 레퍼런스를 확장한다.
그러나
핵심적인 질문은 이어진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인간은 무엇에 의지할 수 있으며,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위기 속에서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가. 〈나를
지켜줘〉, 〈야생 속으로〉, 〈정월〉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은
〈After Blue〉(2023)는 영웅을 찾고, 영웅의 부재를 확인하고, 다시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시간을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바라본다.
최근에는 이러한 질문이
사회적 재난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가족과 사랑, 질병, 삶과
죽음이라는 보다 가까운 관계의 문제로 이동하고 있다. 특히 황민규는 작업 속 인물을 단순한 서사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자신과 삶을 공유하는 구체적인 존재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PULSE〉(2025)는 병환을 겪는 어머니를 기록하며 삶과 죽음, 슬픔과 사랑을
다룬다.
이전 작업에서 어머니와 배우자가 불확실한 세계를 살아가는 개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었다면, 최근에는 이들과 맺는 관계 자체가 작업의 중심적인 내용이 된다.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한 순간을 담는 역사물”로
설명했듯, 황민규의 디스토피아는 점차 세상의 멸망을 상상하는 데서 벗어나 불안정한 세계에서도 결국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기억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방향으로 깊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