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정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은 거대한 역사보다 그 역사를 실제로 통과한 한 사람의 이름과 장소를 먼저 바라본다는 데 있다. 식민지배, 분단, 전쟁, 산업화, 도시개발, 이주와
디아스포라처럼 한국과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를 이루는 큰 사건들이 작업의 배경이지만, 그의 영상에서 역사는
타무라 요시코, 권문국, 이춘희, 양순택, 하기모토 미치유키, 이일용, 김성정과 같은 구체적인 개인을 통해 나타난다.
이들은 ‘일본인’, ‘실향민’, ‘이주민’, ‘화교’라는 범주로 설명될 수 있지만, 작가는 그 범주보다 먼저 각자의 목소리와 기억, 고향에 대한 감각을
보여준다. 역사 속 약자를 단순히 피해자로 고정하지 않고, 때로는
식민자의 위치와 실향의 경험이 한 개인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복잡한 경우까지 그대로 다룬다는 점도 중요한 특징이다.
아카이브를
활용하는 다른 작업들과 비교해도 신미정의 방법은 자료의 양이나 역사적 사실의 재구성 자체보다 ‘장소를
어떻게 다시 감각하게 할 것인가’에 무게를 둔다. 지도와
일기, 사진, 공식문서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작업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지금의 거리와 바다, 철도, 사라진 섬이 있던 자리처럼 평범해 보이는 현재의 풍경이 개인의 기억과 만날 때 비로소 과거가 다시 작동한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서 장소는 사건이 벌어진 배경이 아니라 기억이 계속 갱신되는 주체에 가깝다. 한 지역 안에 다른 지역의 기억이 겹치고, 한 개인의 기억 안에
다른 사람의 경험과 국가의 역사가 스며든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것도 신미정이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온 장소 개념이다.
최근의
변화는 작가가 스스로 구축해온 증언의 방법을 다시 점검하고 있다는 데 있다. 초기에는 사라진 목소리를
찾아 1인칭으로 되살리는 일이 중요했다면, 〈타이완, 타향 그리고 타자〉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인물의 이야기를 아들이 대신 읽으며 증언의 주체가 흔들리고, 〈펑후 섬〉에서는 아예 한 사람의 이름과 목소리가 사라진다.
〈An Island Once Again〉에서는 기억의 주체가 인간을 넘어 자연으로 이동한다. 이는 기존 작업을 버리는 변화라기보다, ‘사라진 존재를 어떻게 대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점차 ‘말하지 않고도 어떻게
기억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인간이 아닌 존재의 시간은
어떻게 들을 수 있는가’로 깊어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신미정은 2023년 제19회 장두건 미술상를 수상했고, 최근 수상작가전 《세 개의 목소리, 드러나는 세계》를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열었다. 한 개인의 작은 기억에서 출발해 동아시아의 이동과 폭력, 자연과
생명의 기억까지 시야가 넓어진 만큼, 앞으로의 작업에서도 장소와 기록의 관계를 새롭게 갱신하면서 아직
역사적 언어로 충분히 포착되지 않은 존재와 시간에 접근하는 방식이 계속 중요한 축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