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of 《Pastel, Bullet, Beautiful Fingers》(G Gallery, 2024) © G Gallery

뒤따라오는 이름
황수연 개인전 《파스텔, 총알, 아름다운 손가락들》에 부쳐
장혜정 (기획/글)

이름 없이 태어난 종이 콜라주는 한때 ‘녹는점’이라고 불리다가 어느 순간 ‘작고 날카로운’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개별 이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나는 작업의 제목이 곧장 지어지지 않고, 한참 뒤늦게 따라오는 시차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마치 작업 스스로가 자신의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만들어진다’보다는 ‘생겨나다’, ‘자라나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황수연의 작업은, 작가도 작업을 이해하고 작업 스스로도 자신을 알아채는 시간을 경유하며 변신과 호명의 경로를 통과한다. 황수연은 손으로 자근자근 물질을 만지작거리며 최초의 상태나 형태가 거의 파괴, 해체되어 갈 때쯤 자연스럽게 내어진 길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 작업은 또 다른 행위나 물질로 엉겨 붙어 다음 작업으로 이어진다. 계속되는 이행과 생장의 과정에서 서로 연결되고 연장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종종 묶음의 단위가 만들어지지만 단 하나도 똑같은 모양이나 상태는 아니다. 각기 다르게 그러면서도 닮게 자라나는 작업은 어느 순간이 되면 하나 둘 씩 가장 어울리는 이름을 갖게 되고, 가끔 어떤 것은 끝끝내 무명으로 남기도 한다. 황수연과 그의 작업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변신과 호명의 경로’에서 ‘파괴’와 ‘해체’는 모든 지점에 깊고 때로 얕게 포진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비전형적으로 물질을 합치고, 중력을 거스르거나 위계를 전복시키는 방식으로 가공하고 사용하는 과정 중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창조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고 날카로운〉에서는 이 행위이자 낱말이 조금 더 특별히, 의미심장하게 돌출되어 있다.

〈작고 날카로운〉에서의 ‘파괴’와 ‘해체’는 구체적인 감정과 의도의 상징이자 실천으로 자리한다. 온오프라인을 망라하고 세상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약자의 신체가 훼손되는 잔인하고도 공포스러운 사건을 보고 들으며, 황수연은 종이가 거의 구멍 나거나 찢어지기 직전까지 파괴하듯 검게 칠했다. 흰 바탕이 빈틈없이 까맣게 채워질 때까지 수없는 그어지는 흑연선과 그어내는 손의 압으로 눌리고 구멍 나고 얇아진 종이 위에서 일어나는 이 파괴적이며 반복적인 행위는 창작을 넘어, 분노, 탄식, 공포감의 발화이다. 그리고 불쑥 들이닥치는 공포 앞에 놓인 모든 약자의 안위를 바라는 무성의 외침이다.

그렇게 검게 칠해진 종이는 어렴풋한 빛을 품고 금속의 질감을 입는다. 그리고 다시 손, 발, 귀, 코, 혀 등 이미 파편화된 신체를 추모의 마음으로 상상하고, 동시에 그것이 굳고 단단해져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상태 그래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상태로 나아가는 힘을 갖길 바라며 작은 개별 조각으로 가공된다. 이 조각들은 식칼, 주걱, 포크, 청소솔, 의료용 메스, 조각용 손 도구, 면도칼, 필기구 등 주변에서 흔히 사용되는 날카로운 물건, 절실한 경우 어쩌면 무기가 될 수 있는 도구의 형상을 따른다.

황수연은 날카롭게 빛나는 그러나 여전히 연약한 이 검은 파편들을 층층이 겹치고 뭉치며 쇠처럼 단단하고 뾰족한 힘을 갖게 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이러한 해체와 결합의 연쇄적 행위는 각인과 기도의 은밀한 실천인 것이다.

작고 납작한 종이 조각이 켜켜이, 가지런히 모여 얕은 돋을새김처럼 편평하고 은밀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등장하는 모습은, 해도 해도 티가 나지 않지만 구성원의 일상을 지탱하는 근간을 도닥이는 집안일과 같으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날개를 퇴화시키고 단단한 껍질로 온몸을 감싸는 작은 곤충의 진화와 같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깊숙한 속으로부터 서서히 외부를 향해 배어 나오는 변모의 순간을 거쳐 이렇게 세상에 나온 고유한 존재들은 적절한 때 저마다 어울리는 이름으로 불린다.

파스텔, 총알, 아름다운 손가락들
가지런한 각도, 빛나는 이, 날 선
작은 꽃잎을 몸에 붙이고, 두 눈과 씨앗, 동그란 배
날카롭게 겹겹이 감추는 쌓인 작고 부러지는 긴 코
털이 많은 작고 날카로운 많은 다리 둥근 배
입술 사이에 감추고, 언제든 던질 준비가 되어있다
낮은, 고요히 돌아가며 부르는 이름
겹겹이 반감기는 어둠에 베이는 꿈
읽지 못하는 편지
검고 윤이 나는 긴 목, 몸, 목걸이
잊고 잃어버린. 닦고 그리는 모든 것
날카로운 확신 내 눈 앞에 오는 날
Oval, 그리고 꼭 쥔 손⁎

황수연의 개인전 《파스텔, 총알, 아름다운 손가락들》은 이 아름다운 이름의 모음이며 변신의 길목이다. 전시장에 지어진 허술한 벽과 지붕은 비록 안위를 담보할 수 없지만, 여리고 고유한 존재들이 잠시 머물며 스스로 호명하고/되는 힘을 갖게 될 때까지 유예한다.

⁎〈작고 날카로운〉 시리즈 개별 작품 제목 인용

References