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지평 - K-ARTIST

사건의 지평

2021
3D 애니메이션
10분 47초

About The Work

박재훈은 가상의 디지털 공간에서 3D 시뮬레이션을 주된 매체로 활용하는 디지털 조각가이자 애니메이터, 시뮬레이터다. 가상 공간에 구축한 조각과 풍경을 통해 사회·경제·정치·문화의 단면을 드러내며,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지구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성찰한다.

작가는 포인트 클라우드(point cloud)와 사진측량기술(photogrammetry)을 활용해 현실의 사물을 3D 데이터로 변환하고, 직접 제작하거나 게임 개발자들이 만든 레디메이드 데이터를 수집·가공·분해한 뒤 재조합해 가상의 공간에 배치한다. 이렇게 구성된 사물들은 하이퍼자본주의 아래 모든 질서가 재편되는 구조를 드러낸다. 화려한 스펙터클과 자본주의적 환희의 장면에 욕망이 초래한 파괴와 종말론적 풍경을 병치함으로써 그 이면의 비극을 암시한다.

박재훈의 작업에서 가상 세계는 현실을 대체하는 공간이 아니라 현실의 단면과 이면을 동시에 비추는 거울이다. 알고리즘에 따라 정교하게 구현된 물리 현상과 개연성 없이 병치된 사물들은 일상적 공간을 초현실적 풍경으로 변모시키며, 사물들은 종교적·자본주의적 알레고리로 기능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인간의 욕망과 동시대의 모습을 비추는 하나의 자화상을 제시한다.

개인전 (요약)

박재훈이 개최한 최근 개인전으로는 《과열된 풍차》(Grote Kerk Alkmaar, 알크마르, 네덜란드, 2026), 《폴리곤의 순례자들》(WWNN, 서울, 2026), 《파생 풍경》(성곡미술관, 서울, 2023) 등이 있다.

그룹전 (요약)

또한 박재훈은 《Shifting Reality》(Bradwolff & Partners, 암스테르담, 2025), 《눈 홉뜨기: 미디어 파사드를 위한 제안》(대안공간 루프, 서울, 2024), 《미적감각(美的感覺)》(서울대학교미술관, 서울, 2024), 2023 베이징 비엔날레 《Earth Heat Flow: the Visitor Who Returns to Solar Time》(베이징, 2023), 《예술평화: 0시의 현재》(울산시립미술관, 울산, 202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작품소장 (선정)

박재훈의 작품은 네덜란드 외무부, 네덜란드 왕실, Luc Tuymans & Carla Arocha 컬렉션, 울산시립미술관, LG 디스플레이, 현대모터그룹 등 다수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Works of Art

동시대의 단면을 드러내는 3D 시뮬레이션 세계

주제와 개념

박재훈의 작업은 인간이 만든 사물을 통해 인간 사회의 구조와 욕망을 읽어내는 데서 출발한다. 그에게 사물은 단순히 기능을 수행하는 도구가 아니라 시대와 문명, 인간의 욕망이 압축된 기호이자 언어다. 이러한 관점은 〈회전문〉(2019)과 〈대제단〉(2020)에서 일찍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백화점의 회전문과 화장품 진열대처럼 일상적으로 소비와 연결된 장치를 정밀하게 3D 모델링한 뒤, 마네킹과 종교적 제단, 죽음을 상징하는 도상과 결합하면서 소비 행위를 하나의 의식처럼 바라본다.

같은 시기 〈과열된 풍차〉(2020)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풍차에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의 역사를 겹쳐 놓고, 끊임없이 불타며 회전하는 풍차를 과열된 현대 문명의 상징으로 제시한다. 박재훈에게 사물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은 결국 그것을 만든 인간의 욕망과 제도를 되짚는 방법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실시간 연옥》(대안공간 루프, 서울, 2021)에서 보다 큰 세계관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전쟁과 감염병, 빈곤과 재난이 발생하는 동시에 소비와 자본의 축적 역시 멈추지 않는 현실을 ‘실시간 연옥’이라 명명하고, 자본주의가 종교에 가까운 믿음과 욕망의 체계로 작동하는 방식을 살폈다. 〈사건의 지평〉(2021)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전쟁 폐허, 후쿠시마 원전, 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 자연 상태의 돌과 축하용 콘페티를 한 화면 안에 병치한다.

〈밤을 위한 제의〉(2021)에서는 종교적 향로와 중동의 카펫, 의료용 호스, 방송 케이블과 전쟁 뉴스가 한데 얽힌다. 현실에서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에 놓여 있던 사건과 사물이 가상공간 안에서 동시적으로 출현하면서, 자본과 기술, 전쟁과 소비가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문명적 구조 안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 관심은 자본주의의 구조를 넘어 인간이 자연과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소유하고 변형해왔는지로 넓어진다. 〈빙하를 위한 제의〉(2022)는 실제로 녹아 사라지는 빙하를 3D 스캔해 디지털 공간 안에 영구적으로 보존하면서, 자연을 파괴한 인간이 다시 기술을 통해 그것을 보존하려는 역설을 다룬다. 〈거룩한 묘시〉(2022)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폐허와 노드스트림 가스 파이프라인, 석유 관련 장치, 경찰 장비 등을 고속도로의 이미지와 결합하며 성장과 속도를 향한 욕망이 파국의 방향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그린다.

〈나뭇가지의 방〉(2023)에서는 회색 콘크리트 공간 안에서 한 나뭇가지가 비현실적인 폭포수를 만들어내며, 산업 문명과 자연의 공존 가능성을 보다 압축적인 장면으로 제시한다. 이 시기부터 박재훈의 작업은 자본주의 비판을 직접적인 결론으로 제시하기보다, 사물과 자연, 기술이 뒤엉킨 장면을 통해 인간 문명이 만들어낸 모순을 관찰하는 쪽으로 조금씩 넓어진다.
 
최근의 《폴리곤의 순례자들》(WWNN, 서울, 2026)은 이러한 질문을 가상공간 자체의 존재 조건으로 옮겨간다. 점군, 폴리곤, 픽셀과 복셀, 벡터와 좌표로 구성된 세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중심에 서 있지 않고, 도달할 수 없는 절대좌표계의 원점을 향해 계속 이동하는 ‘순례자’로 나타난다. 과거의 작업에서 사물이 인간의 욕망을 대신했다면, 이제는 좌표와 인터페이스, 이동과 지연이라는 가상세계의 구조가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은유가 된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지만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움직임은 성장과 진보를 믿어온 근대적 시간관을 흔들고, 인간을 세계의 주체가 아니라 수많은 좌표 가운데 하나의 점으로 다시 위치시킨다. 초기의 자본과 소비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인간이 만든 체계 속에서 인간 자신이 어떻게 방향과 중심을 잃어가는가에 대한 보다 넓은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형식과 내용

박재훈은 회화를 전공했지만, 초기부터 기성품과 산업 재료를 활용한 설치와 조각에 관심을 가져왔다. 건축 현장을 가까이에서 접했던 성장 경험과 사진, 인테리어 디자인, 설치 작업의 경험은 사물을 하나의 구조와 기호로 바라보는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며 작업의 중심은 물리적인 오브제에서 3D 시뮬레이션으로 이동했다.

포인트 클라우드와 포토그래메트리를 이용해 현실의 사물을 데이터로 변환하고, 게임 개발자들이 제작한 3D 오브제를 ‘디지털 레디메이드’처럼 수집한 뒤 이를 해체하고 다시 조합한다. 실제 사물을 정밀하게 측량하면서도 이미 만들어진 게임 산업의 데이터를 함께 사용하는 방식은 현실의 기록과 가상의 기성품을 같은 재료의 층위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을 특징짓는다.
 
3D 시뮬레이션의 물리 법칙 역시 중요한 조형 언어다. 〈회전문〉에서 마네킹은 회전문의 속도와 무게, 충돌값에 따라 계산된 움직임을 반복하고, 〈총체적 난국〉(2023)에서는 물이 새는 방의 하루가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구도를 바탕으로 재구성된다. 〈나뭇가지의 방〉에서는 콘크리트 방 안을 떠다니는 가지에서 물이 쏟아지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상황이 디지털 물리 엔진을 통해 그럴듯하게 작동한다.

박재훈의 영상이 묘한 긴장을 만드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장면 자체는 초현실적이지만, 사물의 표면과 중력, 충돌, 빛과 액체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정교하다. 현실과 닮았지만 완전히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운 이 감각은 디지털 이미지의 인공성과 물질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작가는 완벽한 사실성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결함 역시 숨기지 않는다. 3D 스캔에서 빠져나간 정보, 렌더링 과정의 오류, 겹치는 면에서 발생하는 글리치와 인공적인 표면은 기술이 현실을 완전하게 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흔적이 된다. 《파생 풍경》(성곡미술관, 서울, 2023)에서는 스타링크 위성, 가스 파이프라인, 화물 컨테이너, 전쟁의 잔해와 핵무기 같은 동시대적 사물을 바니타스 정물화의 도상과 결합해 거대한 디지털 제단처럼 구성했다.

반면 같은 해의 〈돌과 모래〉, 〈마지막 빙하〉와 이후의 ‘Bodem’ 연작은 토양과 균사체, 빛과 생명 같은 자연의 구조로 관심을 넓히면서, 시뮬레이션이 재난과 자본의 장면뿐 아니라 생태계의 관계를 실험하는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가상공간에서 축적해온 조형 언어가 다시 물리적 사물로 이동하고 있다. 《Shifting Reality》(Bradwolff & Partners, 암스테르담, 2025)에서는 3D 시뮬레이션과 함께 디지털 모델을 기반으로 한 3D 프린팅 조각을 선보였고, 〈선전 기계〉(2025), 〈발사대〉(2025), 〈내부의 중심〉(2025), 〈우주비행사 기동 유닛〉(2025)에서는 산업 디자인의 환기 구조나 기계 부품, 종교 건축과 장식에서 발견한 기하학적 질서를 합성 폴리머로 물질화했다.

디지털 세계의 형태가 현실의 조각으로 돌아오는 이 과정은 초기 설치 작업과 최근의 시뮬레이션을 다시 연결한다. 화면의 프레임 역시 직사각형, 정사각형, 원형 LED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하며, 이미지가 무엇을 보여주는지뿐 아니라 인간이 어떤 프레임을 통해 세계를 보게 되는지까지 작업의 형식 안에 포함시킨다.

지형도와 지속성

박재훈의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디지털 이미지를 현실의 반대편에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가상공간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에서 채집한 사물과 사건을 더 선명하게 배열할 수 있는 무대에 가깝다. 백화점의 회전문, 네덜란드의 풍차, 빙하, 전쟁 폐허, 가스 파이프라인 같은 실제 대상들은 데이터가 되어 가상공간으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서로 다른 역사와 의미를 가진 사물들과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이 때문에 작품 속 이미지는 사실적이면서도 낯설고, 아름답게 정돈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불안하다. 미술사에서 가져온 바니타스나 종교적 제단의 형식과 게임·건축·영화 산업의 3D 기술이 같은 화면 안에서 만나는 것도 이러한 복합적인 시간 구조와 연결된다.
 
3D 기술을 활용하는 많은 작업이 가상의 몰입감이나 시각적 새로움을 전면에 내세운다면, 박재훈은 그 기술을 사물을 조사하고 기록하고 재배치하는 일종의 연구 도구로 사용한다.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특정 사물의 역사와 기능, 정치적·경제적 배경을 조사하고, 직접 측량하거나 오픈소스 데이터를 찾으며, 그 과정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과 미술사적 도상을 다시 연결한다.

그래서 그의 화면에서 사물들은 장식적인 3D 오브제가 아니라 하나의 문장을 이루는 단어처럼 작동한다. 〈과열된 풍차〉의 풍차, 〈거룩한 묘시〉의 파이프라인과 고속도로, 〈빙하를 위한 제의〉의 얼음처럼 각각의 대상이 구체적인 역사와 현실을 품고 있다는 점은 그의 시뮬레이션이 단순한 디지털 초현실주의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작업의 방향 역시 현실의 사물을 디지털 공간으로 옮기는 데서 멈추지 않고 순환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다. 회화에서 설치와 조각으로, 다시 3D 시뮬레이션으로 이동했던 작업은 이제 가상세계에서 만들어진 조형을 3D 프린팅과 합성 폴리머를 통해 현실로 되돌리는 단계에 들어섰다.

동시에 《폴리곤의 순례자들》에서는 사물을 넘어 가상공간을 구성하는 좌표와 벡터, 인터페이스 자체까지 조형적 언어로 끌어들였다. ‘무엇을 재현할 것인가’에서 출발했던 질문이 ‘디지털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며, 그 안에서 인간은 어떤 위치를 갖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변화는 초기부터 지속해온 사물에 대한 관심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존재하는 조건 자체를 더 넓게 바라보는 확장에 가깝다.
 
박재훈은 서울대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한 뒤 헤이그 왕립예술학교에서 Artistic Research 석사과정을 마쳤고, 현재 암스테르담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파생 풍경》을 비롯해 《과열된 풍차》(Grote Kerk Alkmaar, 알크마르, 2026)에서 첫 네덜란드 미술관 개인전을 열었으며, 2023 베이징 비엔날레, 울산시립미술관, 서울대학교미술관, 대안공간 루프 등 국내외 전시에 참여해왔다. 작품은 네덜란드 외무부, 네덜란드 왕실, 울산시립미술관, Luc Tuymans & Carla Arocha Collection, 현대자동차그룹 등 여러 공공·기업·개인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현실의 사물을 가상으로 옮기고 다시 그것을 물질로 되돌리는 현재의 흐름을 보면, 그의 작업은 앞으로도 디지털과 물리적 세계 가운데 어느 한쪽에 머무르기보다 두 영역을 왕복하면서 인간 문명을 기록하는 방식 자체를 계속 확장해갈 여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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