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음악원에서
아트 사이언스를 공부하고, 1990년대 초반 뮤지션으로서도 활동한 경력이 있는 권병준은 ‘소리’와 ‘로봇’을 중심 테마로 하여 동시대의 감각과 사회를 어떻게 다시 연결할 수 있는가에 질문을 두고 작업을 한다. 2010년대 초기 작업은 소리를 시각·촉각·공간 감각으로 확장하는 실험이 중심이 된다.
〈이것이 나다〉(2013)에서 그는 자신의 얼굴을 스크린으로 삼아 타인의 이미지로 덮어 씌우며 개별 정체성을 지우는 경험을 제시했고,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2014)에서는
물·바람·증기·빛·사운드가 맞물린 장(場) 속에서
관객의 감각을 다층적으로 깨운다. 작가의 작품에서 소리는 더 이상 귀로만 듣는 정보가 아니라, 몸과 공간을 통과해 관계를 만드는 매개가 된다.
2017년
이후 작품부터는 ‘이방성’과 ‘연대’의 메시지가 뚜렷해진다. ‘오묘한
진리의 숲’(2017–2019) 시리즈는 관객이 직접 위치 인식 헤드폰을 쓰고 걸으며 예멘 난민의 노래, 교동도의 경계 소리, 다문화가정의 자장가 등을 들으며 ‘소리산책’을 할 수 있게 하는 작품으로, 사회의 주변부를 향한 청취를 실제 동선과 결합시킨다.
개인전 《클럽 골든
플라워》(대안공간 루프, 2018–2019)에서 등장한 외팔
로봇 ‘GF’는 낯선 타자이자 우리 사회의 거울을 상징한다. 로봇들이
서로를 향해 전등 빛을 비출 때 두 그림자가 합쳐져 ‘양팔’이
되는 장면은, 결핍을 연대로 메우는 상징으로 읽힐 수 있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 2(로보트 야상곡)〉(2020)과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수상작인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로봇〉(2023)에서
확장된다. 권병준의 로봇은 효용을 위해 설계되지 않는다. 부채춤을
추고(〈부채춤을 추는 나엘〉, 2021), 오체투지나 면벽
수행을 반복하는 로봇은 ‘쓸모’로 가치를 매기는 자본의 문법을
비껴가며, 타자와 함께 사는 감각—머뭇거림, 기다림, 동반—을 환기한다.
한편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기획전 《도시공명》(2022)에서 선보인 〈청주에서 키이우까지〉(2022)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먼 곳의 비극’을 소리로 현재화한다. 과거의 평화로운 풍경음과 한국의 현장 소음을 겹쳐 들려주며, 망각되기
쉬운 타인의 공포를 관객의 신체 감각으로 이행시킨다. 권병준에게 기술은 스펙터클의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감수성을 옮기는 번역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