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민의 작업은 회화를
통해 시간과 공간, 시선과 감각처럼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조건을 다시 묻는 데서 출발한다. 작가는 어떤 대상이 본래의 모습과 다르게 보이거나, 과거의 경험과
어긋나거나, 정확한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순간에 주목한다. 그는
이런 상태를 단순한 착각이나 감정의 흔들림으로 넘기지 않고,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물, 도시의 장면, SF 소설, 다큐멘터리, 산책 중의 풍경, 동료와의 대화에서 유사한 감각의 단서들을 수집한다. 박석민에게 회화는 이미 주어진 대상을 재현하는 평면이 아니라, 언어로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감각과 오독, 정서적 동요가 시간과 공간의 구조를 얻는 장치에 가깝다.
2013년부터 202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모형궤도’(2013-2020년대 초) 연작은 이러한 문제의식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다. ‘모형’은 임시적이고 가변적이며 찰나적인 상태를, ‘궤도’는 반복과 흔적, 이동의
경로를 뜻한다. 《New satellite-모형 궤도》(OCI미술관, 서울, 2016)에서
작가는 도시 공간을 탐색하며 얻은 시각적 파편과 일상의 동선을 재조합해 익숙한 현실을 미지의 우주 공간처럼 전환했다.
〈모형 궤도〉(2016), 〈Phantom
Pain〉(2016), 〈Co-orbit〉(2016), 〈Event field〉(2016), 〈Back room〉(2016)
등에서 건축물, 극장, 방, 인물, 빛은 하나의 안정된 장면으로 수렴하지 않고 서로 다른 방향과
시점으로 흩어진다. 이때 화면은 현실 공간의 질서를 유지하는 동시에 그것을 무너뜨리며, 진실과 거짓, 실재와 허구,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묻는 장소가 된다. 〈Quiet play〉와
〈부랑자〉(2015)에 나타나는 반사되고 굴절되는 빛 역시 사회적·정치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믿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2018년
이후 박석민의 관심은 ‘현재’라는 시공간 자체에 대한 의심과
호기심으로 옮겨간다. 그는 대상을 시간당 프레임으로 나눈 이미지 데이터처럼 저장하거나, 하나의 대상을 같은 시간 안에서 여러 각도로 촬영한 듯한 화면을 구성하며, 불완전한
자극이 어떻게 하나의 총체적 형태로 지각되는지를 탐구했다. 《설탕을 녹인 공기》(아트스페이스 보안2, 서울,
2020)는 이러한 전환을 보여주는 전시다.
작가는 각설탕이 공기 속에서 녹는다는 불가능한
사고실험을 통해, 대상의 본질을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변형 가능성으로 바라본다. 설탕, 달콤함, 가벼움, 공백, 조명, 동선은
개별 회화의 소재를 넘어 전시 전체를 하나의 감각적 궤도로 만드는 요소가 된다. 이 시기부터 박석민의
작업에서 회화는 한 점의 완결된 이미지보다, 화면과 공간, 시선과
몸, 물질과 분위기가 함께 작동하는 체계로 확장된다.
최근 작업에서 박석민은
사변적 서사와 근미래적 상상, 움직임과 생태계, 비물질적
이미지 생산 방식과 물질적 회화 실험을 함께 다룬다. 《Angel
Tail》(에브리아트, 서울, 2022)과 ‘Mining Depth’(2022-2023) 연작에서는
빛의 파동과 비어 있는 모서리, 여러 크기의 캔버스가 관객의 신체적 이동을 유도하며 바라봄의 문제를
화면 밖으로 확장한다. 개인전 《Vortex 8》(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서울,
2023)은 태양계의 운동, 볼텍스, 대위법을
통해 움직임 자체를 회화적으로 번안한 전시였고, 《Teal
Greenhouse》(WWNN, 서울, 2024)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SF에 등장하는 폐순환 생태계의 구조를 빌려 전시장을 회화가 이식되고 배양되는 가상의
온실로 설정했다.
〈Teal Greenhouse 01〉(2024), 〈Teal Greenhouse 02〉(2024), 〈Terrarium 01〉(2024), 〈Temple Dawn 02〉(2024) 등에서 폐허인지 생명의 단서인지 알 수 없는 형상들은 미래의 불확실성과 회화의 생명력을 동시에 묻는다. 이후 단체전 《Rabbit Hole》(기체, 서울, 2025)에
출품된 〈Temple Dawn 06〉(2025), 〈Temple Incognita 01〉(2025), 〈Terra Incognita 01〉(2025) 등에서는 불탄 나무, 돌탑, 물웅덩이처럼 현실과 초월적 영역을 잇는 지형지물이 등장하며, 형태와 기운의 관계가 새로운 축으로 부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