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r image of 《OFF-TIME》 © Art Centre Art Moment

1.

성장, 진보, 혁신은 자본주의를 채택한 국가의 손쉬운 표어이다. 이는 주로 경제 수치로 구체화된다. IMF에서 매해 발표하는 경제 성장률은 전세계적인 위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플러스 성장을 전망해 왔다. 모든 국가는 경제 성장과 기술 혁신이 쾌적한 삶과 풍요로운 미래를 가져올 수 있다고 설파한다. 여기에 새로운 신념이 부상한다. 1970년대 대처리즘(Thatcherism)과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로 대두된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자율성과 효율성을 앞세우며 경쟁을 정당화한다.

마치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신자유주의가 요청된다는 듯이 말이다. 그것은 사회⋅정치⋅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주체에게도 내면화되었는데, 피에르 다르도와 크리스티앙 라발은 이를 “새로운 세계합리성”이라고 정의한다. 신자유주의는 비교적 최근에 출현하였다는 점에서 새롭고, 전세계적으로 전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이다. 또한 우리의 행동을 구성하고 조직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나 경제 정책이기 전에 하나의 합리성이다.

오늘날 국가와 사회, 개인은 숙련되지 않고, 미성숙하고, 부족한 상태에서 숙련되고 성숙하고 완전한 상태로 나아간다는 진보 서사를 믿으며 단 한순간도 버릴 틈 없이 끊임없이 개발하고 계발해 나간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삶에서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고, 바쁨은 습관이 되었다. 우리 인생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미 촘촘하게 설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걷기 시작할 때부터 죽음에 이를 때까지 개인의 삶은 이미 국가와 교육기관, 기업에 의해 계획되어 있다.

맬컴 해리스는 『밀레니얼 선언』에서 사회가 생산성 향상과 효율성 추구에 기반하여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를 요청했다고 말한다. 밀레니얼 세대는 “생산성 향상의 엔진”으로서 경쟁을 내면화하여 높은 수준의 교육을 감내하고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며 기꺼이 자신의 역량을 갈고 닦는다. 그러나 일자리 안정성은 약화되었고 임금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끝없는 경쟁에 스스로를 계속 내몬다.

한편, 개인은 남들보다 빠르게 고지를 선점하고 부러워할 만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믿는다. 삶의 모든 순간 일어나는 사건은 실시간으로 SNS로 공유된다. 서로가 서로의 취향을 탐닉하고 기호품은 어느새 필수품이 되어 소비를 조장한다. 삶의 기준은 나날이 높아지고 갖지 않은 것은 갖지 못한 것이 된다. 풍요가 문화로 정착되면 “현대화된 가난”이 찾아온다. 실제로는 가난하지 않더라도, 구입해야 할 상품이 늘어나면서 우리의 삶은 더욱 빈곤해진다.

‘완성된 개인’이라는 의미에서 ‘어른(성인)’이라는 개념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행할수록 계속해서 지연된다. 결혼, 취업, 출산 등은 해가 거듭될수록 평균나이가 더 높아지고 있고, 지식의 확장은 인간 한계를 넘어서 범접할 수 없는 속도로 나아가고 있다. 이상적인 삶에 대한 바람은 곧 우월주의, 서열주의로 귀결되며, 그에 따라 정상/비정상, 어른/아이/노인, 장애/비장애, 인간/비인간 등을 구분 짓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계기가 된다.

이미 높게 설정되어 있는 목표(완전성)에 도달하지 못한 개인의 불안은 그에 비례하여 더욱 커진다. 중산층의 재산, 건강한 신체, 유려한 외모, 남들보다 뛰어난 스펙, 완벽한 청결 등 사회가 요청하는 기준은 삶의 만족도를 떨어뜨리며, 개인을 계속 지연된 상태로 만든다. 충족되지 않는 기대에 도달하기 위해 개인은 시간과 몸을 혹사하며 살아간다. 모든 선택은 미래를 위한 선택으로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선택을 종용받는다. 우리에게 누구도 이러한 선택을 강제한 적은 없지만 그 밖의 선택지가 주어진 적은 없다.


Installation view of 《OFF-TIME》 © Art Centre Art Moment 

2.

하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월 스트리트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하였던 특이한 인물 바틀비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단편소설이다. 그는 자신이 맡은 필경 업무를 사무실의 그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이행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상사인 변호사의 요청에 “저는 하지 않는 편을 선호합니다 I would prefer not to…”라는 독특한 거절의 표현으로 응답하기 시작한다. 우체국을 가는 사소한 일부터, 자신이 맡은 업무인 필경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답변으로 응하다 해고에 이르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킨다. 마침내 변호사는 사무실을 옮기는 강수로 대응하며 그를 두고 사무실을 떠난다. 바틀비는 변호사가 떠난 뒤에도 사무실에 머물다 수감되고 음식마저 거부하다 죽음에 이른다.

필경은 정확성과 성실함을 바탕에 둔 반복적인 업무이다. 이 단순 업무는 일말의 비판적인 사고도 요청하지 않는다. 사무실의 필경사들은 하나씩 하자를 가지고 있다. ‘칠면조’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은 신경증이 있고, ‘펜치’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은 소화불량이 있다. 바틀비는 누구보다 성실했지만, 이내 모든 일을 거부한다. 필경사는 신자유주의가 내면화된 현대인의 표상으로 볼 수 있다. 앞선 두 인물은 기존의 체제에 순응하면서 그로 인해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질병을 겪지만 그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틀비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 – 그에게 주어진 전제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명령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는가? 그는 “하지 않는 편을 선호합니다 I would prefer not to…”라고 말함으로써 잠재성이 실현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하며, 할 수 있는 잠재성과 하지 않을 수 있는 잠재성 사이의 결정 가능성 자체에 저항한다.

우리가 가진 잠재성이 신자유주의의 내면화된 주체로서 응당 실현해야 하는 비좁은 방식으로만 실현되어야 한다면 삶은 얼마나 획일적이고 무가치해질까? 제니 오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에서 관심경제가 만연한 현 세계에서 자본주의적 가치 체계를 인식하고 준거 기준을 거부하는 ‘그 자리에서의 저항’을 주장한다. 세계의 지배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외딴 곳에서 스스로 소외된 삶을 살기보다, 나의 관심이 화폐가치로 교환되는 상황을 거부하고 자본주의의 기준에서 소외된 것들에 관심을 가지기를 요청한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가속화하는 삶에서는 무가치한 것,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보인다. 바틀비는 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Installation view of 《OFF-TIME》 © Art Centre Art Moment 

3.

기획전 《오프-타임》은 신자유주의 내면화가 만연한 시대에 효율성 기계가 된 개인의 삶을 돌아보기를 제안한다. ‘오프-타임 off-time’은 기계가 돌아가지 않는 비작동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체제에서 비효율적인 시간으로 간주되며, 이 시간을 줄일수록 사용자(기업가)의 이익은 증가한다. 전시는 자본주의에서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이라고 치부되는 것을 긍정하고 작동 시간을 지연시키고, 반복하고, 중단시킴으로써 비작동 시간을 활성화해본다.

배윤환은 성장 본위의 세계에서 희생되는 인간과 동물의 삶을 암시하는 우화에 기반한 〈키득대는 빙하들〉과 〈일요신간도서〉를, 홍정표는 완전성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미끄러지는 과정에서 유희를 찾는 〈9번 불러오기〉를 선보인다. 배윤환과 홍정표가 신자유주의의 내면화와 이를 극복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면, 이민선과 강민숙은 현대사회에서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이라고 치부되는 종류의 것(돌봄노동, 일상의 관찰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기존의 가치체계를 예술의 영역에서 다시 사유하고자 한다.

이민선은 〈알게 모르게〉, 〈의뢰인〉을 통해 의미와 무의미, 노동과 비노동, 생산성과 비생산성의 이분법적 구분에 의문을 제기한다. 강민숙은 〈담요 저항〉과 〈예술 노동 삶〉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가절하 되는 돌봄과 예술 노동을 재고한다. SW기획(김방주, 한승우)는 공간 전체에 개입하는 작업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했어요. 들어가세요.〉를 선보인다. 모던하고 효율적인 공간 구성에 반하는 우연적이고 열린 전시 공간을 연출하기 위해 공사가 중단된 어떤 상태를 구현함으로써 잠재된 에너지를 보여준다.

《오프-타임》은 타의적으로 부과된 목표에서 탈선하고 기존의 가치체계를 재편하고 가속화된 삶을 의식적으로 멈춰보기를 제안한다. 정지 상태의 불완전성이 가져오는 높은 엔트로피 속에서 잠재성의 갈래는 오히려 무한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전시를 통해 사회의 관성을 거스르는 예술적 실천에서 새로운 삶-정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