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인은 유리라는 물질이
갖는 유동성과 생명성에 주목하며, 정지되어 있지만 살아있는 물질로서 유리를 탐구해왔다. 초기 개인전 《Gloryhole Light Sales》(개방회로, 서울, 2015)에서는 ‘글로리홀’이라는 유리 제작 도구에서 출발한 작가명처럼, 유리와 빛의 만남을 통해 생명을 환기시키는 조명을 제작하며, 예술과
상업, 작품성과 기능성 사이의 경계를 질문했다. 이는 일상과
맞닿은 미술의 실천 가능성을 모색한 실험이었다.
이후 박혜인은 2인전 《Ghost Shotgun》(시청각, 서울, 2019)에서 람한과의 협업을 통해 유리가 이미지의 스크린으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했다. 유리 표면은 더 이상 단순히 빛을 머금는 조형 요소에 머물지 않고, 디지털 이미지와 상호작용하면서 새로운 서사를 생산하는 투명한 매개체로 기능했다. 이러한 맥락은 유리가 외부 맥락과 연결될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 장치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2020년
단체전 《스케일, 스캐닝》(성북예술창작터)에서 선보인 〈눈섬광 어항〉(2020), 〈숨과 파동〉(2020)은 빛과 유리, 그리고 유기 생명체의 결합을 통해 인간의
생리적 반응이 타 생명체의 빛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제시하며, 생명성과 상호작용성에 대한 관심을 본격화한다. 이 과정에서 박혜인은 유리를 단지 생명을 은유하는 소재가 아닌, 생명의
매개자이자 반응체로 재정의한다.
개인전 《Diluvial》(문래예술공장, 서울, 2022)에서는 신화적 서사를 통해 유리와 화석을 겹쳐 보며, 생명의
흔적과 죽음의 증거가 만나는 지점에 대한 상상을 전개했다. 여기서 유리는 멸망 이후의 풍경을 담는 동시에,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매개물로 등장한다. 이는 Liquid Veil과 같은 최근 작업에서도 이어지며, 투명성이라는 개념이 인식의 경계와 의미 생성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함을 탐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