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로의 작업은 회화, 드로잉, 판화, 애니메이션,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며, 특히 면과 선을 활용한 자유로운 조형 구성에서 뚜렷한 특징을 드러낸다. 작가가 ‘서피스(Surface)’라고 분류하는 평면 작업에는 직사각형의 색면과 불규칙한 곡선, 유기적인 형태가 겹치거나 교차하는 구성이 자주 등장한다.
선명한 색채와 과감한 붓질, 화면 곳곳에 남겨진 미세한 흔적은 정지된 이미지에 운동감과 리듬을 부여한다. 이러한 형태들은 작품마다 조금씩 변형되고 결합하면서 서로 연관된 시각적 어휘를 형성한다. 초기에는 제목 없이 제작하던 이미지에 점차 문장 형태의 제목을 붙이기 시작하면서, 추상적인 형상에 인물의 심리와 상황을 암시하는 서사적 성격도 더해졌다.
제작 과정에서는 실크스크린, 오프셋 인쇄, 전사, 디지털 드로잉과 애니메이션을 결합하며 이미지의 반복과 변형을 실험한다. 크리스 로는 손으로 그린 형상에 움직임을 부여하고, 애니메이션의 특정 프레임을 추출하거나 오래된 복사기를 이용해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이때 발생하는 잉크의 번짐, 색상의 어긋남, 인쇄의 불균일함 등은 작가가 중요하게 여기는 조형적 요소다.
개인전 《우리같은 도둑》의 도록에 수록된 ‘프로세스 다이어그램’에서는 마크메이킹, 애니메이션, 인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아날로그와 디지털 기술을 오가는 제작 방식은 같은 형상에서도 예측하기 어려운 차이를 만들어내며, 우연과 직관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넓힌다.
그의 평면 작업은 설치와 공간 디자인을 거치며 입체적인 구성으로 확장된다. 크리스 로는 벽과 바닥, 조명, 구조물의 위치를 조절하고 관람객의 동선을 고려하면서 전시 공간 전체에 리듬을 만들어낸다. 2023년 쉬와 새공간에서 진행한 개인전에서는 어두운 공간에 노란 조명과 모니터를 배치하거나, 각목으로 만든 구조물 사이에 평면 작업을 설치하여 색채와 선의 긴장감을 강조했다.
같은 전시의 온라인 공간에서는 스크롤과 마우스 움직임에 반응하는 유동적인 이미지로 화면의 리듬을 구성했다. 이어 《고요한 웃음》(2023)에서는 벽에 설치한 평면 작품과 중앙의 흰색 평상, 복잡하게 연결된 유선전화 등을 함께 배치하여 이미지와 사물, 관람객의 움직임이 서로 관계하도록 했다.
2024년 더 윌로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는 반투명한 소재와 실크스크린의 특성을 활용해 겹침과 투과의 효과를 더욱 적극적으로 탐구했다. 캔버스와 종이 외에도 폴리카보네이트, 폴리에틸렌 등의 소재에 색면과 선을 표현하면서, 이미지가 놓이는 지지체 자체를 조형 구성에 참여시켰다. 투명하거나 반투명한 표면들은 작품 뒤편의 공간과 다른 이미지들을 드러내며 시선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
평면에서 출발한 이미지가 물질적인 두께와 공간적 관계를 획득하면서, 작품의 형식은 주변 환경과 관람자의 지각까지 포함하도록 확장된다. 이러한 변화는 인쇄와 그래픽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회화와 설치의 표현 방식을 유연하게 결합해 온 크리스 로의 작업 태도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