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의 편대식은 한지를
여러 겹 배접한 뒤 도형의 설계선을 눌러 각인하고, 선을 제외한 표면을 연필로 반복해서 칠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ILLUSION》(2014)과 《ENGRAVE》(2015)에서
선보인 회화들은 기하학적 도면, 흑백의 대비, 흑연의 반사광을
이용해 평면과 입체 사이의 착시를 만들어냈다. 수학적으로 계산된 구조와 손으로 수행한 채색이 결합되면서
화면에는 정확성과 오차가 동시에 남는다. 멀리서는 견고한 구조로 보이던 선이 가까이에서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검게 채워진 면에도 종이의 흰 결이 드러나는 방식은 기계적으로 완벽한 이미지와 신체가 남긴 흔적 사이의 차이를
보여준다.
작업이 대형화되면서
화면은 독립된 회화 작품에서 관람자의 이동을 둘러싸는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Untitled (moments)〉와 단체전 《퇴적된 유령들》(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청주, 2019)에 설치된 〈순간〉은 긴 롤지를 벽면을 따라 펼쳐, 반복된 선과 흑연의 층을 하나의 환경처럼 경험하게 한다. 작품을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운 크기는 관람자가 화면을 따라 걸으며 서로 다른 순간과 표면을 순차적으로 보게 한다. 이때
회화의 내용은 특정한 대상이나 서사가 아니라, 축적된 시간의 길이와 그 시간을 확인하는 관람자의 움직임에서
형성된다.
《ENCOUNTER》(홍티아트센터, 부산, 2020)를 기점으로 바탕재는 한지에서 나무 패널과 전시장 벽면으로 확대된다.
매끄럽게 갈아낸 나무 표면에 연필을 반복해 칠하면 흑연은 금속이나 거울과 비슷한 광택을 만든다. 관람자는
표면에 축적된 과거의 흔적을 보는 동시에, 그 위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과 주변 공간을 함께 마주하게
된다. 《등가》(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1)에서는 이러한 방식이 전시장 건축 자체로 이어졌다.
작가는 14일 동안 벽면을 갈고 연필로 칠했으며, 바닥에 떨어진 분진과 작업자의 동선, 관람객의 발자국, 출입문을 통해 변하는 빛까지 전시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회화는 더
이상 고정된 표면에 머물지 않고, 과거의 작업과 현재의 사건이 계속 겹쳐지는 현장으로 작동한다.
최근 《Proxy Data》(아트 프로젝트 씨오, 서울, 2025)에서는 연필 중심의 흑백 화면에 색과 자연 관찰이
더해졌다. 제주 예술곶산양 레지던시에서 해안과 숲의 색을 기록한 작가는, 이를 아크릴 물감으로 전환해 나무 패널에 여러 겹 쌓고 다시 갈아냈다. 그
결과 〈Proxy Data〉(2025)의 화면에는 색이 생성되고
사라진 과정이 지층의 단면처럼 남는다. 함께 소개된 ‘The
Record’ 연작은 퍼티와 페인트로 정리한 표면 위에 흑연의 흔적을 촘촘히 중첩해, 연필의
반복으로 시간을 직접 기록한다. 두 연작은 각각 색의 층과 행위의 밀도를 통해 시간을 보여주며, 작가가 오랫동안 다루어온 시간의 물질화를 흑백과 색, 기록과 관찰이라는
서로 다른 회화 언어로 확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