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 천은 영상, 드로잉, 사운드, 조각, 설치, 퍼포먼스를 넘나들지만, 각각의
매체는 언어를 분해하고 다시 조직하는 방법으로 연결된다. 초기에는 제도 안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는 언어적
장치가 중요한 재료였다.
단체전 《두산아트랩 뉴욕 2020: 엎질러진
얼룩이 물질을 흡수하기 시작한다》(DOOSAN Gallery New York, 뉴욕, 2020)에서 그는 영어 발음 교육 오디오, 공항 스피커, 관료적 문서의 워터마크, 흑연 같은 재료를 활용해 언어를 읽고 인증하는
제도적 장치를 시각적·청각적 형태로 변환했다. 알파벳 조립
장난감을 제대로 된 글자가 아닌 축 늘어진 추상적 형태로 만들거나, 발음 교육의 음성을 파편화해 거의
침묵에 가까운 소리로 바꾸는 방식은 언어의 규칙을 재료의 차원에서 직접 흔드는 접근이었다.
이후 드로잉은 단순히
보는 이미지에서 연주하고 해석할 수 있는 ‘악보’로 변화한다. 〈탈언어화의 악보 no. 082721〉(2021)은 로마자 스텐실, 흑연,
안료, 워터마크가 반복·중첩되며 읽기와 추상
사이를 오간다. 작가는 이러한 드로잉을 완성된 이미지로 고정하지 않고 다른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번역’하도록 열어둔다. 〈탈언어화의
악보(천지문 and Cosmos): 활성〉(2024)에서는 한국 전통연희 예술가 연희와 협업해 드로잉을 춤과 소리, 호흡의
퍼포먼스로 전환했다. 단체전 《혀 달린 비》(아트선재센터, 서울, 2024)에서 선보인 이 작업은 시각적인 기호가 다른 사람의
몸을 거치면서 전혀 다른 시간과 감각으로 다시 쓰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상 작업에서는 언어의
불확실성을 공간과 시간의 구조로 확장한다. 〈시: sea (2565)〉(2022)는 흑백 영상과 거울, 돌,
침묵을 함께 배치해 영상 자체를 하나의 조각적 공간으로 만들고, 명확한 서사 대신 오역과
파편적인 텍스트가 만들어내는 리듬을 강조한다.
〈오 더스트〉에서는 유네스코 본부의 통역 부스와 마이크, 비어 있는 회의실과 무형문화유산 아카이브를 촬영하며 ‘공식적으로
번역되는 언어’와 그 바깥에 남는 기억을 병치한다. 프랑스어
통역사의 목소리, 작가의 음성, 여러 언어의 텍스트와 중얼거림이
서로 겹치면서 하나의 언어로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영상의 문법을 만든다. 제시 천의 영상에서 번역은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절차라기보다 서로 다른 시간과 목소리가 어긋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편집 방식에 가깝다.
최근의 한지와 퍼포먼스
작업에서는 이러한 언어 실험이 더욱 신체적이고 수행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시: concrete poem (no. 041924)〉(2024)은 옻칠한
한지 위에 수많은 흑연선을 그리고 손으로 일일이 잘라내며, O와 ㅇ처럼 한글과 영어의 경계에 놓인 기호와
빈 공간을 하나의 추상적 문자 체계로 만든다. 남아 있는 종이와 잘려나간 공간, 그 사이에서 생기는 그림자까지 작품의 일부가 된다.
개인전 《밤, 낮, 달, 비, Speaking in Tongues》(Commonwealth and
Council, 로스앤젤레스, 2024)에서는 이러한 한지 작업과 영상 조각, 공중에 매달린 드로잉, 사운드가 함께 놓이며 언어가 읽히는 대상에서
공간 전체를 움직이는 감각으로 확장된다. 최근의 퍼포먼스에서는 이 악보와 문자들이 다른 예술가들의 목소리, 음악, 즉흥성과 결합하면서 작품이 한 번의 완성으로 끝나지 않고
매번 다른 방식으로 다시 활성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